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이어지는 의문 속에서 살아가는 것
이전 글에서 쓴 엄마의 사과는 사실 3년은 족히 넘은 기억이다.
아주 긴 시간 동안 부모와 나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였고, 부모의 권력이 나보다 우위였기에 나를 통제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과정을 양육에 포함하였음에도 나는 순순히 당하면서 자라날 수밖에 없었다.
아주 긴 시간이었지만 글로 쓰다 보니 아주 짤막하고도 명확한 기억들만 서술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직도 나 자신이 당한 폭력의 역사를 쓰거나 말하는 것이 어렵다. 타인의 오해를 부를까 두렵고, 나 스스로 조금이라도 기억을 날조했을까 의심한다. 선량한 보통의 부모를 어린 시절의 기억만 가지고 매도하는 것은 아닌가, 스스로 피해자라고 믿고 싶은 것은 아닌가, 만족스럽지 않은 인생을 과거를 통해 합리화하고 싶은 것은 아닌가 늘 스스로 검열하고 따져 묻는다.
그래서 나의 글은 아주 약간의 과장과 아주 약간의 애매모호한 부분조차 담지 않기 위한 검열이 지독하게 반복되었다. 정말로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 당시의 일기장을 통해서 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것만 담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그것이 내가 기만 없이 글을 쓰는 것이라 믿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내가 가정폭력 속에서 자라났고 어떻게든 생존해냈다는 사실만은 아픈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폭력이라는 말이나 학대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거부감을 뒤로하고 나는 내가 생존자임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최근 드디어 부모의 체벌권이라고 불리는 징계권이 폐지될 예정이라는 뉴스를 보았다.
대상이 되는 법 조항의 내용은 이렇다.
(민법 제915조) 친권자는 그 자를 보호 또는 교양하기 위하여 필요한 징계를 할 수 있고 법원의 허가를 얻어 감화 또는 교정기관에 위탁할 수 있다.
법에서조차 친권자가 필요한 징계를 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고, '필요한 징계' 속에 상식적인 수준의 체벌을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나의 경우가 상식적인 체벌이었는지 애매하지만 아마 법적으로 부모와 붙는다면 내가 아주 불리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민법이 폐지되어 개정된다는 소식을 뉴스에서는 "부모라도 매 들지 말라."라는 헤드라인으로 뽑아 보도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논란도 있을 것이라고 본다. 매를 들지 않아서 지금보다 아이들이 더 안하무인이 된다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어떻게 훈육을 하란 말인가, 부모 말을 도통 듣지 않는데 그냥 그렇게 키워 어른이 되면 이 사회에 물의를 빚는 사람이 되지 않으리란 법이 어디 있는가.
그렇지만 훈육을 명목으로 한 체벌을 당해온 어른인 나는 체벌과 학대는 아주 가느다란 선 하나를 사이에 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체벌인지 학대인지 맞는 아이는 분명히 알 수 있다고도.
때린다면 말을 듣게 만들기 손쉬울 것이다. 고문도 그렇고 각종 훈련도 그렇듯 고통은 인간의 의지를 통제하는데 아주 훌륭한 방법이다. 그래서 이 무구한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한 인간의 의지를 꺾고 다른 인간의 의지대로 움직이도록 만들기 위한 방편으로.
하물며 아이는 어떨까.
부모가 나를 버리면 나는 이대로 죽게 될 것이라는 어린 동물 특유의 본능을 아직 지니고 있는 아이라면 폭력을 통해 손쉽게 제압하여 통제할 수 있다. 얌전하고 공부 잘하고 부모 말에 토 달지 않고 겉으로 보기에 아주 훌륭한 아이로 만들 수 있다는 유혹 속에서 폭력이라는 수단은 아주 매력적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자라난 내가 장담하건대 그것은 신기루다.
아이는 영원히 아이로 머물지 않는다.
그 아이가 상처로 얼룩진 마음과 분노로 가득 찬 머릿속을 가진 어른이 되어 부모 앞에 설 날은 분명히 온다. 시간은 아이의 편이고 시간이란 대가 속에 노쇠한 부모는 더 이상 폭력도 압력도 사용할 방도가 없다.
그러나 어른이 된 나는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곤란함을 느꼈다.
이것을 할까, 저것을 할까, 나 스스로 결정을 못하던 부분들도 어른이 되며 다시 훈련을 해야 했고, 어느 순간 갑자기 몰려드는 우울과 불안함을 통제하는 훈련도 다시 해야 했다.
각종 인간관계에서 아직도 어려움이 있다.
부모에게 신뢰를 배우지 못한 나는 타인을 신뢰하는데 아주 오랜 시간을 쏟아야만 한다. 그럼에도 작은 오해에 금방 그 신뢰를 철회하고 돌아선다. 상처를 짊어지고 그 관계를 유지할 만큼 나의 마음이 단단하질 못해 관계를 먼저 버리고 도망치는 쪽을 택하는 경우가 잦다.
물론 이 또한 내게 남은 숙제고 앞으로 여러 과정들을 개인적으로 거쳐야 할 것이다.
이 글들은 생존자로서 나의 훈련을 도와줄 수 있기를 바라며 쓰기 시작했다.
부모에게 사과를 받고 용서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나는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그 일들을 잊어가는 것으로 용서를 갈음했다. 부모와 어떻게 대화해야 할지, 어떻게 나의 의지를 인정시키면서도 서로 고통스럽지 않은지도 배워가고 있다.
관계를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나만을 위해서 부모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마치 이 세계에 다시 태어나 나라는 사람을 앞에 두고 하나하나 뜯어보며 '넌 어떤 걸 좋아하니?'하고 질의응답을 하는 기분이다. 넌 부모와 어떤 관계를 만들고 싶니, 넌 어떻게 살고 싶니, 그걸 어떤 방식으로 설득하고 싶니, 그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앙금은 유리 파편처럼 온 마음에 흩어져 박혀있다.
그냥 성큼성큼 걷다가 찌릿 아파 발을 들어보면 박혀있는 작은 유리파편 같다.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자잘하게 자꾸 걸리는 것이다. 어릴 때 당한 폭력이 폭력 그대로의 기억만으로 남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냥 어떤 상황이든 내 감정이 그때와 유사하다면 발동되는 시한폭탄처럼 나는 자꾸 자잘하게 아프다.
사과를 받았든 지금 부모와 어떤 관계이든 그 모든 고통의 파편은 내 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생존한 것이 맞는가.
이런 삶을 생존했다고 하는 것이 옳은가.
나는 과거의 망령처럼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꾸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고 싶어 글을 쓴다. 자꾸 쓰며 퇴색시킬 것은 퇴색시키고 자비로운 시간의 품에 기억을 쏟아 흘려보내며 그럴 때마다 자유로워지는 나 자신을 느낄 것이다.
그러다 언젠가 날 좋고 볕이 좋은 어느 날, 아,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느낄는지도 모른다.
그 순간 나는 정말로 생존해서 현실에 발을 딛고 제대로 살고 있다는 실감을 할 것이다.
어쩌면 빨리, 어쩌면 아주 느리게 그런 순간이 올 것이라 굳게 믿으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이 찬란한, 내가 무척 좋아하는 가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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