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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홍 Oct 05. 2020

부모와 떨어져 산 후 알게 된 것

가정폭력 생존자로서 독립 후 배워온 것


* 이 글에서는 가정 내 언어폭력을 포함한 각종 폭력과 압박, 강요 등에 대한 각종 트리거 주의가 필요한 장면이 있어 유의 부탁드립니다.



긴 시간 동안 내가 부모의 집에서 자라면서 겪었던 것이 가정폭력이자 학대임을 받아들인 것은 사실 주거 분리가 이루어진 이후였다. 그 집에서 나는 참 긴 시간 동안 생존했다. 심지어 직장인이 되어 내 힘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후에도 그 집에서 살았으니.


내 배우자는 내 과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주 이런 말을 했다.

"왜 뛰쳐나오지 않았어?" 또는 "나 같으면 벌써 뛰쳐나갔다."같은 말들을.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 이유를 배우자에게 설명했으나 마뜩지 않은 표정이었다. 물론 강직하고 단단한 내 배우자라면 분명 고시원이라도 잡아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며 집에서 나오고야 말았을 것을 알기에 그 당시 나의 기분과 입장을 모두 이해시키는 것이 무리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그러지 못했던 이유를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아주 오랜 기간 학습된 공포와 무기력이었다.


처음 맞을 땐 얼떨떨하지만 엄마도 미안해 보이니 내가 잘못했구나 생각한다. 아주 어린 나이였다. 내가 수직선을 제대로 이해 못해서, 영어 철자를 다 외우지 못해서, 구구단 9단을 능숙하게 말하지 못해서 엄마가 속상해서 나를 무심결에 때리고는 자신도 미안해한다고 생각했다.

그다음엔 맞는 행위 그 자체에 대한 공포로 의지가 얼룩지기 시작한다. 쳐드는 손에 대한 분노와 반항심이 쳐들어도 얼굴이 얼얼하도록 맞고 나면 저항의지가 사라진다. 


알고 있는 맛이 제일 위험하다는 인터넷 유머가 있었는데 매 맞는 것도 비슷했다.

알고 있는 아픔이 제일 위험하다. 어디를 어떻게 맞을 때 아픈지 알기에 아프지 않고자 하는 내 본능이 의지를 억누른다. 수치심과 함께, 


언어폭행도 비슷하다. 내 부모는 나의 약점을 모조리 알고 있다. 내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과 포기한 꿈까지도 전부 알고 있기에 부모는 내게 있어 최악의 적이 된다.

일단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쪽부터 자근자근 부숴나간다. 그것에 저항하고 반항하고 부정하면 가장 아픈 부분에 말로 쑤욱 칼을 찔러 넣듯 후벼 판다. 나의 마음은 산산조각 나고 고통스러워 울고 만다. 


그렇기에 나는 저항하지 못했다. 

멀고 먼 대학까지 통학을 하다가 기숙사를 신청해버린 날 집에다 당당하게 통보했지만 익숙한 아픔이 밀어닥칠 것 같은 예감에 약간의 으름장에도 쉽게 포기했다. 끙끙거리며 통학을 하며 대학을 마쳤다. 직장에 들어가도 회식 외에 외박이나 여행도 제한을 당했다. 그 또한 쉽게 포기했다. 


맞고 싶지 않았고, 아픈 부분을 말로 후벼 파이기도 싫었다.


그러나 나의 의지는 도무지 나를 편하게 두질 않았다.

너 이대로 가면 독립된 자아 따윈 없는 껍데기로 살다가 무덤으로 들어가기 직전에야 후회하게 될 걸. 그렇게 마음이 수런거리는 소리에 나는 자주 편두통을 앓았다. 앓아누워 자주 꿈을 꾸었다.

엄마 아빠가 다 죽어 사라진 세상에서 나 혼자 남아 꾸역꾸역 연극하듯 살아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뭘 위해서 그렇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후회하는 끔찍한 꿈이었다. 그 당시 나는 부모가 죽는 꿈을 꾸면 후련함에 깨고 그 후련함이라는 감정 자체에 소스라치다 엉엉 우는 새벽을 자주 보내었다.


그렇게 독립을 꿈꿨다. 포기할 수가 없었다.

결혼이라도 하지 그러냐는 주변의 농담 같은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은 건 나는 정말이지 가족이라는 존재가 지긋지긋했기 때문이었다. 가족을 떠나기 위해 또 가족을 만들으라니.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차근차근 부모를 설득하려 했으나 설득하기가 쉽지 않았다. 부모의 머릿속에서 과년한 딸은 시집갈 때까지 조신하게 부모 관리 하에 한 지붕 아래 재워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언제라도 쓸 수 있게 보증금을 차근차근 모아가며 나는 호시탐탐 틈을 엿보았다. 그리고 그 틈은 어느 순간 어이없게 터져 나왔다.


