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 de bourré
*소설 '발레리나' 속 모든 에피소드와 인물은 허구입니다.
울고 있었나? 아니면 멍한 얼굴이었나? 그 전까지는 어떤 얼굴, 어떤 표정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남편의 얼굴이 빼꼼히 문가에 비치는 순간에는 그녀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가 도착하기까지 한시간여 동안 홀로 동물병원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었던 예주의 마음은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총을 쏘고 포탄을 터뜨리는 군인이 아니라 누군가 쏘는 총알과 포탄이 이리 저리 오가며 그녀의 것들을 쾅쾅 부수는 것을 보고 있는 난민으로 참여한 전쟁터. 그마저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탁자 아래 웅크리고 앉아 눈 감고 귀 막은 채 모든 것이 얼른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그런 전쟁터의 인물이었다. 그러니 그 순간 나타난 남편은 그녀를 구하러 온 해방군처럼 보일 수 밖에.
"찰랑이는? 괜찮아?"
남편은 예주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보이지 않는 강아지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 순간 예주는 안심과 함께 또 다른 형태의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아직은 걱정 뿐인 그의 눈에 곧이어 따라올 비난의 차갑고 아릿한 빛이 떠오를 것 같아 무서웠다. 내 탓이라고 하면 어떡하지? 찰랑이가 잘못된 게 내가 잘 돌보지 못해서라고 하면 어떡하지? 아직은 그녀를 탓하는 그 어떤 말도, 행동도 보이지 않는 남편이었지만 왠지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은 그녀의 탓이 맞았기 때문이다.
찰랑이를 마당에 풀어놓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대문을 열거면 목줄을 했어야 했다. 적어도 찰랑이가 열린 대문 근처에 얼쩡거릴 때 얼른 문을 닫거나, 목줄을 매거나, '습!'하고 무서운 얼굴로 나무라기라도 했어야 했다. 놓치고 나면 보이는 수만가지 기회들이 그녀의 머리속에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라 예주의 표정은 겉으로 보기에도 복잡미묘했다.
그러나 예주를 괴롭혔던 건 따로 있었다. 강아지의 상태가 심각하면 어쩌나, 다시 걷지 못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보다도 남편에게 혼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더욱 크게 느꼈던 자기 자신. 내 탓임이 몰아붙여지면 어쩌나에 더욱 마음이 쓰이던 그 마음.
지금 그게 중요해? 내 잘못 때문에 자식같은 강아지가 이지경이 됐는데 누가 내 잘못을 캐묻고 뭐라고 할까봐 전전긍긍하는 게 정상이야? 예주는 스스로의 못난 생각이 느껴질 때마다 화들짝 놀라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 사이 남편은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눈물을 펑펑 쏟는 아내를 두고 접수대로 가 강아지의 상태를 전해 들었다. 친절한 테크니션은 드디어 말이 통하는 보호자가 나타난 것에 기뻐하며 한쪽 다리와 골반쪽에 복합골절로 긴급 수술에 들어갔으며 그나마 차량이 아닌 자전거와의 충돌이라 척추라던가 다른 곳들의 손상은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준석은 한쪽 귀로는 테크니션의 브리핑을 듣고 고개는 대기실 의자에 쭈구리고 앉아 훌쩍이는 아내의 기색을 살피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다'는 한마디만은 뚜렷하게 알아들었다.
"어쩌다 그랬어?"
보호자 브리핑을 끝낸 남편이 예주에게로 돌아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다정하게 물었다. 그 따뜻한 목소리와 감미로운 손길은 예주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거 왜 샀어?"
그리고 그녀는 내뱉자마자 후회하게 될 말부터 꺼내버렸다.
"뭐?"
"그 의자랑, 테이블. 마당에 둔다고 산 거. 그거 옮기다가 그랬어! 그 거지 같이 무거운 거 옮긴다고 낑낑거리다가 찰랑이가 나가는 것도 못보고!
자신의 탓을 숨기기 위해, 비난의 방향을 피하기 위해 그런 비겁한 생각을 한 자신이 너무 밉고 찌질하게 느껴졌지만 그런 자기비하 속에서도 그 말이 먼저 튀어나온 건 어쩔 수 없는 방어본능 때문이었다. 그 양가적인 감정에 예주는 다시 으앙하고 울음을 떠뜨려버렸다. 스스로가 이렇게 못나고 어린애처럼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는 어린아이 시절에도 어른스럽던 그녀였다.
