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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엘 Jan 07. 2020

#04 호주에서 바리스타

네이슨과 플랫화이트

골드코스트 중심에 위치한 ‘서퍼스 파라다이스’는 인도네시아 ‘멘타와이’, 남아프리카 ‘제프리 베이’와 함께 세계 3대 서핑 포인트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로컬 서퍼들은 다른 해변을 찾는다.


북쪽의 ‘스핏’부터 시작해 ‘메인 비치’, ‘서퍼스 파라다이스’, ‘브로드비치’, ‘머메이드 비치’, ‘마이애미 비치’, ‘벌리 헤드’, ‘팜 비치’, 커럼빈 비치‘, ’쿨랑가타‘까지 해변은 저마다 다른 풍경과 해안선, 파도를 가지고 있다. 나름 유명하다는 해변만 추려도 이 정도다. ‘포카리 스웨트’ 촬영지로 알려지며 한국인에게 필수 코스가 된 ‘바이런베이 비치’까지 더하면, 골드코스트를 만난 서퍼는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



'포카리 스웨트' 촬영지 '바이런 베이'



골드코스트 모든 해변에서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중간중간 운하 또는 강과 만나는 곳에 잔잔한 파도가 있어 수영, 패들보드, 또는 카약을 즐긴다. 도시는 가장 큰 서프 라이프세이빙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해변을 따라 공공 화장실, 샤워 부스, 전기그릴 바비큐 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노란색으로 치장한 해상구조요원 초소는 일정한 간격으로 해변을 따라 세워져 있는데 마치 봉화대를 연상시킨다. 365일 24시간 내내 사람들의 해변 안전을 위해 여러 장비들을 동원해 감시 및 구조 활동을 펼치고 있다. 게다가 주정부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폭풍과 개발로 유실되는 모래를 끊임없이 보충하고 있다.


호주의 자연사랑은 커피사랑과 맞먹는다. 1970년대에 호주를 대표하는 청바지 회사는 강제로 파산을 당했다. 1000명이 넘는 직원이 실업자가 될 수 있음에도 염색 과정에서 나오는 화학물질이 환경을 오염시킨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주경기장 건설 당시 건설이 시작됐음에도 계획을 변경해 경기장을 다른 곳에 건설한 일이 있었다. 금개구리 서식지가 발견됐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골드코스트에서는 다양한 새들을 비롯해 여러 종의 동물들이 도심의 인간이 차지한 영역을 자유롭게 활보한다. 도심 안에 공원이 아니라 공원 안에 도심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인적이 드문 주택가에서 캥거루나 왈라비를 쉽게 볼 수 있으며 동물원보다 공원에서 더 많은 동물을 보기도 한다.


투철하게 자연을 지키며 살아가는 호주 사람에게 삶에 위안을 주는 것이 있다면 커피일 것이다. 그들의 커피 사랑은 애정을 넘어 집착, 중독처럼 보인다. 아내와 하루 정도 떨어져 지낼 수 있지만 커피 없는 하루에 패닉 할 것이다. 사람들은 호주를 커피의 나라이며 멜버른을 커피의 천국이라 부른다. 이런 호주는 세계에서 가장 큰 커피회사인 스타벅스가 망한 유일한 나라이다. 호주 커피 문화는 스타벅스가 감히 길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스타벅스는 2000년 한국 다음으로 호주 시장에 야심 차게 진출했다. 공격적인 확장을 시도한 스타벅스는 짧은 시일 내에 87개의 매장을 오픈했다. 하지만 8년 동안 1억 500만 달러(약 1,200억 원)의 영업 손실을 내고 63개 매장을 닫았다. 그리고 남은 매장과 브랜드 사용권을 편의점 회사에 팔고 쓸쓸히 퇴장했다.


스타벅스가 호주에서 맥을 못 추린 이유는 호주 사람의 뚜렷한 커피 문화 때문이다. 호주 국민 커피로 불리는 플랫화이트와 호주식 마키아또는 스타벅스가 주력으로 하는 달디 단 마끼아또나 프라푸치노와 많이 다르다. 호주 사람이 원하는 커피를 스타벅스가 못 만드는 건 아니다. 단지 세계 모든 매장을 직영점으로 운영하는 스타벅스가 호주 사람이 원하는 컨시스턴트한 커피, 손님과 바리스타의 관계를 가구나 벽의 색깔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호주 카페를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또 다른 커피기업 글로리아 진스는 호주 사람이 즐기는 메뉴로 현지화하고 호주에서 성공하기도 했다. 호주 사람이 원하는 커피를 팔지 않으면 호주 카페라고 할 수 없다. 그런 곳은 호주에서 스타벅스 같은 곳이 되고 만다.


나는 호주에서 3년 넘게 커피를 만들고 있다. 그 시간 동안 가장 오래된 손님이 네이슨이다. 그는 스몰 사이즈 플랫화이트를 마시는데 커피가 맛있으면 같은 커피를 한 잔 더 마신다. 내 카페에서 첫 잔은 계산을 허락하지만 두 번째 잔은 언제나 서비스로 준다. 오랜 시간 내가 만든 커피를 즐겨온 것만으로도 그는 각별한 사람이니깐.


