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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우 Apr 10. 2022

아버지를 떠나보내며

꼬마김밥

“아버지와 가장 좋았던 때는 언제였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코로나 탓에 빈소가 없어 하루 늦게 장례를 치러야 해서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오전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이런저런 회한과 설움에 북받치는 눈물을 도무지 참지 못했던 나는 오후 내내 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저녁식사 준비가 걱정이었는데, 아내가 식사 대신으로 과일을 깎고 치즈를 잘랐다. 없는 입맛과 기운에 고마운 일이었다. 과일 조각을 씹다가 아내가 자신을 위해 따라놓은 와인을 몇 모금 마시자 몸도 감정도 조금 누그러졌다. 나는 표정만으로 아내에게 되물었다.

“평생 건조한 사이였지만, 그래도 한두 번 정도는 온전히 다정했던 기억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서….”

“글쎄. 언제였을까?”   

  

나는 마구 어질러져 있는 기억 속을 헤집으며 긴 여행을 떠났다. 아내의 말마따나 아버지와는 평생 가까워지지 못했다. 대개의 아버지와 아들처럼. 아니 그렇지도 않았다. 우리는 조금은 특수한 관계로 엮여 있었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언제나 형이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너무나 무서운 존재였다. 아버지는 한 번 화가 나면 좀처럼 참지 못했다. 재떨이에 맞고, 주전자를 피할 때마다 벌벌 떨곤 했다. 술 취한 아버지가 싫고 무서워 외면했다가 다음날 엄마에게 이끌려 무릎 꿇고 잘못을 빈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버지가 형에게는 나처럼 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심지어 형의 눈치까지 살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심한 배신감과 억울함에 치가 떨렸다.

아버지는 지나칠 정도로 형을 사랑했다. 안타깝게도 그건 짝사랑도 아니고 외사랑이었다. 형은 아버지의 장남에 대한 일방적 사랑을 부담스러워했고 나는 그런 형을 부러워했다. “그럼 저는요?” 나는 몇 번이나 속으로 물어보려던 말을 삼키다가 어느덧 아버지가 필요 없는 나이에 이르렀다.     


시도 때도 없이 싸먹는 김밥은 나의 최애 음식 가운데 하나다.


머리가 굵어진 형이 엇나가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와 대화할 시간은 점점 늘어났다. 그 즈음은 아버지도 근근이 이어오던 공장을 정리하고 막노동에서 허리마저 다쳐 엄마에게 전적으로 생활을 의존하던 때였다. 형이 크고 작은 사건과 사고로 집안에 분란을 일으키기만 하면 아버지는 나를 찾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복잡 미묘한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꼭 이럴 때만 찾는가 싶은 서운한 마음 한편에,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허황한 착각에 우쭐하기도 했던 것이다. 어리석은 나는 내가 아버지에게 느끼는 결핍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형이 ‘잘’ 살길 바랐다. 각자 ‘잘’의 기준이 다른 탓에 서로 원망하고 안타까워하며 상처받았을지라도. 형 인생의 황금기이자 아버지가 가장 행복해했던 시절은 형이 공기업 공채로 취직해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나가던 20대 중반의 몇 년, 내가 제대 후 막 대학에 복학했던 즈음이었다. 형은 이제 대놓고 집 바깥으로만 맴돌며 지냈지만, 아버지는 그런 모습마저 흐뭇해하고 대견해했다.


모처럼 형이 종일 집에 있는 일요일이었다. 친구를 만나느라 낮술에 취한 아버지는  식구가  자리에 모인 저녁식사 자리를 여간 기꺼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의 성화에, 불편해하는 우리들의 표정에 술자리를 이어나가지는 못했다. 아버지는  이상 무서운 ‘가장 아니었다. 식사  형과 나는 우리 방으로 들어왔고 엄마는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방문이 열렸다.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서 나가 술을 한 잔 더해야겠는데, 누가 상대해 줄 거야?”

형이 싫은 내색을 감추지 않았으므로, 어쩔 수 없이 내가 모시겠노라 했다. 우리는 집 근처 감자탕집에서 뼈 해장국을 놓고 술잔을 기울였다. 아버지는 말씀이 많았다. 옛 시절 얘기가 대부분이었지만,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찔끔찔끔 털어놓는 형에 대한 염려와 걱정임을 모를 내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취중에 “나는 실패한 인생이지만, 네 형은 그러지 않아야 한다. 네가 잘 살펴라.”는 취지의 말을 간신히 남겼다. 이후 아버지는 종종 자신의 삶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규정했는데, 나는 그때 그 말을 처음 들었다.    


“뭐랄까. 어려서는 너무 무서웠고 커가면서는 실망만 거듭 안겨주었던 아버지에게 처음 연민을 느꼈던 순간이었어.”

“아니, 그런 거 말고. 부모 자식 간에 애틋하거나 안타까운 마음이 왜 없겠어. 그런 거 말고, 정말 둘 만의 시간으로 온전하게 행복하고 좋았던 기억이 없었느냐고.”     


이렇게 싸먹고 저렇게 싸먹는 김밥


아버지는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개월  형이 엄마를 따라 세상을 등졌을  더욱 힘들어했다. 이십  후반에 형이 불미스러운 일로 공기업을 그만둔 후부터 엄마는 돌아가실 때까지 형을 건사해야 했다. 그건 전적으로 아버지가 엄마를 닦달하고 종용한 결과였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형에 대한 아버지의 걱정이 커지면서 나와 아버지 사이는  벌어졌다. “저는 엄마가 아니에요.” 형의 방황이 다시 시작되고 아버지가 형을 걱정하며 나를 재촉할 때마다 매정하게  번이나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나는 엄마의 역할을 대신 맡아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때 내가  냉정하고 야박했더라면 형은 그렇게 궁지에 몰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함께 아버지의 장례 문제를 상의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형이 세상을 등지고   2년여의 시간이 어쩌면 아버지와 가장 가까웠던 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처음의 허망함과 상실감과 어색함이 걷히면서 우리는 조금씩, 불필요한 장애물 없이 서로에게 자신을 드러낼  있었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편마비에 시달리는 아버지를 부축하며 살면서 처음 자연스럽게 손을 잡을  있었고, 엄마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릴  있었고, 조심스럽게  얘기도 꺼낼  있었다. 아니 나는 그랬는데, 아버지는 어떠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에게는 내가 아니라 형이  절실히 필요했는지도.

