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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엘 Jan 02. 2020

#03 호주에서 바리스타

후안과 카푸치노

골드코스트 북쪽의 빈리에서 시작하여 퀸즈랜드 주와 뉴사우스웨일즈 주가 만나는 트위드 헤드까지 70km나 쉼없이 이어진 모래사장이 있다. 태양을 받아 빛나는 바다와 끝없이 펼쳐진 황금빛 해변 덕분에 골드코스트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10년 전만 해도 골드코스트라는 이름은 환상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지금은 5천 명이 넘는 한국 사람들이 살고 있고 시드니, 멜버른, 브리즈번, 퍼스, 애들레이드에 이어 호주에서 6번째로 큰 도시이다. 인구는 안양시와 비슷하나 인구 밀도와 규모를 생각하면 안양시보다 한참 떨어진다. 그러나 고층 건물들이 많고 쇼핑 및 문화시설들이 발달해 우리나라로 치면 고양시 정도에 해당하는 도시다. 골드코스트를 관광도시로 생각하기 쉽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휴양 도시에 가깝다.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 하버 브릿지와 같은 거대한 관광 명소는 없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해변 배후에 숙박, 휴양, 생태 관광 시설을 고루 갖추고 있다. 서핑, 수영, 사이클, 골프, 트래킹, 그리고 테니스 등 수많은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는데 환상적인 날씨까지 더해져 감히 휴양의 천국이라 불러도 될 정도이다.


끝없이 이어진 황금빛 모래사장 너머로 운하 도시인 골드코스트



골드코스트에 3년 째 살고 있는 나에게 사람들은 10년 이상 살았던 것 같다고 한다. 잘 살아가고 있다고 인정 받는 것 같아 듣기 좋다. 호주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는 곳이다. 이런 호주에서 나만큼 잘 살아가고 있는 외국인 손님을 꼽자면 후안이다. 영어를 공부하러 호주에 온 그를 10년 이상 살았다고 해도 어색할 게 전혀 없다.


후안을 처음 만난 건, 카페가 오픈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토요일 오전이었다. 영어가 유창하지 않았던 그는 카푸치노를 테이크어웨이 컵에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한동안 노트북을 하다 슬그머니 사라졌다. 토요일마다 노트북과 책을 번갈아 가지고와 카푸치노를 마시고 사라졌다. 토요일 오전은 카페가 가장 바쁜 시간이다. 커다란 상가에 5곳이나 카페가 더 있지만 나만 유일하게 토요일에 가게 문을 열기 때문이다.


호주는 야간이나 휴일에 일하는 직원에게 1.5배 이상 급여를 줘야 한다. 그래서 휴일에 오픈을 꺼리는 가게가 많다. 공휴일에 오픈하는 가게 중에 손님에게 금액의 15% 정도를 추가로 요구하는 곳도 있는데 그 어떤 손님도 버티고 서서 배 째라고 하지 않는다. 법으로 정한 최저시급이 $20나 되는 호주는 가장 높은 임금을 주는 나라 중 하나다. 게다가 임산부를 해고하는 회사는 파산을 각오해야 할 정도로 직원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노동자를 위한 나라이기도 하다.


후안이 매번 슬그머니 사라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한국과 다르게 호주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노트북이나 책을 붙들고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은 매너는 아니다. 카페에는 대부분 커피 때문에 오고 커피를 마시고 나면 당연하다는 듯이 떠난다. 만약 두 명의 호주 신사가 불가피하게 카페에서 긴 대화를 해야 한다면 이들은 맛있는 커피보다 한산한 카페에서 만난다. 그리고 한 시간 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굳이 마시지 않을 커피를 한잔 더 주문해준다. 이는 감탄할 일이 아니다. 호주에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후안은 평일 오전이나 오후에도 카페를 찾았다. 잡담을 사랑하는 일반적인 호주 사람과 다르게 그는 조용한 편이다. 잡담을 좋아하는 호주 사람은 카페에서 틈이 날 때마다 자연스레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말 한마디 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지만 않는한 말이다. 하지만 한 번에 두 잔 커피를 마시지 않듯이 한 번에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는다. 조금씩 꺼낸 이야기를 고스란히 쌓아 가는 것이다.


후안이 마시는 커피 카푸치노는 이탈리아 카푸친 (Cappuchin) 수도회 수도사를 연상시킨다며 카푸치노 (Cappunchino)가 됐다. 카푸치노의 색깔은 수도사가 입는 옷의 색깔과 같고 커피 위에 거품의 모양은 모자 끝을 닮았다. 이탈리아에서 마시는 카푸치노는 작은 컵에 유난히 우유 거품을 많이 올려준다. 그리고 우유 거품 위로 시나몬 가루를 뿌린다.


호주 카페에서 파는 카푸치노는 조금 다르다. 카푸치노는 에스프레소에 스팀 밀크를 섞고 두꺼운 거품 위에 시나몬 가루가 아니라 초콜릿 파우더를 뿌린다. 커피 애호가로서 호주에서 겪은 가장 큰 충격이 카푸치노였다. 그래서 후안처럼 외국에서 온 손님이 카푸치노를 시키면 호주에서 처음 카푸치노를 마실 때 어땠는지 물어보곤 한다. 호주 외에도 뉴질랜드, 영국의 몇몇 카페는 카푸치노에 초콜릿 파우더를 뿌린다. 호주를 벗어나 본 적 없는 호주 사람은 전 세계 모든 카페마다 카푸치노에 초콜릿을 뿌려준다고 믿고 있다.



