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태권도
차라리 꿈이었으면 싶었다. 눈 떠 보니 오른쪽 다리에는 발부터 종아리까지 감싸는 단단한 보호대가 채워져 있고, 그 위에는 설탕포대가 아닌 얼음찜질팩이 얹혀있었다.
침대에서 눈 뜨고 일어나 발을 내딛고, 생체신호가 왔을 때 고민없이 바로 화장실에 가고, 씻고 싶을 때 얼마든지 샤워하고, 뜨거운 커피 한 잔 가득 담아 들고 다니면서 마시고, 집 앞 마트에 장 보러 가는, 이 모든 ’소소하고 확실히 당연한’ 것들이 하루아침에 꿈인듯 아련해졌다.
고작 두 세개 뿐인 낮은 계단도 난간이 없으면 올라가기 버겁고, 미끄럼방지 장치가 없는 경사로는 내려가기 겁나고, 걸어서 10여분 거리인 병원도 차를 타지않으면 갈 수 없고, 병원의 묵직한 여닫이문은 누군가 열어주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고, 집 앞에 새로 오픈한 대형마트에도 구경 갈 엄두가 안났다. 혼자서 할 수 있던 거의 모든 것들이 도움 없이는 불가능 한 이 상황에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미 나에게 벌어진 현실인 것을. 내가 잠시 이렇게 되어야만 했던,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이유가 있겠지. 이만하면 액땜 치고 작지않게 치른 것 같으니 올 한해 대운을 슬쩍 기대해 보련다. 어느 덧 수술 후 4주 차에 접어든 지금은 많이 회복되어, 드디어 묵직한 보호대를 벗고 맨 발로 땅을 디디며 살살살 재활운동을 해야 할 시기가 왔다. 나를 위한 셀프선물로 태권도 1단을 따고 싶었는데, 걸음마를 떼게 될 줄이야.
#체헐리즘 단상. 목발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