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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엘 Dec 26. 2019

#02 호주에서 바리스타

세르지오와 피콜로

세르지오는 지팡이 없이 자유롭게 걷지 못할 정도로 나이 든 할아버지다. 매일 아침 7시 전에 신문을 사러 나가는데, 같은 아파트 건물에 살다보니 종종 마주친다. 기백이 넘치는 다정다감한 할아버지라도 카페를 오픈하러 가는 길에 마주치면 곤혹스럽다. 잡담을 좋아하기 때문에.


세르지오와 마주치지 않으면 카페는 언제나 7시 전에 문을 연다. 그를 마주치는 날에는 7시를 넘겨 문을 열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영업의 한 부분이다. 그는 신문을 사면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는 손님이니깐. 늘 안쪽 테이블에 앉아 정확히 30분 동안 사온 신문을 읽으며 커피를 마신다. 이 카페가 오픈하기 전에 어디에서 이 의식을 치러냈을까 궁금하게 한다.


커피를 대하는 호주 사람은 저마다 규칙을 가지고 있다. 이 규칙을 매우 컨시스턴트 (Consistent) 하게 지켜나간다. 한국 사람은 바쁘면 커피를 건너뛰지만 호주 사람에게 커피는 건너뛰는 대상이 아니다. 한국 사람은 비가 오나 눈이 오면 다른 걸 마실 수 있지만 호주 사람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커피를 마신다. 아주 따뜻한 커피를.


규칙이란 것이 존재하는 호주 카페 비즈니스는 의외로 단순하다. 그들의 구미를 당기는 커피를 만들다 보면 천천히 단골손님이 생긴다. 걸어서 카페로 올만한 구역에서 충분하다 싶을 단골손님을 확보하고 나면 매출은 꾸준히 유지된다. 한국 같으면 손님 뺨만 안 때리면 된다지만 호주에선 뺨을 때려도 커피만은 컨시스턴트 해야 한다.


스스로 커피 중독이라고 하는 호주 사람들이 찾는 카페는 약국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아침마다 카페에 줄을 서 자신의 커피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 특히 그렇다. 사람들은 자신이 마시는 커피를 위해 어김없이 그 시간에 그 카페에 간다. 이런 특징이 도드라지다 보니 호주 카페 비즈니스는 단순한 편이다. 손님이 싫어하는 것은 하지 않고 손님이 원하는 것은 해주면 된다. 컨시스턴트 하게. 한국과 달리 옆에 새로운 카페가 생겼다고 손님이 옮겨가지도 않고 경기가 안 좋다고 마시던 커피를 줄이지도 않는다.


세르지오는 피콜로를 마신다. 피콜로 라떼라고도 하는 피콜로는 호주를 대표하는 커피 중 하나다. 에스프레소 잔 크기 유리컵에 에스프레소 샷을 넣고 소량의 스팀 밀크를 섞는다. 카페나 바리스타 스타일에 따라 유리컵이 아닌 작은 머그컵에 담기도 한다. 완성된 피콜로는 라떼 미니어처 마냥 귀엽다. 하지만 라떼에 비해 적은 양의 밀크를 넣어 에스프레소 맛은 더 강하다. 덕분에 강한 커피 맛을 좋아하는 호주에서 인기 있다. 강한 커피 맛이 좋다면 에스프레소를 추가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피콜로 나름대로 존재의 이유는 분명하다. 우유 섭취량을 줄이고 싶거나 오후에 커피로 잠을 쫓고 싶은 순간에 약처럼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호주 사람의 우유사랑은 대단하다. 하지만 우유가 성인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은 호주 사람도 잘 알고 있다. 계란 등과 더불어 완전식품으로 알려진 우유는 3살 이후가 되면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특히 우유에 들어 있는 지방과 락토스라고 부르는 유당은 성인의 몸에 해롭다고 많은 연구 자료는 말하고 있다. 커피의 발견은 인간의 삶에 커다란 기쁨을 가져왔고 커피와 우유의 만남은 천생연분이라고 한다. 건강 때문에 커피와 우유 사이에서 고민하는 호주 사람에게 피콜로는 커피에 약간이라도 우유를 넣어야 하는 고육지책이자 우유를 향한 오매불망 같은 것이다.


바리스타 입장에서 피콜로는 결코 호락호락한 커피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맛있는 에스프레소가 있어야 피콜로는 마실만한 커피가 된다. 거기에 밀크 거품은 라떼와 비슷한 비율로 양을 조절해야 하며 조그만 컵에 라떼 아트까지 곁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세로지오가 마시는 피콜로는 엑스트라 핫 밀크에 설탕 한 스푼이 들어간다. 대부분 주문할 때 필요한 만큼 설탕을 부탁하지만 그는 직접 설탕 한 스푼을 넣고 마신다. 호주 사람은 저마다 커피를 대하는 규칙이 있다. 그는 피콜로를 마시기 시작한 후로 설탕을 직접 넣는 규칙을 지켜왔을 것이다. 그가 카페에 세 번째 방문했을 때, 어떤 커피를 원하는지 속삭이듯이 말했다. 머그가 아닌 유리컵에 담긴 설탕을 아직 넣지 않은 엑스트라 핫 피콜로 커피를 원한다고. 그는 30분 이상 신문을 읽으면서 커피를 마시기 때문에 마지막 한 모금까지 가능한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싶어 한다.


