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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까자까 Nov 14. 2022

비밀 공조

이역만리 고깃집에서 싹튼 뜻밖의 우정


"숯 불은 나의 친구~ 숯만 있으면 난 외롭지 않네~ 숯~"


추억의 만화 '축구왕 슛돌이' OST를 개사해서 '슛'을 '숯'으로 바꿔 부르는 친구가 있었다. 고깃집에서 숯 담당하는 친구를 숯돌이라고 불렀는데, 까만 뿔테 안경에 야구모자를 항상 쓰고 있었다. 숯돌이는 성격이 온화하고 웃을 땐 시골 청년처럼 순박했다. 나와 숯돌이, 그리고 슛돌이 OST를 개사해서 노래를 부르던 B는 동갑이었다. 


어렵게 구한 나의 첫 외국 생활 아르바이트. 고깃집에서 일을 시작했을 땐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고기를 자주 먹을 수 있을 거라는. 하지만 직원 식탁에서 도통 만나기 힘든 녀석이었다. 손님들의 테이블로 와인을 서빙하러 갈 때면 지글지글 불판에 타오르는 저 등심 한 조각을 어찌나 입속에 넣고 싶던지. 침을 꼴깍 삼키며 다시 돌아서야 했다. 의외로 고깃집 아르바이트는 고행이었다. 고기 냄새를 실컷 맡지만 고기는 먹을 수 없으니 말이다. 






한창 바쁜 주말 저녁 타임이었다. 


서빙하던 동갑내기 B친구가 손님이 남기고 간 생고기 접시를 가져왔다. 그리곤 유유히 숯 방으로 들어갔다. 조금 있다 빈 접시만 들고 나왔다. 뭐하냐 물었고, 숯돌이와 더운 숯 방에서 손님들이 먹고 남은 생고기를 구워 먹었다고 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손님이 먹다 남긴 건데.. 침도 튀었을지도 모르는데 비위생 적이지 않냐고 했다. 


"어차피 불로 다 지져지는데 소독도 되고 괜찮아" 


B는 기름진 입을 닦으며 해맑게 웃으면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묘하게 설득당했지만 그래도 나는 먹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다짐은 얼마 가진 못했다. 저녁 9시가 넘으면 배가 고팠고, 점심때 먹는 밥은 이미 소화되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바에서 음료로 배를 채웠지만 허기는 가시지 않았다. 


그때 B는 또 손님이 남긴 생고기를 들고 숯 방으로 들어갔다. 슬쩍 보니 이번엔 안창살이었다. B는 나에게 손짓을 했다. '나는 그래도 먹지 않을래' 다짐했지만 숯 방에서 막 구워져서 나온 반지르르한 안창살을 보니 침이 저절로 고였다.


'그래, 불로 지져서 소독 다 되었을 거야' 


자기 합리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나는 고기 한 점을 일단 입에 넣었다. 육즙이 팡팡 터지는 막 구운 안창살은 황홀했다. 


이날 이후 홀에서 일하는 동료들이 손님들이 먹고 남은 생고기를 가져오면 숯돌이에게 접시를 넘겼고, 나는 바에서 몰래 음료를 준비했다. 시원한 소맥이나, 막걸리를 음료수잔에 따라놓고 대기했다. 우리들의 환상의 공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숯불에 막 구워진 양념 불고기와 목이 칼칼~ 해지는 소맥 한잔은 팍팍한 워홀 생활의 오아이스처럼 달콤했다. 


모든 고기를 싹 비운 고마운 손님들이 아쉽게 느껴지는 순간들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남은 술로 소맥을 말아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배고픔과 피로감은 몰래 먹는 소맥 한잔으로 사라졌다. 

사장님 모르게 먹는 술과 고기는 마치 고등학교 때 선생님 몰래 책상 서랍 밑에다 과자를 숨겨놨다 꺼내먹는 그런 느낌이었다. 스릴 있고, 짜릿했으며 맛은 말해 뭐해.


그렇게 머나먼 이역만리 멜버른

고깃집에서 뜻밖의 우정이 쌓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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