으앙, 하고 울음을 떠뜨려본 게 언제였던가 기억도 나질 않았다. 예주는 서러움에 북받쳐 남편의 가슴을 쿵쿵 치며 당신 때문이야! 당신 때문이야! 하고 울먹였고 준석은 그랬구나, 미안해,하며 그녀를 꼭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 순간의 쪽팔림, 민망함, 그리고 여전히 사라지지 않던 죄책감이 그녀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수술 후 마취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해 헤롱거리는 강아지의 얼굴은 눈물인지 약물인지 알 수 없는 것으로 온통 축축했다. 인큐베이터 같은 유리 관에 누운 힘 없는 혓바닥이 그들의 손을 핥을 땐 예주뿐 아니라 준석도 같이 울컥했다. 놀랄까 봐 의연한 표정으로 몇번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 며칠은 더 입원해야 한다는 강아지를 두고 돌아서 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둘만 돌아온 집안은 이런적이 있었나 싶게 적막했다. 자각자각 발톱소리를 내며 불꺼진 방안을 한바퀴 돌고 부부 사이로 파고들어 그릉그릉 코를 골며 자던 정찰견이자 해맑은 귀염둥이가 사라진 집은 작은 강아지의 크기에 반비례하게 커다란 빈틈이 생긴 것처럼 텅빈 것 같았다.
남편은 집으로 돌아와 뜨거운 물을 가득 받은 욕실로 예주를 들여보내고, 옆집에 음료수 한박스를 들고 찾아가 사고 경위를 듣고, 소년의 연락처도 받아왔다. 긴 목욕을 끝내고 침대로 스스르 미끄러져 들어온 예주는 이불을 턱끝까지 끌어올리고 얼굴만 내놓은 채 누워서 그가 거실에서 소년의 어머니와 하는 통화를 들었다. 내용이 자세히 들리는 건 아니었지만 대충, 괜찮다, 괜찮냐, 미안하다 같은 말들이 계속 오가는 것 같았다.
30분쯤 지나자 집안의 불들이 하나 둘 꺼지더니 남편도 침대 속으로 들어왔다. 가만히 누운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배는 안 고파?"
천장을 보고 누워 눈만 껌뻑이는 예주에게 남편이 넌즈시 물었다.
"응. 자기는?"
"나도."
둘은 다시 할 말을 잃었다. 만나면 늘 할 얘기가 넘치던 둘이었는데. 어떤 친구와 있어도 남편보다 편하고 할말이 많은 사이가 없다고 생각했던 예주에게는 이런 상황이 너무 낯설고 불편했다. 먼저 말을 걸어볼까 하다가도 무슨 말을 하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단 한번도 해본적 없는 생각이었다. 무슨 말이든, 덥다, 춥다 같이 하잘것 없는 말이든, 삶과 죽음에 대한 심오한 토론이든간에 그와는 늘 할 얘기가 있었는데 오늘 밤의 그는 마치 처음 만나는 타인처럼 낯설고 멀게 느껴졌다. 어떻게 설명해도 그녀 안의 속상함이나 답답함, 염치가 없어서 낼 수 없는 화 같은 것들을 그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둘 사이에 하고 싶지만 하지못한, 혹은 뭐라고 해야할지 몰라 쌓인 뜻 없는 말들이 공기 중에 가득 찬 먼지처럼 방안을 빽빽히 채우고 있었다.
"나한테 미안해?"
남편이 다시 물었다. 예주는 뭐라 대답해야할지 몰라 입을 열었다 닫았다, 작은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했다. 어떻게 들으면 쌔근쌔근 잠을 자는 아기가 옆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강아지 같기도 한 소리가 났다. 아니면 뭔지 알 수는 없지만 혼자만의 고민에 휩싸인 여자라던가.
"......미안하기도 하고, 뭔가 억울하기도 해."
예주가 가까스로 자신의 마음을 묘사했다. 물론 그것조차 완벽한 자기 마음은 아니었다.
"화가 났어?"
남편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녀의 마음을 탐구해 보기로 마음 먹은 듯 했다.
"화가 나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했어."
"나에게? 아니면 찰랑이에게?"
"자기에게도 그렇고, 찰랑이에게도 그렇고."