호주 카페에서 커피를 받아 들고 다른 일에 몰두하다 한참 지나서야 커피 잔을 들어 천천히 마시는 사람을 볼 수 있다. 마치 세르지오처럼. 이 사람들은 대부분 엑스트라 핫 커피를 부탁한다. 단골손님이라면 기억해두었다 먼저 묻는 센스를 발휘하는 것도 바리스타의 일이다. 오늘도 엑스트라 핫 커피 맞죠, 하고. 호주 사람은 이런 것에 큰 만족을 느낀다. 그들에게 커피는 중요하니까.



'데미타세'라고도 불리는 에스프레소 잔과 비슷한 크기의 컵에 담기는 '피콜로' 커피



세르지오 이야기를 더 해보자. 그는 무려 40년 전에 이탈리아에서 호주로 건너온 이민자이다. 당시 이탈리아 이민자들은 에스프레소 머신과 젤라토 아이스크림을 호주에 전파했다. 호주는 대표적인 이민자의 나라다. 호주라는 나라를 세운 영국에서 건너온 개척자를 제외한 이민자는 전체 인구의 1/4이나 된다. 호주에 사는 사람 넷 중 하나는 호주로 건너온 사람이다. 설령 호주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를 낳아준 부모는 호주로 건너와 그를 낳았다.


이탈리아에서 온 세르지오는 카페에 들어올 땐 “본 조르노”라고 인사하고 “차오”라고 손을 흔들면서 나가는데 인사할 때를 제외하고 특별히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신문을 구석구석 읽으면서 피콜로 한 잔 마시는 중요한 일과 때문이리라. 하지만 길에서 마주치면 걸음을 멈추고 잡담을 시작한다. 매번 똑같은 호주 정착기이다.


세르지오는 혈기 왕성한 시절에 호주로 건너와 노동현장을 누비면서 가슴을 다쳤다. 호주에서 이탈리안 여자를 만나 결혼했지만 사별하고 현재의 베트남 아내를 만났다. 현재 아내와 결혼해서 정말 행복하다며 이탈리안 여자는 말이 많다고 ‘바바바바...’ 하고 총 쏘는 흉내를 낸다. 그 모습에서 그가 느꼈던 진절머리를 느낄 수 있어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가지고 온 8 그룹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하루에 600잔씩 커피를 만들어 팔았단다. 다른 건 몰라도 하루에 커피 600잔을 만든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하고 흥미를 유발한다. 나는 3 그룹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하루에 300잔까지 커피를 만들어 봤었고 지금 오픈한 카페에서 2 그룹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하루에 200잔 정도의 커피를 만들고 있다. 8 그룹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하루에 600잔씩 커피를 만들어 팔았다니. 더 이상 커피를 만들 수도 없음에도 의기양양한 그는 참전용사를 연상시킨다.


세르지오가 특별한 손님인 이유는 따로 있다. 마시는 커피가 독특하거나 단골손님이라서가 아니라 남기고 가는 팁 때문이다. 처음에 그는 피콜로 한잔 가격인 3불 50센트를 동전으로 들고 와 계산했다. 그러다 원하는 대로 커피를 만들어 주기 시작한 이후로 일어설 때마다 50센트를 테이블에 놓고 갔다. 자신의 속삭임을 흘리지 않고 들어준 것에 대한 보답일 것이다.


호주에는 팁 문화가 없다. 그저 가게마다 계산대 앞에 팁 박스가 있어 계산 후에 잔돈을 넣거나 식사 후에 테이블에 팁을 남기고 가는 사람은 종종 있다. 미국이나 캐나다처럼 의무적으로 팁까지 계산해 가지 않는다. 카페에서 주문을 받다 보면 계좌에 잔액을 확인하더니 통장에 5불 밖에 없는데도 커피 한잔을 주문하는 호주 사람을 종종 볼 수 있다. 커피를 두고 '까르페디엠'을 실천하는 것이다. 호주는 개인 소득이 높고 복지가 좋은 국가다. 덕분에 호주 국민은 없는 돈에도 여유가 넘친다. 그러니 계산대에서 얼마 안 되는 거스름돈을  팁 박스에 넣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10센트 정도야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500원 가까이 되는 50센트를 매번 팁 박스로 넣기는 쉽지 않다. 겨우 4불도 안 되는 커피 한잔 마시는데 말이다.


세르지오는 처음 팁을 남기고 간 이후로 단 한 번도 3불 50센트를 낸 적이 없다. 언제나 4불 이상의 돈을 내게 쥐어주고 자신의 테이블로 간다. 하지만 암묵적으로 건네는 50센트를 팁으로 빼지 않고 커피와 함께 거스름돈으로 가지고 간다. 그는 천천히 커피를 비워내고 50센트를 테이블 위에 놓고 간다. 거스름돈의 액수가 큰 날도 착오 없이 50센트를 테이블에 남기고 “차오”라고 손을 흔들면서 나가는데 이마저도 매우 컨시스턴트 하다.


나는 댓가를 받고 커피 한 잔을 만든다. 세르지오는 댓가 외에 50센트를 더 주고 싶은 것이다. 50센트는 작은 돈이지만 커피 한 잔이 얼마나 소중한지 설명하기에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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