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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엘 Jan 13. 2020

#05 호주에서 바리스타

나타샤와 지밀 모카

세계에서 가장 일관성 있게 사는 사람을 뽑는다면 호주 사람일 것이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아침에 커피를 마시고 점심에 샌드위치를 먹는 사람은 점심에 샌드위치를 먹는다. 카페 앞을 수없이 지나다니는 사람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길을 수없이 지나다닌다. 카푸치노를 마시는 사람은 늘 카푸치노를 마시며 엑스트라 핫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기록적인 폭염이 와도 엑스트라 핫 커피를 마신다.


카페를 찾는 손님은 저마다 방문하는 시간대가 있는데 어떤 손님은 늘 전화로 주문을 하고 온다. 사람인지라 가끔은 빨리 오거나 늦게 오기도 하지만 마시는 커피는 변함없다. 아주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고. 게다가 카페 입구로 통하는 길은 세 곳인데, 찾아오는 길마저도 정해져 있다. 하지만 아무 때나 불쑥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면, 바로 나타샤이다.


나타샤는 골드코스트 대학 병원의 레지던트 의사다. 그녀의 이름을 묻는데 6개월이나 걸렸지만 직업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병원 이름이 박힌 유니폼을 입고 오거나 수술 키트와 두꺼운 의학 서적을 들고 다녔기 때문이다.


호주 카페는 손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단골손님이 된다. 그러니 적당한 타이밍에 이름을 물어보면 누구나 기꺼이 알려준다. 그리고 상대의 이름을 되묻는 것이 매너다.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개인의 역량에 달렸지만 이름이란 기억하기 위해 물어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개인적으로 손님 이름을 아무 때나 물어보지 않는다. 이름을 기억할 준비가 됐을 때 물어보는 것이 좋다. 나타샤처럼. 그리고 그 이름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나타샤는 지밀 모카를 마시고 스매쉬드 아보카도 (Smashed Avocado)를 사워 도어 (Sourdough) 토스트에 올린 메뉴를 주로 먹는다. 아무 때나 나타나도 이 선택에는 변함이 없다. 스매쉬드 아보카도는 어느 카페에서든 먹을 수 있는 호주 대표 아침식사 메뉴다. 박살 내다, 라는 뜻 그대로 아보카도 껍질을 벗기고 속살을 으깨서 적당히 구운 토스트 위에 발라준다. 아보카도를 으깰 때, 레몬즙을 한두 스푼 넣으면 색은 선명해지고 맛은 상큼해진다. 거기에 엑스트라 버진 (Extra Virgin) 올리브 오일을 살짝 넣으면 크리미 한 (Creamy) 질감을 만들 수 있다. 여기에 피스타치오나 아몬드 등 견과류를 뿌려 고소함을 더하고 페타 (Feta) 치즈를 올려 짠맛을 곁들인다. 그리스 페타 치즈는 심하게 짠 편이라 페르시안 페타 치즈를 사용하면 더 좋다. 여기에 잘게 썬 토마토와 수란을 하나 올리면 궁극의 아침식사 메뉴가 된다. 설명만 들어도 건강해지는 것 같다. 가히 의사가 좋아할 만한 메뉴다.



호주 카페 대표 메뉴인 '스매쉬드 아보카도 온 토스트'



스매쉬드 아보카도는 레시피만 보면 대단히 만들기 쉬워 보인다. 하지만 커피처럼 절대 만만하지 않다. 요리 방법은 간단명료하나 과정은 섬세함을 요구한다. 호주 사람들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것에 관한 섬세함 말이다. 빵은 사워도우를 사용해야 하며 빵의 식감이 쫄깃하도록 겉만 바싹 구워야 한다. 아보카도가 덜 익어 단단하면 안 되고 블렌딩 한 것처럼 너무 으깨져도 안 된다. 아보카도마다 크기가 달라 레몬즙과 올리브 오일 양 조절을 잘해서 간이 지나쳐도 안 되며 부족해도 안 된다. 그리고 접시 위에 모든 재료를 올리는 프레젠테이션은 호주 감성이 물씬 풍겨야 한다.


나타샤가 마시는 모카 (Mocha) 란 이름은 아라비아 반도의 끝 예멘, 남서 해안의 작은 항구도시 ‘무카’에서 따왔다. 중세에 양질의 커피를 수출하던 이 항구는 ‘모카커피’라는 고유명사를 만들었다. 우리가 지금 마시는 ‘모카’는 에스프레소에 초콜릿을 첨가한 커피를 뜻한다. 여기에 스팀 밀크를 부어 만든 것이 정통적인 모카이자 호주식 모카이다. 한국식 모카는 휘핑크림을 추가로 올리고 초콜릿 시럽과 초콜릿 파우더로 장식까지 해준다.