"지금은 어때?"
"......"
예주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지금 기분은 어떻지? 병원에 홀로 누워있을 찰랑이가 보고 싶기도 하고, 걱정도 됐다. 집으로 돌아오면 간호를 어떻게 해줘야 할지, 혹시라도 영구적인 장애가 남기라도 하면 어떻게 돌봐야 할지 막막한 기분도 들었다.
"다행인 것 같아."
마음을 어지럽게 물들이는 수 많은 감정들 중에 예주는 다행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더 크게 내쉬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 남편도 똑같이 숨을 들이 마셨다가 크게 내쉬었다. 찰랑이가 있었다면 그들을 따라 한숨을 쉬었을까 상상해 보니 마음이 조금은 몽글몽글하게 풀어졌다.
"사실은 무서웠어."
다행스러운 한숨을 내쉬고 나니 새삼 남편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꺼내어 보여주고픈 마음 상태들이 생겨났다. 그녀는 천천히, 한번씩 끊어졌다 이어지면서 오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학원에 가면서, 수업을 들으면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집에 도착해서 보고, 듣고, 느꼈던 일들과 속상하지만 일어나고야만 찰랑이의 사고까지. 남편은 중간 중간 '어이구' 라던가, '헐' 같은 추임새들을 곁들여 그녀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듣고 있음을 표현했다.
"나 좀 밉지 않았어?"
그리고 드디어 예주는 정말 묻고 싶었던 것을 물을 용기를 냈다. 이미 준석이 그녀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어서가 아니었다. 이제서야 미움받을 용기가 났기 때문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워할 수도 있지, 탓을 할 수도 있지 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것이 더는 그리 괴로울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오늘 일어난 그 일로 그녀를 미워할 수도 있겠지만 다시 사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워하는 것을 숨기지 않고, 미움받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 마음을 솔직히 꺼내어 놓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처리하다 보면 미생물이 쓸모없는 물질들을 분해하듯 그렇게 사라질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꺼내지 않는다면, 마음 속 어딘가에 감춰두고 상관없는 감정으로 포장해 쌓아둔다면 분해가 아니라 부패가 일어날 것이다.
"원망스럽지 않았냔 말이지?"
준석이 고개를 예주 쪽으로 기대며 가볍게 콩, 부딪혔다. 예주는 몸을 슬쩍 돌려 그를 껴안으며 준석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전화를 받았을 때는 약간 화가 나긴 했어. 근데 자기한테 화가 났다기 보단 그냥 그 상황 자체에 화가 났던 거고, 그것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화가 아니라 걱정이라고 봐야 맞는 거지. 병원으로 출발하고 난 뒤엔 화보다는 걱정이 더 많이 됐어. 찰랑이 걱정도 되고, 자기 걱정도 되고."
"나? 왜?"
"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아서. 내 탓으로 사고가 난 거 아닌가, 내가 잘못해서 그런 거 아닌가."
"근데 그건 맞잖아."
"아니야. 그건 사고잖아. 사고는 갑자기 일어난 불행한 일이야. 우리가 신도 아니고. 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거야."
"내가 문을 안 열어 놨으면......"
"아니지, 내가 그 거대한 정원용 가구들을 주문하지 않았다면."
준석은 예주가 찾아낸 이유를 막으며 자신의 이유를 덧댔다.
"내가 정원 얘기를 하지 않았으면"
예주도 지지 않고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다시 자신의 과오를 찾아냈다.
"내가 이사 오자마자 현관에 강아지용 안전문을 달았더라면."
"찰랑이가 문에서 튀어나오지 않도록 교육을 잘 시켰더라면."
"찰랑이를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에이, 그건 너무 갔다."
남편이 다시 예주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꽁, 하고 찧었다. 둘 다 어느새 짖궂은 미소를 가득 띄운채였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찰랑이의 부상 관리와 퇴원후의 간호, 사고를 낸 학생의 사후 처리등에 관한 내용으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어떤 이야기는 진지하게, 어떤 이야기는 가볍게 지나갔고, 중간 중간 실소가 터질 헛소리들도 빠지지 않았다. 언제나와 같았다.
"혹시 말야. 찰랑이가 오늘 사고로 죽었어도 자기는 날 원망하지 않았을까?"
