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와 조지워싱턴
응급 알람이 요란하게 온 집안을 울려댔다. 내 휴대폰과 남편 휴대폰뿐만 아니라 온 집안의 각종 애플 기기들이 합창단처럼 귀가 먹먹할 정도로 다 같이 삑- 울려 댔다.
같은 시간,
우리 집뿐만 아니라 동네 이웃들, LA를 포함 산타모니카 친구들 휴대폰도 일제히 비상 알람이 울렸고, 다들 긴장모드로 전환되었다. 비가 많이 오지 않는 엘에이에서 지금이 우기이긴 하나, 와도 너무 내린다.
특히 우리 학교 학부모들은 더욱 긴장하고 불안하였다.
노란 배경 화면 위에 Flash Flood warning (갑작스러운 홍수, 집중호우)으로 시작하여 작고 빼곡한 글씨로 알람 내용이 가득 적혀 있었다. 나 포함 엄마들은 일제히 공동채팅방에 한 마디씩 올렸다.
"이대로 비행기 뜨나요?"
"아직은 간데!"
"(날씨가) 이게 무슨 일이래요!"
"학교에서 연락 왔어요?"
"아까 이메일과 학교 부모사이트에 교장이 예정대로 간다고 글을 보냈는데, 계속 팔로우업 한데."
"공항에서 캔슬 안 하고 정시간에 이륙한데!"
빗소리는 점점 더 굵어지고, 지붕을 뚫을 듯한 강철 같은 소리를 내며 비는 우리 집을 덮쳤다. 한가닥 한가닥의 빗소리가 아닌 이건 마치 폭포 소리다. 콰광 거리며 떨어지는 굵고 센 폭포를 나른하게 관광하며 지나갈 때 듣던 그 소리 말이다. 이런.. 왜 하필 지금, 오늘…
1.
지난 몇 주 5학년 첫째딸과 친구들은 무척 들떠 있었다.
아이와 친구들은 학교를 갔지만, 숙제도 공부도 뭐고 모두 정신은 저 허공을 유람하고 있었고, 그들은 땅 위를 걷고 있지 않았다. 너무 행복해서 여행을 함께 가지 못하는 친구들 앞에서도 (아쉬운 마음도 컸지만) 여행의 기쁨을 가리지 못했고, 학교에서 만나면 아니 하교 후에도 채팅이나 전화로 여행이야기에 들떠 있었다.
100여 명의 초등 5학년들의 수학여행
우리 학군의 세 초등학교는 오래된 전통이 있다. 미국역사를 배우는 5학년때 필라델피아, 밸리포지 국립 역사박물관을 돌며 역사를 배우고, *아미씨 Amish 타운을 방문해 전기와 같은 현대 문물을 사용하지 않는 그들의 문화를 경험하고 오는 4박 5일간 수학여행을 다녀오는 것이다.
오히려 6학년 졸업 여행은 차로 2-3시간 걸리는 가까운 곳으로 다녀온다.
밸리포지는 한국에서는 크게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사실 난 몰랐다.)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밸리포지는 미국 독립 전쟁 중, 1777-1778년 조지 워싱턴이 대륙군을 이끌고 겨울동안 주둔했던 곳으로, 추위와 함께 어려웠던 시기를 견디었던 곳이다. 많은 병사들이 추위, 배고픔, 질병등을 견디며 이천여명의 병사들이 사망하기도 했지만, 군대는 이후 여러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이곳은 회복과 생존을 상징하고 미국 독립을 기리는 곳이 되었다.
조지 워싱턴과 독립전쟁 대륙군을 기념하기 위해 밸리포지는 국립 역사 공원으로 지정되었고, 병사들이 도끼로만 지어만든 통나무집과 같은 건축물들이 재건되었으며, 전시관과 기념물들을 통해 학생들이 미국 역사를 배우는 귀중한 장소가 되었다.
그 먼 곳 수학여행을 위해 우리 학교의 한 선생님이 30여 년 전 수학여행을 기획하였고, 그때부터 학군 전통이 되었다.
특히 딸아이의 학교는 워싱턴이 추위를 혹독하게 겪었던 그 2월에 간다.
여행은 40여 명의 **샤프론 Chaperone과 선생님들, 교장 선생님이 동행을 한다. 10-11살 어린이들이 미국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먼 여행을 하는 만큼, 샤프롱을 지원한 부모 중 의사와 약사 같은 메디컬 관련 직종 부모와 짐꾼을 할 아버님들을 우선으로 뽑는다. 밤새 부모가 그리워 훌쩍거릴 학생들을 안아줄 엄마들, 장애아이의 부모, 개구쟁이를 넘어선문제아이(trouble maker)의 부모등 여러 사항을 고려해 적절한 비율로 학교에서 샤프론을 구성한다.
그렇게 학생 100여 명, 선생님들과 샤프롱 40여 명이 수학여행을 간다.
30여 년 전통의 경험이 가득한 수학여행이므로 5학년 선생님들은 능숙하게 진행하셨고, 어린 시절 그 수학여행을 다녀왔던 몇몇 이 학교 출신 엄마들은 샤프론으로 따라가면서 추억여행 마냥 흥분되어 있었다.
