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냐와 스키니 플랫화이트
오세아니아 대부분을 차지하는 호주 땅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골드코스트. 청명한 하늘과 따뜻한 날씨는 이곳을 파라다이스로 만들었다. 지구 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 산다는 자부심을 가진 이 도시의 사람들은 바다 가운데에서 해가 떠오르면 일제히 하루를 시작한다.
카페를 오픈하는 날에는 6시 즈음 일어나는데, 때마침 떠오르는 해를 20층 높이 아파트 거실에서 보고 있자면 감탄이 절로 난다. 근사한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7시가 되기 직전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 카페 문을 연다. 호주 카페의 첫 번째 특징은 일찍 문을 열고 일찍 닫는다는 것이다. 대부분 7시 전에 문을 여는데, 공장이나 주택가에는 6시 전에 문을 여는 카페도 있다. 그리고 대부분 오후 3시쯤이면 문을 닫는다. 호주 사람 대부분이 카페에서 만드는 커피가 없으면 하루를 시작하지 못한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일상이다.
카페 문을 열면 보사노바 풍 재즈를 틀어 카페 안으로 파고드는 아침 햇살과 어울리는 분위기를 만든다. 그리고 커피 머신을 작동시켜 커피 뽑을 준비를 하고 바깥으로 테이블과 의자를 빼는데, 그 와중에 커피와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손님들은 카페로 들어온다. 이 카페를 시작으로 출근길을 나서거나 근처 사무실로 출근하는 길에 들른 것이다. 소냐는 8시가 되면 나타난다.
소냐는 카페 바로 옆 은행에서 일하는 백발을 한 나이가 지긋한 호주 사람이다. 무뚝뚝한 표정과 딸각거리는 구두 소리로 카페 앞을 수도 없이 지나다니는데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환하게 인사한다. 한 손을 들어 손가락까지 흔들면서. 호주 사람 대부분은 언제 어디서나 환하게 먼저 인사를 한다. 화장실에서 마주쳐도 예외는 없다. 호주를 방문한 사람들은 호주 사람의 이런 인사성에 감탄한다. 하지만 여기 살다 보면 환한 모습 안에 숨어 있는 공허함과 우울함을 발견할 때가 많다. 그래서인지 애써 밝게 웃는 호주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쓰이게 된다.
소냐는 카페가 한창 오픈 준비를 할 때부터 궁금한 게 많았다. 수도 없이 지나 다니면서 보이는데 오죽 궁금했으랴. 그녀는 카페 오픈을 무척 반가워했다. 한국식 방앗간이 오픈해도 그만큼 반가워했을 것이다. 이렇듯 가능한 모든 것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 또한 호주 사람들의 특징이다.
카페가 오픈하고 소냐는 커피를 사러 왔다. 그녀는 스키니 플랫화이트를 마신다. 뜨거운 커피를 부탁했다. 이렇게 부탁하는 호주 사람에게 "우유는 60도에서 70도 사이 온도일 때 가장 맛있습니다"와 같은 말을 늘어놓으면 서로가 피곤해진다. 나이가 지긋한 호주 사람 대부분은 뜨거운 커피를 사랑한다. 피부색을 떠나서 뜨거운 커피에 집착한다면 호주 사람이라고 여겨도 된다. 하지만 뜨거운 커피라고 해서 기꺼이 혀를 데우겠다는 것이 아니다. 커피 마시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다 보니 따뜻한 커피를 천천히 오래 마시고 싶은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카페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조금이라도 더 즐기고 싶어 허겁지겁 카페로 가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우유의 성분을 따지다 보면 꽤 많은 종류의 우유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방을 2% 미만으로 줄인 밀크를 라이트 밀크 (Lite Milk)라고 하고 지방을 제거한 밀크를 스킴 밀크 (Skim Milk)라고 한다. 호주 카페에서 지방을 기피하는 사람을 위해 라이트 밀크를 사용하는데 스킴 밀크 또는 스키니 밀크라고 부른다. 지방 제로인 스킴 밀크 맛이 형편없다 보니 생긴 일이다. 지방 제로 밀크를 마시고 있다는 일종의 플라시보이다.
플랫화이트는 ‘평평한’이라는 의미의 ‘플랫’에 밀크를 의미하는 ‘화이트’가 더해져 이름 지어졌다. 컵에 에스프레소를 먼저 받아두고 마이크로 폼 (Micro Form) 스팀 밀크를 섞는데, 라떼나 카푸치노와 쉽게 구분하자면 밀크 거품의 두께가 다르다. 라떼를 만들 때 두께 1cm 정도 되는 거품이 올라가는데 플랫화이트 거품은 5mm 미만으로 매우 얇다. 하지만 거품의 두께는 겉으로 드러나는 차이일 뿐이고 밀크 질감의 차이가 플랫화이트를 만든다. 밀크를 데우는 과정에서 ‘칙칙’ 거리는 소리로 충분한 거품을 만드는 라떼와 다르게 공기 주입을 최소화해 미세한 입자의 폼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에스프레소와 섞였을 때 실크 (Silk) 나 벨벳 (Velvet)의 질감에 비유될 만큼 부드러운 질감을 맛볼 수 있다.
라떼만을 마시다 보면 우유를 섞은 커피의 질감은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제대로 만든 플랫화이트의 실키한 질감을 맛보면 라떼와 이별을 고하게 한다. 호주에서 처음 플랫화이트를 접하는 대부분 사람들은 그저 얇은 거품이 올라간 커피라 거품을 싫어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플랫화이트는 같은 우유로 다른 맛을 내는 화이트 커피다.