호주에서 모카는 에스프레소에 어떤 초콜릿을 넣느냐에 따라 맛이 좌우지된다. 에스프레소의 비중이 크지 않아서 모카를 만들 때, 잘못 나오거나 남는 에스프레소를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사용하기도 한다. 커피 종류만큼이나 초콜릿 종류도 다양하지만 커피를 볶는 로스터리 (Roastery)가 추천하는 초콜릿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카페에서 사용하는 초콜릿은 파우더 아니면 시럽인데 대부분 초콜릿 파우더를 에스프레소에 섞어 모카를 만든다. 하지만 섞는 과정에서 잘 섞이지 않으면 가루가 씹히고 맛이 일정하지 않아 파우더 대신 시럽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나타샤가 마시는 지밀 모카는 호주식 모카에 특별한 밀크를 사용한다. 지밀 (Zymil) 이란 이름은 우유 회사 ‘폴스’의 락토스 (Lactose)를 뺀 우유의 상품명이다. '지모 밀'이라고도 하는데 ‘지밀’과 더불어 락토스 프리 밀크를 부르는 이름이 됐다. 버버리 코트나 스카치 테이프처럼.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우유에 들어있는 락토스, 유당을 소화하지 못하는 유당불내증을 갖고 있다. 서양인보다 동양인에게서 많이 발생하는데, 한국인의 경우 75% 이상이 이 증상을 갖고 있다고 하니 우유를 마실 때마다 배에서 꾸르륵하는 소리가 나거나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는 사람은 이 증상을 의심해 봐야 한다.


나타샤는 종종 카페에서 친구를 만난다. 가장 좋아하는 카페라고 내가 들을 수 있도록 친구에게 소개한다. 카페를 처음 온 친구에게 베이컨&에그 롤 (Bacon&Egg Roll)을 추천하고 자신은 모카와 스매쉬드 아보카도를 먹는다. 그리고 집이나 병원으로 사라진다. 두꺼운 의학 서적을 들고서.


호주 의과대학교는 6년제인데  유학생들까지 몰려 경쟁률이 높다. 한국은 학교 성적과 수능 성적으로 대학 진학을 하지만 호주는 조금 다르다. 호주 입시는 의과대학교와 나머지 대학교로 구분할 수 있는데, 대부분 대학교는 고등학교 3학년 내신 성적만으로 진학한다. 입학이 어렵고 졸업이 쉬운 한국과 달리 호주는 입학은 쉽지만 졸업이 어렵다. 출석보다 연구와 과제 수행능력을 중시하는 호주 교육은 과목을 패스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패스하지 못하면 학비를 다시 내고 재수강해야만 한다. 한국에서는 한 학생이 ‘F’ 학점을 맞은 과목 때문에 교수님을 찾아가 눈물로 호소해 ‘C’ 학점으로 바꾸고 졸업을 할 수 있지만 호주에서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호주 사회는 공정과 원칙에 의해 움직인다. 호주 대학생은 공부하느라 아르바이트할 시간도 없다, 는 말은 농담이 아니다.


호주 의과대학교에 진학할 때, 따로 보는 시험이 있다. ‘UMAT’라는 지능테스트인데 크게 3가지 영역으로 나누어 언어, 수리, 지각 능력을 측정한다. 한국의 아이큐테스트와 비슷한데 상위 20% 안에 드는 학생을 대상으로 의과대학교 지원 자격이 주어진다. 80%에 해당하는 학생은 내신 성적이 좋더라도 기회를 가질 수 없다. 머리 나쁘면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다른 길을 가라는 것이다.


호주에서 의과대학교에 가려면 먼저 훌륭한 지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거기에 뛰어난 학교 성적이 있어야 하고 면접 또한 통과해야 한다. 호주 얘들 공부 안 하니깐 경쟁이 쉽지 않으냐고 물으면 나타샤는 대답한다.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똑똑한지가 중요하다고. 호주 의과대학교 진학 시스템은 할 수 있는 사람에게 기회를 준다. 안 되는 사람이라도 할 수 있다, 라는 힘으로 강요하지 않는다. 뭔가 모르게 인간미가 느껴지는 시스템이다.


호주 정부는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한다. 유수의 대학들은 세계 대학교 순위에서 서울대보다 상위권에 있다. 한국 사람은 미국이나 캐나다로 유학을 선호하지만 호주에도 수많은 유학생이 있다. 호주에서 유학하는 많은 수재들은 인도와 중국 출신이 많다. 아시아계 학생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호주 의과대학교도 아시아계가 절반 넘는다. 나타샤는 이 치열한 굴레에서 살아남아 의사가 된 것이다.


퇴근길에 나타샤는 언제나 녹초가 되어 있다. 골드코스트는 너무 평화로워 경찰관이 고양이를 구출했다는 뉴스가 일간지에 실릴 정도다. 하지만 도시의 안전과 인간의 건강은 연관이 없나 보다. 병원은 늘 바쁘다고 한다. 그리고 병원의 커피는 너무 맛없어 여기까지 와야 커피를 마실 수 있다고 한다. 호주 어느 병원에 가나 커피는 맛없다고 정평이 나있다. 맛없게 만들기로 담합을 한 모양이다.


커피 없이 의사로 살아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나타샤는 가끔 차이라떼를 마시는데, 밤새 근무를 마치고 잠을 자러 가는 길이다. 아무 때나 불쑥 나타나 커피 한 잔으로 위로받는 그녀의 모습은 감동스럽다. 내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게 한다. 누군가의 아픈 몸을 치료하며 살아가는 그녀를 커피 한 잔으로 안심시킬 수 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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