플랫화이트는 쉬워 보이지만 어려운 커피다. 호주 카페에서 바리스타가 되고 싶다면, 플랫화이트를 잘 만드는 것이 중요한 기준이 된다. 플랫화이트가 가장 많이 팔리는 커피이기 때문이다. 호주 카페의 블랙커피 비율은 10%도 되지 않는다. 나머지 90%는 밀크가 섞인 화이트 커피인데, 플랫화이트가 50%, 카푸치노 30%, 라떼 20% 정도다. 이렇듯 플랫화이트는 민주주의에 의해 호주 국민 커피가 됐다.


20대 초반의 네이슨은 호리호리한 체격의 전형적인 호주 백인이다. 처음 만났을 때 부동산 투자회사에서 막 일을 시작했는데 3년이 지난 지금도 꾸준히 그 일을 하고 있다. 아버지는 골드코스트 사람이면 대부분 알만한 클럽―호주의 클럽은 오락, 외식, 문화를 즐기는 큰 규모의 상업 시설이다―의 사장이다. 덕분에 부유한 집안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고 자란 바른 호주 청년이다. 하지만 그는 중학생일 때부터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졸업한 후에는 돈이 적게 드는 쉐어하우스에 살았다. 가끔 어머니의 벤츠를 몰고 나올 때도 있지만 20년도 더 돼 보이는 구형 도요타 SUV를 몰고 다닌다.


네이슨 아버지가 운영하는 클럽과 호텔은 규모가 커서 많은 직원을 고용하고 있다. 그가 원하면 일할 자리는 충분히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인생이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의 인생은 그에게 참고 사항일 뿐이다. 대부분 호주 사람은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어른이 됐다, 싶으면 부모님 집을 떠나 혼자 살아간다. 이런 풍토 때문인지 호주는 한국과 다르게 상속세가 없는 나라이다.


네이슨은 전형적인 호주 남자와 살짝 거리가 있다. 전형적인 호주 남자는 커피, 타투, 몸 근육에 큰 애착을 가지고 있다. 그는 커피를 좋아하지만, 타투를 하지 않으며 헬스장을 찾는 것이 아니라 종종 서핑을 하는 정도다. 책벌레에 일을 많이 하는데에도 불평하지 않는다. 덕분에 우리는 건설적인 이야기를 나눈다. 특히 호주 커피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카페의 메뉴판이나 포스터를 출력하기 전에 틀린 부분을 찾아주는 것도 그의 몫이다. 여러모로 그가 마시는 두 번째 커피는 내가 계산하는 것이 맞다.


가장 오래된 손님이자 친구인 네이슨과 종종 휴일을 이용해 새로 오픈한 카페를 가거나 맛있다는 커피를 찾아다닌다. 우리 만남에 커피가 생략된 적은 없다. 그는 호주 비즈니스, 부동산이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한국을 비롯해 다른 나라는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 한다. 최근 그는 중국의 정치, 경제나 문화에 관심이 많다. 만나면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날이 좋다 싶으면 서핑을 해야겠다며 사라진다.


단연코 골드코스트는 서핑의 도시다. 황금빛 해변은 골드코스트를 상징함과 동시에 수많은 사람을 이곳으로 끌어들인다.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는데 서핑을 즐기던지 해변에서 서핑하는 사람을 바라보던지 한다. 호주 대부분 도시는 바다에 인접해 있어 국가는 어린아이에게 의무로 수영을 가르친다. 아이들은 태어나면 바다와 서퍼를 보며 성장한다. 말과 수영을 동시에 배운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네이슨은 아무리 예쁘더라도 해변의 여가를 즐기지 않는 여자와는 사귈 수 없다고 했다. 호주의 서퍼에게 서핑은 취미가 아니라 생활이다.



로컬 서퍼들이 서핑을 즐기는 '벌리 헤드 비치'



네이슨은 골드코스트 남쪽 커럼빈 비치 또는 쿨랑가타 비치에서 서핑을 즐긴다. 도시 중심에서 남쪽으로 30분 정도 차로 가야 한다. 얼핏 보면 다 같은 바다 같지만 그렇지 않다. 가장 유명한 ‘서퍼스 파라다이스’는 아이러니하게 서핑하기엔 파도가 유독 거칠다. 그 거친 파도에서 생애 첫 서핑을 경험했다간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다.


남쪽으로 가면 갈수록 파도는 온순해진다. 벌리헤드 비치부터 남쪽으로 팜 비치, 컬럼빈 비치, 쿨랑가타 비치로 이어지는 해변이 진정한 서퍼의 천국이다. 해변을 따라 오밀조밀 이어지는 건물들마저 서퍼를 위해 준비한 것처럼 보인다. 이곳에 가면 서핑이 생활인 서퍼를 만날 수 있다.


해 뜰 무렵 파도는 온순해 서핑을 하기에 좋다. 그 파도에 서핑을 하고 빈티지한 카페에 앉아 포키-볼 (Pokie Bowl)이나 아사이-볼 (Acai Bowl)로 배를 채우고 따뜻한 플랫화이트를 마시면서 달궈지는 햇살에 몸을 말린다고 상상해보자. 네이슨도 그러하지만, 호주 사람들은 이것이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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