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ic-Flac
*소설 '발레리나' 속 모든 에피소드와 인물은 허구입니다.
남편은 휴가를 냈다. 찰랑이가 퇴원하는 날부터 3일. 일주일이나 입원해 있는 동안 예주는 매일 같이 면회를 갔으나 면회가 가능한 시간이 저녁 7시까지라 남편은 아무리 빨리 퇴근을 한다해도 시간 내 도착하는 게 불가능해 꼬박 일주일이나 강아지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한번씩 예주가 걸어주는 영상통화나 사진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찰랑이의 얼굴은 남편을 애타게 만들었고 결국 예정에 없던 연차를 3일이나 쓰게 했다.
"자기 발레 간 동안 찰랑이 봐줄 사람이 없잖아."
남편은 찰랑이의 간호를 위해 예주가 학원을 더 쉬거나 빠지게 할 순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예주는 조금 망설였지만 발목부상으로 학원을 쉬는 동안 자신이 얼마나 시들시들한 기분이었는지를 떠올려보고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휴가를 내긴 하지만 재택근무처럼 집에서 틈틈이 업무를 보면 크게 상관없다는 남편의 말에도 설득이 됐다.
찰랑이가 퇴원하는 날 아침, 그는 강아지의 간호를 위한 물품들을 이것 저것 사야한다며 차가 필요하다고 했다. 예주는 차키를 내줬고, 남편은 그녀를 발레 학원 앞까지 태워다줬다.
"이따 데리러는 못 오는데 괜찮겠어?"
자신에게 맡겨진 중차대한 임무 앞에서 예주의 희생을 요구하는 게 미안해 보이던 남편은 한편으론 묘하게 들떠보이는 얼굴로 그녀를 두고 떠났다. 무엇이 그를 설레게 했을까?
오랜만에 보게 되는 사랑하는 강아지? 성심성의껏 돌봐주어야할 존재가 생긴 것? 그냥 단순히 회사를 가지 않아도 되는 것?
예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생기를 띄는 남편의 미소와 곧 다시 집안을 가득 채우게 될 따뜻하고 말랑한 존재를 떠올리며 안심했다. 그래, 그건 안심이었다. 무언가 작은 조각이 빠진 것처럼 어색하고 완전하지 못했던 일상이 원래대로 돌아간다. 비록 작은 상처는 있을지언정.
그간 결석이 잦아 레벨을 한단계 낮춘 수업을 신청했더니 그녀가 빠진 몇달 사이에 기초반에서 몇명이 올라왔는지 이 날 수업에는 낯선 얼굴들이 몇몇 눈에 띄었다. 선생님은 기존 회원들에게 기초반에서 올라온 수강생들이 있어 진도를 조금 천천히 나갈테니 양해해 달라는 말로 수업을 시작했다.
플리에, 탄듀, 데가제, 론데잠 아떼르, 폰듀, 프라페, 그랑바트망.
동작의 난도는 조금 조정됐지만 바워크는 언제나와 같은 순서로 진행됐다. 이건 발레니까. 발레수업은 기초반이든 고급반이든, 취미반이든 전공반이든 상관 없이 누구나 같은 것을 한다.
포드브라, 시선 같은 디테일을 추가해 안무를 조금 더 복잡하게 짤 수는 있겠지만 그 누구도 그 순서를 바꾸거나 임의로 뺄 수는 없다. 바워크는 철저히 평등하다. 실비 길렘이 와도, 마리아넬라 누녜즈나 나탈리아 오시포가가 와도, 심지어는 죽은 마야 플리세츠카야가 온다해도 그럴 것이다. 누구나 태어나 배를 밀고, 기고, 그래야 걷고 뛸 수 있는 것처럼, 발레는 발레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바워크를 처음부터 끝까지 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단계인 센터워크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순서들에는 엄격한 규칙과 정답이 있다. 절대 한번에 맞출 수도 완성할 수도 없는. 그러니 발레를 하는 그 순간에는 발레 밖에는 신경쓸 수가 없다. 머리 속에 실낱같은 잡음 하나만 끼어들어도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그녀의 지적은 늘 한결같다.
'그건 발레가 아니에요.'