예주는 물을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묻기로 결정했다. 거기까지 궁금해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거기까지 들어야 마음 속 한 구석에 있던 텁텁함이라던가 찌질함 같은 것들이 사라지거나, 아니면 스스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편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늘 그렇듯 '음......오......어......'하는 소리를 길게 끌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만한 말들을 고르기 위해서였을까, 자신의 생각을 한치의 오차없이 정확하게 전달하고 싶어서였을까. 예주는 그의 어깨와 겨드랑이 사이에 끼어 음, 오, 어의 낮은 떨림을 온몸으로 느끼며 생각했다. 둘 다일 수도.
"슬펐겠지. 원망하는 것보다는."
고르고 고른 남편의 한마디는 성실하고 평범했다.
"내면의 괴로움을 파쇄하기 위해 바깥의 무언가를 파괴하는 건 본능적인 자기방어 기제니까 처음에는 조금 화가 났을지도 몰라. 자기에게 화를 내거나 원망을 하며 슬픔을 달래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금방 깨달았을거야. 슬픔은 나에게만 오는 게 아니라는걸. 네가 슬프면 나도 슬프니까 너를 괴롭게 하는 건 나를 괴롭히는 거나 마찬가지야. 게다가 너에게 화를 낸다고 해서 이미 일어난 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너에게 화를 내고 원망해도 찰랑이의 사고는 막을 수 없지만 우리 사이의 관계를 망가뜨릴 순 있겠지. 할 수 없는 일 때문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고 싶진 않아."
"완전 사랑꾼이네."
예주는 좋으면서 괜히 그렇게 한번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그의 솔직함에 대해 따스한 말로 응답하지 못하는, 낯간지러움과 쑥스러움에 갇힌 자신의 애정까지도 알아줬으면 하면서.
"나는 널 잃어버릴뻔 한 적이 있으니까 그때의 마음을 알고 있어. 다른 모든 것을 잃어도 그때 그 마음을 다시 느끼고 싶지는 않아. 나는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이미 알고 있어서 그래."
"......"
이번에는 예주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사랑 고백은 어찌 보면 시의적절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그 때문에 아주 적절했다.
반대로 예주가 남편의 입장이었어도 같았을까 생각해 보면 그녀는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화를 냈을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할 수 있냐고 그에게 짜증을 내고 두고 두고 신경질을 냈을 것이다. 두꺼운 깁스를 한 찰랑이의 다리를 볼 때마다, 혹시라도 한번씩 절뚝이는 찰랑이를 볼 때마다 그랬을 것이다.
"나는 자기한테 화내고 원망했을 것 같아."
예주는 남편의 사랑과 솔직함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도 솔직해지기로 했다.
"자기 성격상, 오래가지 않았을 거야."
남편이 킥킥 웃으며 그녀의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웃기 싫었는데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예주도 남편의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서로 투닥투닥 손으로 밀고, 발로도 차며 크크크, 킥킥킥 하다보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약속이나 한듯이, 둘 다 한번씩 고르륵, 꾸르륵. 안정된 마음이 내는 정직한 소리였다.
"라면 하나씩 먹고 잘까?"
남편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예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기가 끓여줘."
예주가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며 말했다.
"가위바위보 해."
남편은 예주를 끌어당겨 자신의 옆구리에 조립식 로봇의 부품처럼 착 끼웠다. 그 적당한 당김 힘과 적당한 밀착력, 서로 익숙한 몸의 굴곡이 모래 알갱이 같은 예주의 마음 사이사이에 액체처럼 스며들었다.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동안은 그 익숙함과 편안함이 그녀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될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한발, 또 한발, 방향을 바꾸고 낯선 어디론가 향하는 걸음이 한 발자국씩 떼어져 휘청거릴 때마다 곧바로 다시 디뎌지는 다른 발자국.
원망과 미움은 없고 감사와 일상만 있다. 누가 누구를 구할 수도, 누가 누구를 바꿀 수도 없다. 그저 서로 의지하고 있는 힘의 균형만 있을 뿐. 균형이 무너지지 않게 자꾸만 털어놓고, 털어둔 것은 그대로 둔 채 간다. 앞으로만.
원한다면 옆으로도, 뒤로도 갈 수는 있지만 원하는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힘을 잃어서는 안된다. 와다다다, 우다다다 그저 나아가야 한다. 그 뿐이다. 산다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