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 상황에서 어김없이 몸을 조여 오는 트라우마 증상
내 부모가 나를 학대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성인이 된 내가 돌이켜 생각할수록 더 명확해지는 사실이 있다.
아이가 고통스럽다면 그것은 어른인 양육자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어느 시점부터 나의 행동이 어른이 되어가는 또래 친구들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있었다. 정확하게 설명하긴 어렵지만 걸음이 늦된 아이처럼 자꾸 반박자 늦게 어른이 되는 것 같았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때이지만 그냥 나는 계속 어딘가에 멈춰 서성거리는데 친구들은 성큼성큼 걸어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친구들 사이에서 아는 것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편안했다.
맞아, 나는 잘 모르잖아. 아, 그게 뭐야? 처음 들어봐.
자꾸 입에 착 붙는 그 말들을 나는 무척 애용했다. 그 말은 상황을 단숨에 부드럽게 만들어주고 나에 대한 과도한 관심을 지울 수 있게 도와주었다. 약간 바보 취급을 받는대도 괜찮았다. 배척받거나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것이 싫었다. 갈등이 발생하거나 싸움에 휘말리거나 누군가를 기분 나쁘게 만들거나 하는 것이 나는 정말로 싫었다.
그 밖에도 나는 친구가 이걸 좋아한다고 말하면 나도 좋아한다고 말했고, 저걸 싫어한다고 하면 나도 싫어한다고 말했다. 진로 문제가 나오면 나도 잘 모르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대학을 갈 수는 있을까? 나 공부하는 거 너무 싫어, 너스레를 떨면 깊은 이야기가 나올 필요도 없거니와 누군가의 의견과 다른 입장일 필요가 없었다.
지금 와서 떠올려보면 갈등 상황이 두려웠던 내가 그나마 취할 수 있는 최초의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반에서 싸움이 나서 두 사람이 언성을 높여 서로를 비난하고 싸울 때 나는 보통 구경하기보단 내 심장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아 자리를 피했다. 내가 비난받을 일이 생기면 먼저 사과하거나 어서 회피하고자 도망을 쳤다. 다신 그 애와 말을 섞을 기회를 없애며 나는 모든 싸움을 피했다. 누군가 목소리가 커지면 너무나 두려웠기에, 너무 괴로울 정도로 두려웠기에 그랬다.
그러다가 관계에 촘촘하게 선을 그은 이후부터는 양상이 조금 달라졌다.
내 감정에 가까이 다가와도 된다고 규정한 선 안의 사람에게 나는 지나칠 정도로 저자세로 굴었다. 그들이 인상이라도 찌푸리면 내 가슴은 완전히 무너져버리는 것 같았고 나에게 실망한 듯 보이면 내내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사람을 최소화하여 내 마음을 지켰다.
그러나 내 감정밖에 놓인 무수한 사람에게는 반대로 지나칠 정도로 가차 없어졌다. 상대와 싸움이 붙으면 상대의 약점만 말로 꼬집으며 구석까지 몰았다. 그 방식은 내 엄마가 즐겨 쓰던 방식이었다. 나는 그걸 당할 때마다 호흡곤란이 올 것 같다고 느끼곤 했다. 한번 써먹어보니 상대 역시 구석에 몰린 내가 느꼈던 기분을 느끼는 것 같았다.
"너랑 싸우면 기분이 정말 더러워. 네 말 다 맞고, 내가 미안한데, 그래도 기분이 정말로 더러워."
싸우던 상대가 울며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웃음이 나왔다.
어, 나도 알아.
나도 맨날 집에서 당하거든. 기분 정말 더럽지. 나도 알아.
그땐 몰랐지만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끝없는 트라우마 증상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보자고 발버둥 치고 있다. 성인이 되고도 한참 지난 지금도 발버둥은 여전한 것 같다.
집안이 냉랭한 침묵 속에 잠겼을 때 조심하지 않으면 매를 맞는다. 엄마가 기분이 나쁘거나 아빠가 기분이 나쁠 때는 특히나 더 맞거나 혼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런 순간엔 뭐든 더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카드를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 어린 나는 그렇게 고군분투했다. 아빠가 기분이 좋아지도록 지금 읽고 있는 책중에 교훈적인 부분만 마구 떠들어대거나 엄마가 기분이 좋아지도록 티브이에 나오는 누군가를 엄마와 함께 험담해준다.
그렇게 무엇이든 하지 않고 그 분위기를 그냥 두다 보면 반드시 내게 싫은 소리를 해서라도 내가 반발하게 만들고 그 결과 긴 시간 혼날 수밖에 없게 상황이 흘러간다.