그러나 그날 예주는 자꾸만 한쪽을 힐끔 거렸다. 그리고 집중력이 흐트러질 때마다 예주는 '예주님, 턴아웃!' '예주님, 포인!' '예주님, 알롱제!' 같은 지적을 받아야 했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턴아웃을 하자면 엉덩이에 힘을 줘야 하고, 포인을 유지하자면 복근부터 발가락 끝까지 근육을 길게 늘려야 했다. 팔의 위치가 바뀔 때는 중간 중간 알롱제를 넣어야했는데 그 모든 것들이 음악이 시작될 때부터 끝날때까지 지속되려면 눈알만 돌려서 다른 곳을 잠시 힐끔 쳐다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날 예주의 시선 끝에는 그 수업에서 처음 보는 여자가 있었다. 발레라는 걸 한번 해볼까, 깔짝대는 어중이 떠중이는 이미 초급반 2개월차쯤 다 걸러진 후이기 때문에 3개월 이상 수강한 후에나 들어올 수 있는 중급반 이상이 되면 수강생들의 참석률이라던가, 참석자 같은 것들은 어느 정도 안정적이 된다. 그래서 말 한번 해본적 없더라도 얼굴이나 이름 정도는 어느 정도 익숙하기 마련인데, 그 여자는 아니었다.
뾰족하니 신경질적으로 마른 얼굴과 그만큼이나 날카로워 보이는 눈빛, 선생님이 웃으라고 지적을 해야 어색하게 올라가는 입꼬리, 그럼에도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는 표정.
중급반 수업을 오랜만에 듣는다해도 고급반과 중급반을 교차해서 수강하는 사람들도 꽤 되고, 다른이들은 오며가며 한두번쯤은 본 기억이나는데, 저 여자는 분명 모르는 여자다. 그러나 낯이 익었다. '본적은 있는데' 정도의 안면은 있었다. 그렇다 해도 크게 신경쓰지는 않아도 되는데 예주는 자기도 모르게 자꾸 그녀 쪽으로 시선이 갔다. 반면 그 여자는 왠지 모르게 예주의 시선을 애써 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앞, 옆, 위, 그리고 거울 속 자신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것 같았지만 힐끔거리는 그녀의 시선은 예주의 시선만큼이나 불안정했다.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긴한데, 텅빈 그 느낌.
"플릭, 플락!"
선생님의 구호에 맞춰 모두 발바닥을 바닥에 슥 쓸고 꾸페로 한바퀴를 돌았다. 마지막에 업으로 선 채 다리를 알라스콩으로 벌리라는 지시는 아무도 수행하지 못했다. 어째 다리를 파쎄로 들고 도는 피루엣 보다 다리의 이치가 훨씬 낮은 쿠페로 도는 플릭플락이 더 휘청이고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
"플릭-플락은 턴이에요, 턴. 돌아야죠. 그냥 서서 다리를 쿠페로 가져다 대는 것도 아니고, 스트뉴처럼 두발을 땅에 대고 도는 것도 아니에요. 완전히 다른 동작입니다. 한쪽발을 뒤로 짚고, 짚자마자 스트뉴로 도는 것처럼 땅, 밀어주면서 밀자마자 쿠페로 발목에 다리를 대고 그대로 반바퀴를 도는 거에요. 그리고 턴이 끝나면 바로 다리를 옆으로 열면서 알라스콩!"
선생님은 연속해서 서너번의 플릭-플락 시범을 보여줬지만 사람들은 눈도 떼지 않고 열심히 보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러니까, 다리를 들어서 파드슈발을 하는 것처럼 발 앞쪽만 바닥에 대고 긁는데, 파드슈발은 아니야. 폰듀할 때처럼 끈적하게 바닥을 발가락으로만 긁고 그 힘으로 수스를 서면서 스트뉴를 돌 때처럼 1/2바퀴를 돌지만 스트뉴가 아니니까 끝까지 두발로 돌면 안돼. 절반쯤 돌았을 때 짚고 있던 뒷다리를 들어서 쿠페로 발목에 붙여. 그런데 뒤로 붙인 다리가 앞으로 올 때쯤엔 쿠페 드방으로 끝나야해. 아, 물론 여기까지 절대 흔들리지 않아야 한바퀴를 다 돌고 나서 그대로 업을 선 채 한쪽다리를 옆으로 펼칠 수가 있지. 45도는 들어야 해.