초콜릿을 뿌린 호주식 카푸치노. 화이트 커피가 주를 이루는 호주 카페에서 라떼 아트는 기본이다.



초콜릿이 뿌려진 카푸치노를 사이에 두고 후안과 서서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는 학생이라기엔 나이가 많은 서른 살 라틴계 남성이다. 스패니쉬로 유창하게 대화하는 것을 보고 스페인 사람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곳은 남아메리카 베네수엘라이다. 어머니는 스페인 사람이고 아버지는 라트비아 사람이라고 했다. 베네수엘라는 스패니쉬를 사용한다. 그는 영어를 마스터하고 싶어 호주에 왔다.


후안은 골드코스트에서 만난 세 번째 베네수엘라 사람이다. 첫 번째는 택시에서 만난 운전사였는데 우리는 망설일 것 없이 베네수엘라 이야기를 했다. 베네수엘라 미녀 이야기가 아니라 막장이 되어가고 있는 나라 이야기였다. 최근 베네수엘라는 연일 뉴스에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나라다. 포퓰리즘으로 상징되던 차베스 정권이 끝나고 마두로 정권이 들어서면서 나라 경제는 엉망이 됐다. 오직 석유에만 의존하던 산유부국은 석유 가격 하락, 주변국의 경제 제재, 정부의 정책 실패 등 여러 가지 악재와 더불어 물가는 무려 100만 퍼센트 이상으로 올랐는데,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오르고 있다. 화폐 가치가 폭락한 베네수엘라에서 지금 커피 한잔 가격은 350만 원이다. 빵 한 조각을 사려고 지폐를 수레에 꽉 채워 끌고 가야 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거리는 아프고 굶주린 사람으로 넘쳐나다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탈출하고 있다. 후안까지 세 명 모두 비슷한 이유로 자기 나라를 탈출해 호주에 왔다.


후안에게 본인의 재산을 물어볼 수 없지만, 베네수엘라를 탈출해 호주로 올 수 있을만큼 충분한 재력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은 항공권 정도만 살 수 있다면 서른 살 전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호주에 올 수 있다. 하지만 호주 정부는 세계 모든 사람에게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주진 않는다. 특히 베네수엘라를 포함해 빈곤한 남아메리카 국가들은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을 수 없다. 이런 경우라면 관광 비자 또는 학생비자를 받아 오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관광비자로는 일을 할 수 없어서 이주의 목적을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학생비자가 유일한 방법인데 많은 학비는 물론이고 비자 기간 동안 충분히 생활할 수 있다는 경제적 여력을 호주 돈으로 증명해야 한다.


후안은 베네수엘라에서 컴퓨터 엔지니어링을 전공했다. 지금은 카페에서 한 블록 떨어진 어학원에서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 다음은 어머니의 나라 스페인에서 석사 과정을 밟을 거라고 한다. 그는 확실히 충분한 재력을 가지고 있다. 때론 부유함이 사람을 거만하게 만들지만 그는 검소한 차림에 겸손한 언행이 몸에 밴 사람이다. 그가 건네는 인사는 언제나 밝고 진심이 묻어난다. 덕분에 그는 호주에서 잘 살아갈 수 있다고 확신한다.


후안이 카페에 올 때면 할 수 있는 모든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실 때면 원하는 만큼 있을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든다. 문을 닫을 시간에 나타나 커피를 주문해도 만들어 준다. 그는 종종 학원 친구들을 끌고 와 커피를 강매할 때도 있다. 작은 호의를 받으면 더 많은 호의로 돌려주는 사람이다.


어느 날 후안은 반가운 소식을 들고 왔다. 어학원에서 일자리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근로 장학생이라는 것이다. 교육이나 숙식 등을 제공받는 댓가로 학교에서 다양한 보조 업무를 하는 것이다. 대부분 해외 어학원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높은 성과는 얻을 수 있는 이런 기회를 활용한다. 나도 영어와 여행에 목말라 있던 시절 필리핀이나 캐나다에서 근로 장학생으로 영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자랑으로 이어지길 바라지 않지만 이런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많은 학생 중에 책임감이 강하고 업무 수행 능력이 충분한 사람에게 특별히 주어진다.


후안이 이런 소식을 들고 와 놀라진 않았다. 그는 자격이 충분하다. 호주에서 잘 살아가는 사람이다. 홀로 정착한 남의 나라에서 커피 한 잔 사 마시러 들르는 가게 주인에게 자랑 아닌 자랑을 하는 그를 대하자니 내 가슴이 뭉클했다. 지금의 밝고 따뜻한 진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길 바랐다.


후안은 학원에서 일을 시작한 후로 아침이든 오후든 때를 안 가리고 초콜릿이 뿌려진 카푸치노를 마시러 나타난다. 가끔씩 에스프레소 싱글 샷과 카푸치노 한 잔을 같이 주문한다. 인건비가 비싼 나라에서 하는 일이 유독 버거울 것이다. 그럴 땐 누구나 커피가 필요하다. 그는 에스프레소를 받자마자 마시고 카푸치노를 천천히 마시면서 사라진다. 그가 잘 살아가고 있는 골드코스트 일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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