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북 스테이 3

휴먼 북

by 글고운

새들의 낭랑한 지저귐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알람 소리 없이 깬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북 스테이 이튿날이 밝았다. 방 안은 어젯밤의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아침은 통유리창으로 뿜어져 나오는 햇빛으로 인해 또 다른 매력을 주었다. 나는 씻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후 1층으로 내려갔다.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다 생각했는데 이미 작가님이 계셨다.


"아유, 부지런해라. 일찍 일어나셨네요. 잘 주무셨어요?"

"안녕히 주무셨어요. 방이 따뜻해서 푹 잤어요."


나는 인사를 드린 후, 밥도 먹을 겸 전날 제대로 하지 못했던 헤이리 마을 구경을 위해 밖을 나왔다. 길가의 양쪽에는 일렬로 여러 노점상들이 즐비해 있었다. 액세서리나 옷, 인형들이 아기자기하게 놓여 있었다. 나는 그곳을 지나가다 본 분식집에서 간단히 배를 채운 후, 미리 인터넷으로 찾아놓았던 두 곳의 박물관으로 향했다. '한국 근현대사 박물관'과 '게임 박물관'이었다. 근현대사 박물관에는 옛날 교실 풍경에서부터 그 시절 집의 모습까지 부모님 세대가 추억에 잠길 만한 것들이 많았다. 게임 박물관은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다양한 게임들이 즐비해 있었다. 격투 게임이나 레이싱 게임 등 수십 가지가 있었는데, 나는 격투 게임을 가장 열심히 했다. 하늘이 어둑해지기 전에 관람 및 체험을 끝내고 저녁을 먹은 뒤 곧장 모티프원으로 향했다.


방에서 다시 편한 옷으로 갈아 입고 책을 읽기 위해 서재로 내려갔다. 작가님은 나를 보시더니 방긋 웃으셨다. 어제처럼 말을 거시며 편안하게 대해주셨다. 가끔 농담을 하셔서 빵 터지기도 했다. 가져온 책은 몇 장 읽지 못한 채 생각보다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작가님이 오랜 친구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말하기 힘들었던 고민도 편하게 들어주실 것 같았다. 사실 북 스테이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묵혀놨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였다. 고민 끝에 나는 글배우 서재에서 하지 못했던 상담을 모티프원에서 하기로 마음먹었다.


"작가님, 혹시 손님들의 고민을 들어주기도 하시나요?"

"그럼요, 편하게 말해 봐요."


나는 망설이며 마음속에 침잠해 있던 상처를 모조리 꺼내 놓았다. 작가님은 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해주셨고 상처를 보듬어주셨다. 그리고 지나치지 않은 조언을 많이 해주셨다. 뻥 뚫린 기분이었다. 시원했다. 상처를 남에게 드러내면 나의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실제로 그런 일을 겪기도 했다), 친한 사람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고민이었다. 이제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정말 감사했다. 상담을 마치고 우린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책을 읽다 고개를 들어 서재에 꽂힌 책들을 둘러봤다. 그러다 작가님이 쓰신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나는 마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그 책을 집어 들었다.


'여행자의 하룻밤'. 낭만적인 제목이었다. 작가님과 모티프원에 오신 손님들이 함께한 다양한 에피소드가 담겨 있었다. 나는 책을 읽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작가님께 여쭤보았다. 이 책을 쓴 저자가 눈 앞에서 책과 관련한 나의 질문들에 답해주고 있다니 영광스러웠다. 꼭 독자와 작가의 인터뷰 시간 같았다. 내가 한 질문들 중 기억에 남는 것들은 대략 이러했다.


"책에서 보면 모티프원에 묵으셨던 대부분의 손님들이 저처럼 고민이나 상처를 가지고 있는데 그럼 작가님은 힘드실 때 어떻게 해결하시나요?"

"힘든 걸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A, B, C, D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해결할 것도 없죠. 슬픈 일이 오면 다음엔 기쁜 일이 오겠구나 하면 되고 기쁜 일이 있으면 다음엔 슬픈 일이 올 테니 그저 담담히 준비하란 의미구나라고 생각하면 돼요. 감정에 너무 동요해서 큰 에너지를 쓸 필욘 없어요."

"티핑 포인트라는 단어를 쓰셨는데 터닝 포인트랑 다른 점이 있나요?"

"티핑 포인트는 작은 일들이 모여 어느 한순간에 폭발하는 걸 말해요. 터닝 포인트가 방향이 바뀌는 순간이라면 티핑 포인트가 조금 더 극적인 의미죠."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하기를 여러 번, 어느새 서재 창 밖으로 달빛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작가님, 저는 이제 올라가 볼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요. 즐거웠어요. 잘 자요."


북 스테이 마지막 날이 밝았다. 아쉽지만 체크 아웃 시간에 맞춰 짐을 싸고 일층으로 내려갔다.


"안녕하세요!"

"아이고, 벌써 가시려고요? 서재에는 더 오래 있어도 괜찮으니 마음 편히 가고 싶을 때 가세요."

"감사합니다!"

"마침 아침 먹으려 했는데, 같이 먹을래요?"


나는 조금 망설이다 아침을 함께 먹게 되었다. 작가님은 밥을 차려주시는 입장이신데도 밥과 찌개밖에 없다며 오히려 미안해하셨다. 나는 전혀 아니라며 맛있다고 허겁지겁 밥그릇을 비웠다. 식사를 마치고 작가님은 차와 빵을 내오셨다. 그렇게 우린 티타임을 가지며 오후 늦게까지 담소를 나누었다. 이제 정말 갈 시간이 되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정말 푹 쉬었어요."

"다행이에요. 이제 진짜 헤어질 시간이네요. 난 이제 방 청소를 하러 올라가 봐야 해서 위층으로 가볼게요. 조심히 가요."


나는 이틀 전에 들어왔던 문을 다시 드르륵 열었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따스하고 편안한 공간이었다. 최고의 북 스테이였다. 신발을 신고 자갈밭을 따라 걸으며 모티프원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작가님의 책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대와 더불어 나누는 하룻밤의 대화가 십 년 책 읽은 것보다 낫습니다."


나는 2박 3일간 훌륭한 휴먼 북을 읽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였던 것은 통유리 창에서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24시간 사용 가능한 1층 서재는 나의 최애 장소가 되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작가님이 간식을 주셨다.
소박하지만 정갈하게 차려주셨던 식사. 정말 맛있었다.
아쉬움에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