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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생존, 편집

구텐베르크도 꼰대를 살립니다

by 바그다드Cafe

수도원 서기실에서 들려온 한숨


1455년 마인츠의 성 알반 수도원(St. Alban's Abbey) 필사실(scriptorium). 30년간 성경 필사에 자신의 삶을 바쳐온 한 수도사(monk)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옆 도시에 살던 구텐베르크라는 사람이 만든 인쇄기로 찍어낸 42행 성경이 자신이 평생 정성 들여 만든 필사본보다 더 아름답고 정교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구텐베르크의 42행 성경


게다가 그 인쇄기는 하루에 수백 장의 문서를 똑같이 찍어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성 알반 수도원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 중 하나로, 수세기 동안 유럽 필사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수사들은 이곳에서 기도와 노동이라는 수도원의 기본 정신(Ora et Labora)에 따라 성경과 고대 문헌들을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베껴 써왔습니다.


"이제 우리의 시대는 끝난 걸까요?"


수도사들의 걱정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도원의 필사실은 당시 최고의 지식 산업 현장이었습니다. 수도사들은 성경뿐 아니라 각종 고문서와 서적을 베껴 쓰는 일에 일생을 바쳤고, 그들의 아름다운 필체와 섬세한 삽화는 그 자체로 예술의 경지였습니다.


하지만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이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수개월이 걸리던 책 한 권의 필사가 이제는 하루 만에 가능해졌습니다. 더구나 인쇄된 책은 오탈자도 적고, 모든 페이지가 균일한 품질을 유지했습니다.


"우리의 성스러운 일을 이단의 기계가 대신한다고?"


일부 수도원에서는 격렬한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악마의 검은 기술"이라며 인쇄술 자체를 배척하는 목소리도 있었고, 몇몇 수도원에서는 인쇄된 책의 구매와 보관을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마치 우리 시대의 'ChatGPT 사용 금지' 같은 규제가 있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뜻있는 수도사들이 새로운 길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단순 필사에 매달리지 않고, 원본의 교정과 편집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습니다. 자신들의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경험을 인쇄술과 결합한 것입니다.


최초의 '편집자'들


예를 들어, 마인츠의 한 수도사는 인쇄될 원고의 오류를 찾아내고 수정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단순한 오탈자 교정을 넘어, 내용의 정확성과 일관성을 검증하는 일이었죠. 오늘날로 치면 '편집자'의 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수도사들은 책의 레이아웃과 디자인을 담당했습니다. 그들의 심미안과 예술성은 인쇄된 책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습니다. 필사본의 화려한 장식문자를 인쇄본에 적용하는 방법을 고안한 것이죠. 이는 현대의 북디자이너와 같은 역할이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여러 필사본을 비교 연구하여 가장 정확한 원본을 확정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이는 오늘날 교열자나 교정학자와 비슷한 역할이었습니다. 그들의 꼼꼼한 작업 덕분에 더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책이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지식 산업의 르네상스


놀랍게도 인쇄술의 발전은 책과 관련된 일자리를 없애기는커녕 오히려 늘렸습니다. 편집자, 교정자, 활자공, 인쇄공, 제본공, 서점 주인 등 수많은 새로운 직업이 생겨났습니다. 더구나 책이 대중화되면서 작가와 번역가의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인쇄술은 지식의 대중화도 이끌었습니다. 값비싼 필사본으로는 불가능했던 일이었죠. 더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게 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과학혁명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AI 시대의 우리에게


구텐베르크의 시대와 오늘날 AI의 시대는 놀랍도록 비슷합니다. 우리는 지금 현대판 수도사의 심정으로 ChatGPT를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역사는 우리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합니다.


1. 두려움을 넘어 기회로

- 인쇄술이 그러했듯, AI도 우리의 적이 아닌 동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 중요한 것은 이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느냐입니다.


2. 가치의 재발견

- 수도사들이 단순 필사자에서 편집자로 진화했듯이, 우리도 AI 시대에 맞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만의 통찰과 창의성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3. 지식의 확장

- 인쇄술이 지식의 대중화를 이끌었듯, AI는 새로운 형태의 지식 혁명을 가져올 것입니다.

- 이 과정에서 새로운 직업과 기회가 창출될 것입니다.


편집자의 시대


결국 우리는 모두 '편집자'가 되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AI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을 검토하고, 개선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 말입니다. 수도사들이 그랬듯이, 우리의 경험과 통찰력을 새로운 기술과 결합하는 것이야말로 AI 시대를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길일 것입니다.


거대한 변화의 시대,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인쇄기를 두려워하며 필사에 매달렸던 수도사가 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편집자로 진화한 수도사가 될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결과적으로 더 많은 지식 노동자를 필요로 했듯이, AI 시대 역시 새로운 형태의 전문가를 요구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 변화의 물결을 탈 줄 아는 지혜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도사들이 보여준 것과 같은 유연한 사고와 도전 정신입니다. 그들이 단순한 필사자에서 편집자로 진화했듯이, 우리도 AI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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