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묵찌개
얇은 사각 어묵을 적당한 크기로 썰어 무나 양파 따위와 함께 뻘건 국물에 끓인 음식을 나는 오래도록 ‘뎀뿌라’ 찌개로 알았다. 정확한 발음이 ‘뎀뿌라’가 아니라 ‘덴뿌라’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성인이 되고 나서였다.
엄마는 마치 요즘 내가 라면을 끓이듯 아무 때고 덴뿌라 찌개를 끓였다. 국물 없이는 밥을 뜨지 않는 습관을 가진 아버지를 위해. 반찬 투정이 심한 나를 위해. 이도저도 아니고 그냥 마땅한 찬이 떠오르지 않을 때. 많으면 일주일에 두세 번씩도.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된 이후까지. 하지만 나는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았고, 그래서 바닥을 비울 때까지 먹고 또 먹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덴뿌라 찌개를 눈앞에 두고도 거부한 적이 딱 한 번 있다. 아주 가끔씩 그날의 일들이 퍼즐의 한 피스처럼 조각조각 떠오른다. 그럴 때면 나는 두드러기처럼 돋아나는 부끄러움과 미안함에 어쩔 줄을 모른다.
엄마는 내 가장 오랜 기억 속에서부터 이중 노동자로 살았다. 두 해에 걸쳐 연이어 형과 나를 낳은 잠깐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쉬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 기간조차 출산 즈음에만 몸을 돌봤다고 했다. 결코 호황을 경험하지 못한 아버지의 공장을 함께 운영하느라 바빴던 탓이었다. 엄마는 공장 사무에서부터 제품 포장과 불량 선별 따위는 물론, 적을 땐 두어 명 많을 땐 네다섯 명 공장 직원들의 점심식사를 15년 이상 책임졌다. 그다지 주량이 센 것 같지도 않건만 일주일에 두세 번씩 지나친 과음으로 다음날 종일 술병을 앓느라 출근하지 않는 아버지와 달리, 엄마는 아주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늘 공장을 지키느라 짬이 없었다. 술주정이 심했던 아버지가 전날 취해 저지른 실수를 수습하거나, 돈을 빌리거나, 혹은 수금 온 거래처 직원에게 사정하며 그냥 되돌려 보내야 하는 모든 일을 엄마가 거의 도맡다시피 했다. 그런 날이면 아버지는 공장 사무실이 아니라 우리 집 이불 속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엄마는 항상 고단해 보였고 늘 가난했고 걱정거리가 많았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남편에게, 혼자서만 아등바등 버티는 현실에게 자주 상처 받았다. 때로는 속상한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끝내 목 놓아 우는 날도 많았다.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엄마가 불행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더구나 나는 엄마보다 나 자신을 더 사랑했으므로, 가끔은 내 욕망과 분을 이기지 못하고 엄마를 괴롭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엄마는 나를 “딸 같은 막내아들”이라고 사람들 앞에서 칭찬했다. 그 칭찬은 나를 옥죄기도 들뜨게도 했다.
“엄마는 죽는 게 안 무서워?” 죽음의 공포를 인식하기 시작한 열 살 무렵 엄마에게 물은 적이 있다. “아니. 하나도 안 무서워. 엄마는 인생이 너무 긴 게 싫어.” 그 나이쯤 되면 죽는 게 무섭지 않다는 말이 듣고 싶어 한 질문이었지만, 슬픈 표정에서 나온 엄마의 답변은 오히려 나를 더욱 두렵게 했다. 어쩌면 엄마는 나와 함께 사는 것보다 죽는 걸 더 바라는지도 모른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돌아보니 그때 엄마는 채 마흔 살도 되지 않은 나이였다.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우리는 또 다시 이사를 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 합해 열 번도 훨씬 넘게 이사를 다녔지만, 그때 살게 된 집은 가장 형편없는 곳 중 하나였다. 좁디좁은 방 다섯 개가 붙어 있는 개량식 한옥에 집주인을 포함해 세 세대가 함께 살았다. 우리는 문간방과 바로 옆방까지 두세 명만 누워도 꽉 찰 정도로 작은 방 두 칸을 얻었다. 1년 넘게 산 기간 동안 특별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지내기가 몹시 불편했다는 것. 어느 순간 불편에 익숙해졌다는 것. 무감해지고 무덤덤해졌다는 것. 인생의 빤한 진리를 체득하는 평범한 시간들이었다.
엄마는 걸어서 15분 거리의 공장과 집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갔다. 통장이나 도장, 서류 따위를 챙기는 심부름으로, 급한 외출을 준비하기 위해, 유난히 허기를 참지 못하는 나와 형의 끼니를 챙기느라고, 간혹은 숙취로 누워 있는 아버지를 살피거나 돌봐야 해서도. 엄마는 가뜩이나 작은 사람이 무슨 축지법이라도 쓰는지 걸음이 무척이나 빨랐다. 땀이 많은 체질 탓에 여름에 들면 이마와 인중에 맺히는 땀을 닦아내기 위해 수건을 어깨에 두르고 다니곤 했다. 나는 가끔, 엄마는 언제부터 잰걸음으로만 살았을까 궁금해지곤 했다. 하지만 그 질문만큼은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말 속에 어쩐지 엄마에게 상처를 줄 날카로운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던 까닭이었다.
그해 여름방학, 우리 집에는 나와 동갑인 외사촌 C가 와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C가 우리 집에 놀러오겠다는 말을 전했을 때 엄마는 비좁고 옹색한 집에 조카가 머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우리 형제가 일주일 넘게 그 집에 다녀온 뒤였으므로 거절하지 못했다.