선생님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이것인거 같은데 이게 아니고 저것처럼 보이지만 저게 아닌 플릭-플락'이라는 동작에 대해 자세힐 설명했다. 시범을 보면서는 갸웃거리던 사람들이 설명을 듣고 나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말이야?
그간 배웠던 이런 저런 기술들이 조금씩 녹아있는데 그 모든 것들이 아주 짧은 순간 콰과광! 하고 내리치곤 '어때요, 참 쉽죠?'하고 얄밉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기대에 따르지 못한 학생들을 향해 선생님은 몇번이고 '다시'를 외쳤다. 모두들 머리 속에 플릭, 하면서 발가락으로 바닥을 긁어내고, 플!하면서 긁어낸 발을 뒤로 꽁, 짚으며 끙차! 힘들게 수스를 서며 빠르게 쿠페를 만들고 락! 하고는 쿠페를 만들었던 다리를 옆으로 촥 펼쳤다. 실제로 입으로 플릭, 플! 락! 이라고 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스튜디오 여기저기서 각자의 방식대로 플릭-플락이 돌아갔다. 그러나 온전한 건 하나도 없었다. 누군가는 플릭에서부터 헷갈려했고, 누군가는 플에서 쿠페를 제대로 짚지 못했으며, 에이스로 여겨지던 수강생들조처 마지막 락!에서 턴아웃과 정렬이 제대로된 알라스콩을 빚어내지 못했다. 십여개의 플릭-플락들이 마구잡이로 돌아가는 동안 예주 역시 그 낯선 여자에 대해서는 잠시 잊고 자신의 동작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오랜 시간 발레를 취미로 가진 그녀에게 대체 발레의 매력이 뭐냐고 물을 때마다 이런 저런 대답들을 했지만, 사실 발레가 가진 가장 큰 미덕은 바로 이것이었다. 발레를 제외한 모든 것을 망각하게 만드는 것.
발레의 세상에서는 발가락부터 정수리 끝까지 무엇하나 허투루 존재할 수 없었다. 모두가 거기에 그런 형태로 존재하는 의미가 있어야 했다. 손가락이 그런 모양인 것도, 어딘가를 응시하는 시선과 고개의 각도까지도 그런식이어야 하는 이유가 없이는 거기에 있어서는 안됐다.
그러니까 어쩌면 발레는 신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어디에도 없는 삶의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자신의 온 삶을 던지는 인간들을 위해 '자, 여기에 모든 것이 의미로 이루어진 것이 있으니 즐겨보라'고 던져준.
아닌가? 그 반대인가? 모든 것이 의미를 갖지만 그 모든 것에 닿기 위해서는 고통이 수반되는 발레라는 고통을 선물인 척 슬그머니 안겨준 것인가? 아름답고 즐겁지만 완벽에는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하는 것을 주고 노력하면 될 것처럼, 될듯 말듯, 줄듯 말듯 농락하며 괴로워 하는 모습을 즐기고 있는 걸까?
그 모든 진실은 어디에 있는 걸까?
이 아름다운 고통에 갇히기를 자처하며, 그것도 스스로 돈과 시간을 기꺼이 던지며 찾아온 예주는 발레만 하면 개똥철학 속에 빠지는 자신이 대단하면서도 징그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드디어 찰나의 풀업이 완벽하다고 느낀 그 순간, 플릭, 플! 락!이 꼿꼿하게 돌아갔다. 스팟조차 완벽했다. 그러나 빠르게 고개를 돌리던 그때, 예주는 거울 속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만 그녀를 훔쳐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 여자도 예주를 몰래 힐끔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거울을 통해 예주의 완벽한 플릭-플락이 성공하는 모습을 본 사람은 그 여자 뿐이었다. 그 날카로운 눈빛의 여자.
아......!
기억이 났다. 하나와 스타벅스에서 만나 처음으로긴 이야기를 나눴던 날 그들 곁을 맴돌던 여자. 처음으로 상담전도라는 것을 하게 된 하나를 몰래 감시하고 있던, 그들의 이야기를 훔쳐듣고 있던 바로 그 여자였다.