그러니까 침묵이 길게 이어지면 안절부절못한다. 이것이 아직도 남아있는 트라우마 증상이다.
혹시 화가 난 건가, 말이 길게 없으니까 나는 편안한데 상대는 내가 아무 노력도 안 한다고 생각하면서 불만을 품고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침묵 끝에는 반드시 갈등이 찾아오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내내 안절부절 못 하고 불편한 마음을 품고 있거나 그 침묵을 깨고자 나 스스로 무리해서라도 상대를 만족시키려고 드는 행동을 한다.
또 다른 증상은 엄마가 내게 소리를 지를 때 느꼈던 두려움을 지금도 그대로 신체적 반응으로 느끼는 것이다. 주변에서 누가 큰 소리를 내며 싸울 때 갑자기 심장이 쿵 내려앉거나 귀에 심장소리가 들릴만큼 긴장하고 입에 침이 마르거나 손 끝이 차갑게 식는 등 두려움까지 한꺼번에 느끼는 것.
내 배우자는 가끔 욱하면 밖에서도 화를 자유롭게 내는 사람이라 누군가와 언성을 높여 싸우는 경우가 있는데 싸움에 한 편이 되어 동참해주지 않는 내게도 불만을 표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상황에 대부분 어쩔 줄을 몰라 어서 이 자리를 뜨고 싶다는 생각 밖엔 없었다. 분노가 공기로 마구 전해지는 그 공간은 내게 있어 어서 도망치라는 알람이 울리는 방 안 같았다. 이 또한 아직 극복을 못 했다.
가장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증상은 거절을 못 한다는 것이다.
그냥 내성적이거나 배려심이 깊거나 지나치게 상대를 먼저 생각해서 거절을 못 하는 심리가 아니라 나는 정말 극도의 두려움에 젖어 거절하는 것을 회피하고 미뤄둔다. 심지어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가 있지도 않은 상대의 분노를 상상하기 때문이다.
"시끄러워, 시키는 대로만 해, 네 의견 필요 없어."
"그래도.... 내 진로잖아. 내가 앞으로 다녀야 할 학교잖아...."
"시끄럽다고 했다? 또 맞을래? 이게 자꾸 말대꾸야. 부모가 너 나쁜 길로 가라고 하겠어? 그냥 따라오라고."
이런 대화가 잦은 환경 속에서 커온 나는 상대가 나와 아주 가까운 관계일수록 내가 불편하거나 하고 싶지 않거나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꺼려한다. 아니다, 꺼려하는 수준이 아니라 두려워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나에게는 누구든 타인이 나를 무조건 사랑할 것이라는 신뢰가 없다.
내 부모조차 나를 조건에 따라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말다가 했으니, 타인이야 오죽할까 생각한 지 너무 오래되었다. 그리고 그런 신뢰를 쌓을 경험치가 얼마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상대를 위해 내가 그 조건을 맞춰주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든 그것에 응하지 않으면 분노하거나 나를 비난하거나 할 권리가 상대에게 생긴다고 무심결에 마음이 믿어버린다. 서운해하거나 아쉬워하거나 실망하는 그 몸짓, 표정 언어 속에서 나는 엄마를 읽는다. 잃기 싫은 사람일수록 엄마의 분노를 떠올리며 나는 최대한 맞추고 또 맞추기 위해 나 자신을 깎고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다.
깎아 버린 부분들은 그렇게 사라지고 나의 자아정체감은 얄팍한 정도로만 남아있다.
성인이 되며 만든 멀쩡한 껍데기 속에 가늘고 미약한 자아, 그 사이를 뽁뽁이 정도가 채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 다 터져버리거나 무너져버릴지 모르는 나의 내면은 늘 위태롭다.
이 트라우마 증상들은 모두 어린 시절부터 나를 야금야금 좀 먹어 왔다.
타인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맺고 유지하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더 나쁜 것은 내가 그런 것쯤은 얼마든지 좋은 관계를 맺는 것처럼 포장하고 상대와 내가 모두 그것을 믿게 만들 정도로 기술이 좋아졌다는 것이다.
안락한 기만 속에서 잔혹한 진실을 잊을 수 있도록 내가 가공된 행복을 만드는 기술은 날로 발전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럴수록 트라우마 증상을 딛고 나 자신을 진짜 행복을 만날 수 있도록 등을 떠밀 힘은 갈수록 줄어만 간다.
이렇게 안락하고 따뜻한 거짓말 속에서 왜 떠나야 하지.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한 사소한 거절조차 단호하게 하지 못하여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가장 많이 미워하게 되는 저주에 걸린 것과 다름없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엄마,아빠는 혹시 내가 이런 어른으로 크길 의도했던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