2.
2024년 2월 5일 월요일 새벽 3시 학교 집합
Flash flood 비상알람으로 온 동네 5학년 부모는 긴장되었고, 쏟아지는 집중호우 속에 혹 비행이 캔슬될까 메시지를 확인하며 잠을 설쳤다.
결국,
그 새벽,
5일간의 여정을 위해 모두가 학교로 모여들었다.
비는 여전히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콸콸 흐르는 물에 아이 운동화와 양말은 이미 젖었다.
하... 스노우 부츠를 신길걸…
5시간 정도의 비행을 생각하여 운동화를 신겼건만...
며칠동안 준비했던 여행가방.
평소 여행짐은 아이 혼자 거뜬히 싼다. 하지만 이번은 처음 혼자 떠나는 여행.
엄마의 노파심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더구나 따뜻한 지역에서 태어나 살아온 캘리포니아 출신 어린이들이 눈이 펑펑 내리는 영하 날씨로 5일이나 여행을 가는지라 내복이며 겨울옷등 신경 쓸 게 많았다.
옷 갈아입고 샤워할 시간 여유도 많지 않다 하고, 아이가 뒤죽박죽 된 짐 속에서 필요한걸 못 찾을까 봐 작은 가방들을 구입해 종류별로 분류하여 꼼꼼히 짐을 쌌다.
영하의 날씨를 가늠하지 못한 채 젖은 머리로 다녀 혹 감기라도 걸릴까 봐, 흰색 미니 헤어드라이어도 장만해 넣어주었다 (집에서 사용법도 연습시켰다)
눈 내릴 것을 대비해 스노우 바지와 부츠도 새로 구입하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눈은 내리지 않았고, 그래서 아이들은 실망하였고, 스노우부츠도 멀끔한 새 신발로 돌아왔다.)
특히 빨간 파티 드레스와 하얀 카디건, 반짝이는 구두, 연한 파스텔톤 블루리본 헤어핀은 함께 작은 가방에 넣어 혹 구겨질까 러기지 안쪽에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마지막 날 만찬 때 입을 의상이었다.
딸과 함께 작은 가방에 라벨을 부치며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려주고, 그것들을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비행을 위해 저울을 달아가며 적정한 무게까지 확인한 후 러기지를 닫았다. 준비 끝.
모두 꾀죄죄한 민낯으로 새벽 3시에 모였다. 오래 봐왔던 학부모들이라 서로들 인사하며 어수선한 장터처럼 강당이 사람들과 러기지들로 꽉 찼다.
비행기는 예정대로 이륙한단다.
비행기도 비행기지만 나와 남편은 학교에서 LAX 공항까지 한 시간여 달릴 노란 스쿨버스가 걱정이었다. 새벽 집중호우 속에 고속도로를 달릴 스쿨버스가 혹 미끄러져 사고 날까 염려되었던 거다. 엘에이 지역 고속도로 배수시설은 별로다. 비가 오면 물이 잘 빠지지 않아 도로 중간 물이 흥건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비가 오면 사고도 잦다. 그것을 예상했는지 교장선생님은 내내 '경력 많은 전문 운전사'이기에 걱정하지 말라는 안전 메시지를 부모들에게 여러 번 날렸다. 정말 내가 직접 공항으로 아이를 데려다주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아이와 친구들의 첫 여행을 시작부터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출발 2-3주 전부터 붕 떠서 다니던 아이들은 집중호우 속에서도 행복한 마음으로 공항을 향해 출발하였다. 어둡고 추운 새벽 속, 비에 젖은 스쿨버스는 서서히 움직였고, 아이들 입김에 창문은 뿌연 김이 서려 내 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꼬맹이들 잘 다녀와~'
고요한 새벽 3시, 비가 내리는 어둠 속 버스 안은 5학년 아이들의 신남에 시끄러웠고, 버스는 설렘과 기쁨을 가득 싣고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5학년 큰아이의 첫 인생여정이 시작되었다.
( 다음 연재에 2편이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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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시 Amish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중부에 존재하는 재침례파 계통의 생활 공동체.
우리나라 청학동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는데, 아미씨는 현대 문물을 거부하며 자급자족 생활을 한다. 마차를 타고 다니고, 전통화로에서 요리를 하며,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매년 학생들이 방문해 아미시 마을을 견학하고 그들이 농사지어 빻아 화로에 직접 구운 빵을 먹기도 했는데, 올해는 마을을 닫았기에, 딸포함 학생들은 다른 곳에서 아미시의 전통놀이를 배워 놀고, 전통 초도 만드는 등의 경험하는 견학을 하였다. 코비드 이후 잘 오픈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대식 병원을 사용하지 않기에 이해 되는 부분이다.
**샤프론 Chaperone
미국 학교에서 필드트립(소풍, 견학등)을 갈 때 아이들 보호 목적으로 따라가는 부모들이나 가디언들을 일컫는 말이다. 주로 발룬티어(자가 지원하는 봉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