뭐랬더라? 팀장?
그 후부터 예주의 발레는 다시 엉망진창이 됐다. 하나를 감시하기 위해 그들 곁을 맴돌던 여자가 그녀와 같은 방안에서 같은 음악에 맞춰 같은 동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비현실적이면서도 기분 나빴다. 심지어 여기엔 하나도 없다. 저 여자는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이란 말인가.
"예주님, 눈 좀 어떻게 해 봐요."
선생님의 낮은 한 마디가 예주를 거울 속에서 끄집어 냈다.
"여러분은 지금 시선을 하나도 하고 있지 않아요. 대체 어디를 보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순서를 모른다고 계속 앞사람 뒷사람 쳐다보고 그러면 눈알만 막 돌아가잖아요. 그러면 전체적으로 동작이 너무 지저분해 보이고 정신 없어 보인다고요."
순서를 훔쳐보려던 의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지간에 결과적으로는 잘못된 시선은 선생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예주와는 달랐겠지만 시선을 하고 있지 않던, 혹은 선생님 말대로 올바르지 않은 시선 처리를 하고 있던 다른 수강생들이 덩달아 고개를 푹 숙였다.
"시선은 여러분의 팔을 따라가야 해요. 팔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움직이며 시선을 할 것! 무대쪽을 향해 얼굴을 보일 것! 이게 그렇게 어려워요?"
선생님은 답답하다는 듯 낭창한 포드브라와 함께 부드럽게 고개를 돌려가며 우아한 시선처리 시범을 보였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수강생들이 하나 둘 고개를 들고 그녀의 아름다운 시범을 바라봤다. 아마도 딱 둘만 빼고는 그랬을 것이다.
"저, 저기! 저기요!"
예주는 망설이다가 결국 소리를 내어 그 여자를 불렀다. 그녀를 잡기 위해 예주는 신발 뒤축을 구겨신고 달려나와야 했다.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수업이 끝나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운동복 위에 바로 야상만 둘어입은 채 서둘러 학원을 나서던 그 여자는 끝까지 예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 했다.
"아니, 잠깐만요."
도망치듯 종종걸음치던 여자는 예주에게 팔뚝을 잡히고 나서야 멈춰섰다. 푹 눌러썬 캡모자 속 얼굴에는 그늘이 잔뜩 내려 무슨 표정인지 보이지 않았다. 거칠게 팔을 잡히고도 무슨일이냐, 왜 이러시냐는 대답조차 없었다.
"여기 왜 왔어요?"
예주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녀가 하나를 이곳으로 인도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하나 하나뿐이었다. 예주가 발행한 초대장은 하나만을 위한 것이었지 그녀가 속해 있는 세상 전부는 아니었다.
"뭐가요."
여자는 여전히 예주쪽을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감정 없이 대답했다. 팀장이라길래 이런 상황에 닥쳐도 조금은 더 능수능란할 줄 알았는데, 그녀의 뱀 같은 혓바닥에서 어떤 변명이나 변호가 튀어나와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여자는 어수룩하고 미숙했다.
"여기 발레하러 온 거 아니잖아요."
예주가 말했다. 생각보다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라 스스로도 놀라웠다.
"발레하러 온 건데요?"
여자 역시 진정이 좀 됐는지 고개를 들어 예주를 똑바로 쳐다봤다. 번뜩이는 그녀의 눈빛을 보니 예주는 자신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 당신 알아요. 본적 있어요. 하나씨랑 만날 때 우리 지켜보고 있었죠?"
"아니요."
"그때, 스벅에서 우리 봤잖아요."
"잘못보셨어요."
"상담 전도인지 뭔지 하는 그거 할때, 팀장님이 하나씨 감시하고 있었잖아요. 잘하나 못하나 보려고!"
예주는 자기도 모르게 취조하는 사람처럼 무섭게 여자를 몰아붙였고, 팀장이라는 여자는 그녀의 기에 눌린 건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니, 그런 건 다 됐고요, 이제 여기 오지 마세요. 하나씨도 그만 감시하시고요. 팀장님이 어디서 뭘 하든 상관 없는데, 여기서 전도한다고 사람 심어놓고 감시하는 짓 너무 소름끼쳐요."
