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 찍기의 고금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책임 회피의 DNA"
조선시대 관리들의 '벼르고 벼르다 도장 찍기'는 단순한 우스갯소리가 아닙니다. 이는 관료사회의 뿌리 깊은 책임 회피 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었습니다. 당시 관리들은 자신의 도장이 찍힌 문서에 책임을 져야 했기에, 최대한 결정을 미루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 마지못해 도장을 찍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런 행태에 대한 기록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숙종 때의 한 기록은 "관리들이 책임을 두려워하여 시급한 일도 며칠씩 미루니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른다"라고 지적합니다. 정조는 이를 개선하고자 '즉시 품의 즉시 처리' 원칙을 강조했지만, 관료들의 타성을 바꾸기는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책임 회피 문화는 놀랍게도 현대 사회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도장 대신 이메일이, 상소문 대신 품의서가 등장했을 뿐입니다. 대기업의 한 중간관리자는 "단순한 구매 결정도 최소 7명의 결재가 필요하다"며 "실수에 대한 책임을 나누기 위해 불필요한 결재자들이 계속 추가된다"라고 토로합니다.
특히 현대에는 '참조' 기능이라는 새로운 무기가 생겼습니다. "혹시 모르니 참조에 넣어둡시다"라는 말은 현대판 '벼르고 벼르다 도장 찍기'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한 프로젝트 매니저는 "간단한 이메일에 20명이 참조된 경우도 있다"며 "이는 책임을 분산시키는 동시에 자신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단"이라고 설명합니다.
반면 글로벌 기업들은 이런 비효율을 과감히 타파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에어비앤비는 '결재자 3인 룰'을 도입했고, 구글은 '빠른 실패, 빠른 학습'을 강조하며 과감한 의사결정을 장려합니다.
옆나라 일본 또한 변화의 움직임을 보입니다. 소프트뱅크는 전통적인 링기(稟議) 시스템의 혁신적 개선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링기란 일본 기업의 전통적인 품의·결재 제도로, 말단 직원부터 시작해 관련 부서를 모두 거쳐 최종 결재권자까지 도달하는 상향식 의사결정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한 건의 제안이 최종 승인을 받기까지 때로는 수십 명의 결재와 수개월의 시간이 소요되기도 했습니다.
손정의 회장은 이런 링기 시스템이 "급변하는 디지털 시대에 맞지 않는다"라고 판단했습니다. 2010년대 초반, 소프트뱅크는 전자결재 시스템을 도입하며 결재단계를 대폭 축소했고, 특히 중요도가 낮은 안건의 경우 담당 부서장 전결로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했습니다. 더불어 'SB 카이젠(改善)' 프로그램을 통해 불필요한 회의와 보고를 줄이는 등 의사결정 프로세스 전반의 효율화를 추구했습니다.
MZ세대의 등장은 이런 변화를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회사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그들의 가치관은 불필요한 절차와 형식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집니다. 이들은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의 확인이 필요한가요?"라고 당당히 질문하며, 기존의 관행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실천을 위한 작은 용기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불필요한 참조자 추가를 줄이고, 책임과 권한을 명확히 하며, 신속한 의사결정을 장려하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 후손들은 현대의 이메일 참조 문화를 보며, 우리가 조선시대의 도장 찍기를 보고 웃는 것처럼 웃게 될지도 모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용기, 그리고 그 용기를 지지해 주는 조직 문화입니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벼르고 벼르다' 문화를 이제는 과감히 벗어던질 때입니다. 우리 모두가 책임의 주체가 되어, 가치 있는 일에 시간을 쓰고 더 이상 인생을 낭비하지 않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