대학에 들어간 남동생이 통학이 어렵다고 하자 엄마가 학교 근처 방이라도 얻어주려고 했던 것이 그 시작점이었다. 나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던 내 대학시절은 왜 그렇게 통학으로 힘겹게 마치도록 둬놓고, 동생에겐 왜 그렇게 관대한가 소리 높여 항의했다. 처음엔 엄마에게 부모의 양육방식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라며 얻어맞았지만 맞더라도 계속 외쳤다. 이것은 기회였다.


때마침 회사에서 끝없는 야근을 이어가던 나는 왕복 세 시간 통근의 피로까지 더해져 병을 얻었다. 이런 복합적 기회로 인해 아빠가 먼저 손을 들었다. 아빠는 엄마에게 아무리 부모의 양육방식이라도 이건 불공평한 것 같다고 설득했고 회사 통근시간을 중이기 위한 임시적 조치이니 주중에는 따로 지내도 주말엔 본가 집으로 돌아오라는 조건 하에 독립을 허락했다. 물론 나 역시 남동생의 대학 근처 자취방 생활에 더 이상 토 달지 않겠다고 동의했다.


이렇게 독립이 허락되고 방을 구하고 처음으로 혼자 자게 된 그 밤에 나는 너무 기뻐 잠이 오지 않았다. 물론 주말에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여러 제약이 있었지만 처음으로 이 삶을 내가 꾸린다는 것이 실감 나던 그 밤, 누구의 위협도 없는 그 밤이 얼마나 달았던지 나는 두근거리는 내 심장소리를 듣는 기분이었다.


부모와 떨어져 산 시간이 지금까지 이어지며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차차 글로 써볼 생각이지만 정말 큰 일들이 많았고 이제야 겨우 안정이 되어가지만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아직은 장담할 수 없다.


긴 시간을 부모와 떨어진 공간 속에서 살다 보니 나라는 사람은 참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 많은 문제들이 내가 어른이 되는 것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타인과 관계를 올바르게 이어갈 수 없도록 만들고 내가 나를 싫어하게 만들었으며 혼자선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 취급을 하게 만들었다.


제일 큰 문제는 무기력이었고 그다음으로 큰 문제는 회피성이었다.

나는 두려운 것과 맞서 싸우는 힘이 극단적으로 부족했다. 거기다 학습된 무기력이 더해져 어떤 문제가 터지면 주저앉아 내내 잠에 빠져들었다.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마지막의 마지막 기한까지 다다르면 못 이긴 듯 그것을 해치웠다.


이런 문제가 가장 크게 부각된 곳은 인간관계였다. 특히 내밀한 인간관계. 연인 혹은 배우자와의 관계 속에서 내 혼란이 얼마나 컸는지 모른다. 나는 남에게 맞출 줄은 알아도 내 상황을 명확하게 설명하거나 말하면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삼킨 채 내어놓지 못했다.


"말을 좀 해봐. 말 좀 헤. 왜 말을 안 했어?"

이런 말을 가장 많이 들었는데 답답할 걸 알면서도 어떤 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나조차 알 수 없었던 탓이었다. 내 의견을 내놓으면 맞았던 기억, 내 의견이 모조리 묵살당했던 경험, 네가 가진 꿈같은 건 다 버리고 현실에 발맞춰서 살라고 어릴 때부터 들었던 조언에 따라 내 생각이나 내 마음, 내 의견 같은 건 이미 풍화되고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걸 말할 줄을 몰랐다.


그냥 남 듣기 좋은 말만 했다는 게 아니라, 나에 대해서 정말 깊은 것은 아주 가까운 관계에도 꺼내놓을 줄을 몰랐다. 내 약점이 될만한 것은 모조리 사용해서 내 목에 족쇄로 채우는데 썼던 부모 덕분인지 나는 관계가 가까울수록 내 결점을 숨기려 급급했다.


그러다 에너지가 소진되면 뒤돌아서 도망가고 싶어 했다. 묻지 마, 설명이 안된다니까, 말하기 싫어, 왜 그런 걸 다 알아야 해? 좋은 것만 말해주면 왜 안되는데?


내가 알게된 문제들은 연습을 통해 나 스스로 느낄 정도의 경미한 진보는 있는 상태이다.

내 의견을 살펴보기, 내 기분을 내가 주시하기,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해서 회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상대와 대화하며 풀려고 해 보기, 무엇보다 도망가지 말고 되도록 정말 흙탕물 속에서 마음껏 해결하려고 맞서 보기.


모든 것들이 독립 후부터 지금까지 겨우 혼자 걸음마하듯 다시 배우고 쌓아온 것이다.

나는 신기할 정도로 자유로운 기분이다. 좌충우돌, 시행착오 속에서 피로하고 괴로워도 자유롭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유년시절 놓쳤던 것들을 죽을 때까지 시행착오 속에서 배우게 되리라.

지금도 자주 스탭이 꼬이지만 배운다는 것은 그런 법이라고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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