"......"
예주를 똑바로 바라보던 여자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어떻게 알았냐고 하는 것 같아 예주는 조금 의기 양양해졌다. 깔끔한 플릭-플락처럼 절도있게, 하나 하나 해치우자. 나의 세계는 내가 지키자, 유치하지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플릭! 하고 플! 그리고 락! 딱딱딱 맞게.
"......저 팀장 아니에요."
여자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고백했다. 그러나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못알아들었다. 기가 막히다는 듯 헤- 벌린 입을 다물지도 않고 웅얼거렸기 때문이다. 풍선에 바람 빠지는 소리처럼 뭔가 힘없이 푸시시 새는 소리였다.
"그럼 왜 자꾸 우리 감시해요?"
그렇게 티나는 일을 자꾸만 아니라고 우기는 여자의 뻔뻔한 태도에 예주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아는 척을 하는 게 하나에게 위험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계속 모른 척 하기엔 예주의 세상을 향해 촉수처럼 뻗어오는 그들의 그림자가 거슬렸다.
"저 감시 안했어요."
"그럼 왜......"
"팀장님이 시켰어요!"
여자는 너무나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를 꽥 질렀다.
"무슨 소리에요, 팀장은......"
"팀장님이 시켰어요. 팀장님이 시켰다고요! 팀장님이......상담전도 하는 법을 배우라고, 꼼꼼히 보고 복사기처럼 그대로 따라하면 된다고......그리고 이제 혼자서도 활동해 보라고, 여긴 이제 내가 맡아서 해야한다고, 팀장님이 그랬다고요!"
씩씩거리는 여자를 앞에 두고 이번에는 예주의 입이 벌어졌다. 칼날같이 날카롭게 느껴졌던 여자의 눈빛이 이제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해 보였다.
"하나 팀장님이 이 학원에서 세명 이상만 전도하면 전도 마일리지를 두배로 적용해 주신다고 했어요. 하지만 전 아직 아무것도 못했고요, 그뿐이에요."
"아니 그러면......"
"근데 안 할 거에요. 이제 학원도 안나올 거에요. 저 무서워요. 여기 있는 사람들하고 얘기하는 거 무서워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여기 있으면 그냥 발레만 하게 될 것 같아서 싫어요. 하날님 생각으로 매일을 가득 채워야 하는데 쓸데없이 발레 생각으로 하루를 채우게 되는 것 같아서 죄스럽고 불편해요. 팀장님께 정식으로 말씀드리고 도로 집중 전도부 옮겨달라고 할 거에요."
여자는 자신의 팔뚝을 붙들고 있는 예주의 손을 냉정하게 뿌리치고는 후다닥 달려나갔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예주가 다시 붙잡을까 무서운듯 했다. 하지만 예주는 다시 여자를 붙잡을 의지도, 마음도 없었다. 처음에는 이게 다 무슨 소린지 한번에 파악하지 못해 버벅거렸다면, 다음에는 그 황당함에 허, 참, 하는 허탈한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감시를 당하고 있던 건 하나와 예주가 아니라 바로 그 여자였다. 그녀는 하나의 전도 팀에 속해있던 일종의 견습생 같은 것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믿어도 된다면.
하나는 어디까지 의도했던 걸까? 어디까지 계획하고, 어디까지 상황을 짜두었던 걸까? 예주는 우연히 그녀의 레이더에 걸린 것일까, 아니면 철저하게 계산된 만남이었을까? 하나는 정말 그 사고로 아이를 잃은 것이 맞을까? 그 집에 살았다던 고백은 진짜였을까? 그녀의 이야기 속에 진실이 있긴 했을까?
깔끔하게 정리된듯했던 상황은 여자의 고백으로 순식간에 다시 흙탕물처럼 혼탁하게 흐려졌다. 주변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순간 주머니 속 핸드폰에서 짧은 진동이 느껴졌다. 천천히 전화를 꺼내어 보니 남편의 문자였다.
우리 이제 집에 왔어. 빨리 와. 찰랑이랑 환영해 줄게.
문자와 동시에 도착한 사진 속에는 거창한 깁스를 하고 누워있는 강아지와, 그곁에 함께 누운 남편이 그녀를 향해 해맑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