하지만 애틋한 감정도 딱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은 서로에게 다가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나는 나대로의 삶을 사느라 소원했고, 아버지는 자신에게로 침잠했다. 우리는 더욱 멀어졌다.     


갈수록 기력이 쇠하던 아버지가 이전 해 9월 당뇨발로 병원에 몇 주간 입원한 이후, 결국 요양원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간 아버지 수발을 들어주던 친척도 두 손 두 발을 들었고, 나도 아버지 돌봄에 자신이 없었다. 그 즈음부터 우리는 서로에게 심한 상처를 주었다. 아버지는 감히 자신을 ‘그곳’에 내팽개친 아들을 용서할 수 없었고, 나는 아들의 상황을 헤아려주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문제는 그 시간도 길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눈에 뜨이게 쇠약해져만 갔다. 발가락은 모조리 썩어 들어갔고, 다리는 퉁퉁 부었고, 기억은 갈수록 짧아졌고, 끝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삼 주 전, 함께 병원 두 군데를 들른 게 아버지와의 마지막이었다. 이미 그 며칠 전부터 아버지는 매일 새벽마다 열 번 이상 아들에게 전화하던 일을 까맣게 잊어 버렸다. 얼마 후 급성 폐렴으로 병원으로 옮겨진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뵙지 못했다. 역시 코로나 때문이었다.     


기억 속의 긴 여행 끝에 마침내 추억을 하나 찾아냈다. 중학교 시절 여름방학의 어느 평범한 오후였다. 낮에 불쑥 집에 온 아버지는 혼자 있는 내게 관악산에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버스와 택시를 갈아타고 관악산에 도착해 짧은 산행을 했다. 아버지는 중간에 길을 벗어나 큰 숲 속 그늘에 들어가 자리를 펴고 낮잠을 잤다. 나는 낮잠을 자는 대신 한참 동안 아버지만 신기하게 바라봤다. 당시 아버지는 휴가 때 햇볕에 화상을 입어 목 주위에 물집이 심하게 잡혀 있었는데, 숲 속이 얼마나 시원했는지 물집이 저절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날 아버지는 행상에게서 김밥과 사이다를 사주셨다. 시금치와 당근, 단무지 밖에 들어 있지 않은 얇고 긴 모양의 김밥. 한 마디로 별로 맛있어 보이지 않았으나, 의외로 탱탱하고 맛이 좋아 깜짝 놀란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아버지와 누워 있던 시간이, 그 후에 아버지는 담배를 피우고 나는 김밥과 사이다를 먹었던 시간이 정말 좋았던 것 같아. 온전하게 아버지와 나만의 시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나 할까. 그래, 김밥도 너무 맛있었고.”

내 이야기에 아내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좋았었겠네.” 하면서.     


꼬마김밥은 채식 요리로도 훌륭하다.


그때 먹었던 얇고 긴 김밥, 그러니까 주로 등산로나 포장마차에서 어쩌다 먹던 내용물 빈약한 김밥을 반으로 자르면 지금의 ‘꼬마 김밥’이 된다. 30년도 훨씬 전 별다른 개성 없이 만들어 판매하던 그 빈약한 김밥은, 연겨자를 베이스로 한 이른바 ‘마약 소스’가 큰 인기를 누리면서 어느덧 확고한 별미로 자리 잡고 있다.

꼬마김밥의 맛의 포인트는 밑간에 있다. 나는 김밥을 할 때면 다시마를 서너 장 넣은 물로 밥을 짓는다. 고슬고슬한 밥에 소금과 참기름, 깨 따위로 밑간을 하고, 살짝 데치고 간장에 버무린 시금치나물, 식용유에 볶은 당근, 그리고 물기 뺀 단무지만으로 김밥을 만다. 김을 1/2, 또는 1/4 크기로 잘라 밥을 너무 많지 않게 펼쳐 넣고 재료를 얹어 돌돌 감싸면 완성. 김 위에 참기름을 바르고 깨까지 뿌려주면 보기도 좋고 맛도 더욱 고소해진다.     


아버지 삼우제를 마친 날, 긴장이 풀려서인지 종일 심하게 몸살을 앓았다. 가뜩이나 일도 잔뜩 밀려 있는데 며칠 않아 누우면 어쩌지 하는 걱정과 달리 다행히 다음날 아침 개운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생각난 김에 삼우제 때 올린 시금치와 냉장고에 웅크리고 있는 단무지와 당근을 꺼내 꼬마 김밥을 만들었다. 대강의 짐작으로 이른바 ‘마약 소스’도 만들어 보았다. 연겨자 반 숟가락에 물 한 숟가락, 간장 반 숟가락, 식초 반 숟가락, 설탕 반 숟가락을 넣고 섞으니 비슷한 맛이 났다.     

쫀쫀하게 싸여진 김밥을 씹으며 문득 다시 일상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움은 그리움대로, 슬픔은 슬픔대로, 안타까운 마음은 또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그러다 보면 죄책감도 원망도 그리움도 마약 소스처럼 조금씩 희석될 테고, 어느덧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겠지, 하고.


그래, 삶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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