C와 우리 형제는 만화책을 빌려 보거나 1점에 10원 내기 화투를 치거나 전자오락실을 들락날락거리며 며칠을 보냈다. 엄마는 저녁마다 고기와 생선을 구워 주기도 하고 외식을 시켜주기도 했다. 문제는 점심 식사였다. 우리는 알아서 차려 먹을 줄도 치울 줄도 모르는 ‘사내 녀석들’이었고, 엄마는 늘 그렇듯 출근 전에 점심상을 차려놓고 나갔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왜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너무 고단한 탓에 늑장을 부렸는지도, 우리가 어디로 놀러 간다고 스케줄을 착각해 마음을 놓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뒤늦게 아차 했고, 점심 때 집에 오겠노라 했다.
엄마는 공장 형들의 점심식사 준비를 마칠 시간인 12시가 훨씬 지나도록, 그들이 먹고 난 상을 깨끗이 치우고도 남았을 1시가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사실 그때까지 우리는 엄마가 언제 올 것인지, 점심식사로 무엇을 먹을 것인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런 건 모두 엄마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우리는 그저 전날과 다름없이 놀고 뒹굴고 졸고 떠들었다. 엄마가 늦고 있다는 사실에 신경을 쓰게 된 건, 그러니까 엄마를 기다리게 된 건 배가 고파지면서부터였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대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슬슬 짜증이 났다. 갈수록 배가 고팠고, 얼른 허기를 채우고 싶었고, 그래서 무엇보다 엄마가 필요했다. 그런데 엄마는 얼마나 바쁘고 중요한 일을 하고 있기에 우리들의 끼니를 잊은 걸까. 그냥 돈을 모아 빵을 사먹자는 C의 제안을, 우리가 공장 쪽으로 가보는 게 어떠냐는 형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유난히 성질을 부리는 내게 형은 화를 냈다. C는 눈치를 살피며 딴청을 피웠다. 그렇게 냉랭한 기운이 방안을 가득 채웠을 때에야 엄마는 허둥지둥 집 문턱을 넘었다. 2시가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엄마는 미안해하며 서둘러 부엌에 들어가 음식을 준비했다. 그러면서도 왔다 갔다 하며 일부러 말을 걸기도 하고 농담 삼아 늦은 자신을 자책하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들을 달래주고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밥상도 금세 차려졌다. 그때 엄마가 만들어 내놓은 음식은 덴뿌라 찌개였다.
하지만 왜 그런지 나는 좀처럼 짜증이 가라앉지 않았다. 엄마가 지금보다 좀 더 미안해해야 한다고, 그냥 이대로 넘어가면 내가 엄마 때문에 배고파 힘들었던 게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과 C가 식사를 시작했음에도 나는 수저를 들지 않았다. 밥을 먹지 않는 것, 그래서 엄마가 괴로워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저항이기 때문이었다.
과연 엄마는 내가 밥을 먹지 않는 것을 속상해했다. 앞으로 안 늦을 테니 엄마 덜 미안하게 어서 밥을 먹으라고 나를 달래고 얼렸다. 그럼에도 내가 끝까지 밥상을 거부한 채 아예 등을 돌리고 누워 버리자,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공장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엄마가 집을 떠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일어났다. 밥그릇과 찌개 냄비는 말끔히 비워져 있었다. 바닥난 밥상을 바라보자 후회가 밀려왔다.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내 몫을 남겨두지 않은 형과 C가 얄밉게 느껴지기도 하고, 괜한 심술을 부리느라 덴뿌라 찌개를 먹지 못한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 그날 내가 자책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점심식사를 놓친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다. 엄마 역시 점심식사를 걸렀던 것이다. 엄마가 식사를 거른 것이 입맛이 없어서인지, 내 심술 탓인지,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 모든 이유가 다 더해진 이유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무려나 나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았지만, 왠지 말을 꺼내기가 부끄럽고 창피해 끝내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런 아들이었다.
어묵찌개는 무를 넣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조리 요령이 조금 달라진다. 무를 포함시킬 때는 사각 모양으로 썰어 넣은 무와 물을 붓고 끓이다가 무가 익을 즈음 양파 1/4개와 역시 사각으로 자른 서너 장의 어묵을 넣고 함께 끓인다. 반면 무가 없을 경우 다시마를 넣고 끓이다가 건져낸 후 양파와 호박, 어묵을 넣으면 된다. 이어 어묵이 충분히 익은 후 고춧가루 한 숟갈과 소금 1/4 숟갈을 넣고 파를 첨가하면 완성된다. 조미료를 적극 사용하던 엄마와 달리 나는 사용하지 않지만 어묵 찌개만큼은 ‘엄마 맛’에 별 문제가 없다. 어묵에 이미 조미료가 첨가되어 있기 때문에 간만 맞으면 충분히 감칠맛이 살기 때문이다.
어묵과 무, 호박 따위만 젓가락으로 집어먹는 아내, 그리고 국을 따로 먹는 딸과 달리 나는 어묵찌개에 밥을 말아 먹는 것을 즐긴다. 폭신하게 잘 익은 무를 숭덩숭덩 쪼개 어묵과 함께 한 숟갈을 입에 넣으면 부서지고 씹히는 다양한 식감이 재미있다. 어묵찌개에는 조미김을 얹어 먹으면 더욱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