한국에서 플랫화이트를 파는 카페를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독특한 이름이 필요한 커피인지 실키한 질감을 맛볼 수 있는 진짜 플랫화이트인지 궁금했었다. 그러다가 아이스 플랫화이트를 파는 카페를 보고 웃음이 나왔다. 아이스 플랫화이트를 호주 사람에게 추천하면 눈을 크게 뜨고 말할 것이다. 뭐시라고?
소냐가 원하는 커피를 파악하고 빠르고 정성스레 만들어 주었다. 이제 다음 커피를 마시러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다음 날을 기다릴 것도 없이 카페 앞에서 마주쳤는데 훌륭한 커피였다고 했다.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맛없는 것을 맛없다고 절대 말하지 않는 게 호주 사람이다. 한국 사람은 일본 사람을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라 생각하지만 호주 사람도 일본 사람 못지않다. 그러니 그녀가 다음 커피를 사러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커피계의 애플로 불리며 유명세를 타고 있는 블루보틀 사장은 성공 비결에 “누구나 맛있는 커피를 좋아한다.” 고 답했다. 호주 사람도 맛있는 커피를 좋아한다. 하지만 호주 사람은 맛있는 커피보다 자신이 원하는 커피를 마시러 카페에 간다. 필요한 만큼 에스프레소 양을 조절하고 필요한 우유를 선택한 다음 원하는 사이즈와 온도를 맞추고 시럽이나 설탕을 넣는다. 호주 카페에서 바리스타의 주관은 손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파악한 후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날 소냐는 커피를 주문하러 왔다. 훌륭한 커피라고 말해버렸으니 와야지,라고 생각한다면 지나치게 패러노이드 한 것인가. 멀쩡한 사람도 호주에서 커피 만드는 일에 몰두하다 보면 약간은 패러노이드 하게 된다. 손님의 취향을 알아내고 정확히 기억해야 하는데, 그럼에도 손님이 더 이상 오지 않으면 자책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호주 카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골손님이다. 단골손님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비결은 컨시스턴시 (Consistency) 바로 일관성이다. 바리스타한테 필요한 능력은 손님이 원하는 커피를 알아내고 기억하는 것. 그리고 늘 똑같이 만들어 주는 것이다. 호주 사람에게 커피는 대단히 중요한 존재다. 매일 커피를 마시는데 매번 다른 맛의 커피를 즐기지 않는다. 호주 사람이 매일 가던 카페를 바꾸는 이유는 두 가지 정도다. 이사를 해서 더 이상 갈 수 없거나 커피가 컨시스턴트 하지 않을 때다. 이사 가는 손님은 대부분 바리스타에게 인사를 하고 간다. 그동안 훌륭한 커피를 마실 수 있어서 고마웠다고 말해준다. 바리스타에게 슬프지만 감동스러운 순간이다. 호주 카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묻는다면 단호히 컨시스턴시라고 답하고 싶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종종 커피와 음식을 주문하던 소냐가 카페를 들어오지 않은지 일주일이 넘었다. 호주 카페에서 단골손님이 사라지면 걱정을 시작해야 한다. 사람이 사라지는데 이유가 필요한 법. 실제로 미국의 피자가게에서 십 년 넘은 단골손님이 며칠째 보이지 않아 경찰에 신고했는데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끔찍한 이야기지만 인생이란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다행히 그녀는 살아 있었지만 카페를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주문했던 치킨 샐러드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볍고 저렴한 음식을 주문해 오던 그녀에게 비싼 메뉴를 추천했는데 그것이 문제가 됐을 수 있다. 호주 사람은 호의적이라 직원의 추천에 대부분 오케이 한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쾌함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불쾌함이 그녀에게 남았을 수도 있다.
카페 밖에서 마주친 소냐는 여전히 환하게 인사한다. 호주 사람의 이런 모습에 또 감탄한다. 그러다 여느 아침 그녀는 햇살을 피해 카페 옆 돌담 위에 앉아 있었다. 은행 문을 열 직원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커피 한잔이라도 시키고 카페에 앉아 기다리는 것이 더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오지 않는 곳에 어떤 폐라도 끼치고 싶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카페가 바쁘지 않아 시원한 물 한 컵을 들고 가 말했다. 빈자리가 많으니 어느 곳이든 편히 앉아 기다려도 된다고. 그녀는 고맙다고 말하며 매우 놀란 표정을 보였다.
호주 사람은 틈만 나면 잡담을 한다. 호주 사람과 일하다 보면 그들이 얼마나 잡담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남 흉을 보기도 하고 쓸모없는 이야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가령 카페에서 직원 둘이 잡담을 시작하면 손님은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예의다. 소냐와 나 사이에 일어난 일이 그녀가 나눈 잡담에 수없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그 덕분일까, 그녀가 일하는 은행의 직원들이 모이는 연말 미팅을 예약하고 싶다고 했다.
은행 근처에 여섯 개의 카페가 있고 모두 각자 다니는 카페가 있다. 소냐는 매니저가 아니며 나는 그 은행의 손님이 아니다. 단지 은행 옆에 위치한 카페에서 커피를 만들다 계산하지 않은 친절을 한번 베풀었을 뿐이다. 여섯 명의 직원이 아침 7시 30분 커피와 아침식사로 망년회를 가졌다.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다.
호주 카페에서 바리스타에게 필요한 것 중 하나는 교감 능력이다. 손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소냐는 아침 8시쯤 카페에 나타나 물 한 컵을 따라 늘 같은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은행 문이 열리면 출근한다. 그녀는 커피를 주문할 때도 있고 그냥 자리에 앉을 때도 있다. 가끔 아침 식사를 먹기도 하고 오후에 감자튀김을 주문하러 오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그녀가 이 카페에서 진정 원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