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장아찌
아내와 나는 결혼 후 7년 만에 아이를 가졌다. 내가 결혼 전부터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밝혔고 아내 역시 선선히 동의해 주었는데, 3~4년차를 즈음해 아이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한 1년 정도 논쟁을 거듭하다 결국 아이를 갖기로 뜻을 모았다. 하지만 왜 그런지 우리에게는 좀처럼 기다리는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주변에서 임신 소식이 들릴 때마다 아내는 부러워하고 당혹해하다가 결국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아다니며 온갖 노력과 시도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아내 뱃속에 작은 생명이 꿈틀거린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많은 분들에게 소식을 전했고 축복을 받았다. 아내가 앞 다투어 소식을 전한 이 가운데 한 분이 바로 아내의 외할머니였다.
아내는 외할머니와 매우 각별한 사이여서, 나는 결혼 전부터 얘기도 많이 듣고 자주 뵙기도 했다. 서울 성북구가 고향인 아내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폐렴을 앓게 되어 곧바로 인천으로 옮겨져 외할머니 손에 자랐다고 했다. 뒤늦게 아내가 외할머니 손에 자란 기간이 불과 3~4년이라는 것을 알고 의아해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서너 살까지면 기억도 잘 나지 않는 나이 아냐?” 물으면서.
아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니가 둘째를 갖고 아예 인천으로 이사 오면서 아내는 집보다 외할머니 댁에 더 자주 머물렀다고 했다. “유치원 때부터 하교하면 집이 아니라 외할머니한테 가 있었어. 그때 외할머니가 식당을 했는데, 나는 주방에서 온갖 참견을 하고 본채에 들어가 저녁까지 먹고서야 집에 돌아가곤 했지.”
아내를 더 잘 알고 깊이 이해하면서 외할머니에 대한 각별한 감정의 기원도 헤아릴 수 있었다. 딸 셋 가운데 첫째였던 아내에게 늘 ‘맏이’의 책임감을 부여하는 부모님과 달리, 온전히 예쁘고 귀한 손녀로 대하는 외할머니에게 더 많은 애정을 느끼고 위안을 얻었으리라. 그래서였을 것이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힘들고 지치고, 그래서 쉴 곳이 필요할 때면 아내는 늘 외할머니를 찾았다.
아내는 임신 후 많은 변화를 겪었다. 드라마에서 임신의 표상처럼 연출되곤 하는 입덧은 다행히 없었다. 오히려 먹고 싶은 것이 늘고 시시각각 바뀌었다. 문제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때는 더욱 유난스럽게 바깥 음식을 싫어했다는 것이다. 임신을 핑계로 시원하게 좋은 음식들을 찾아 먹고, 덕분에 나도 덩달아 포식과 과식을 거듭하면 좋았으련만, 아내는 철저하게 집밥 만을 고집했다. 직전 해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일하느라 주로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았던 나는 아내가 퇴근 직전 전화로 불러주는 메뉴들을 준비하느라 진땀을 빼곤 했다. 지금의 내 요리 실력은 그때 다진 초석 덕분이 아닌가 싶다.
의사로부터 조산기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주의를 들은 건 임신 5개월 즈음이었다. 당시에는 둘 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한 달 후 다시 병원에 방문했을 때는 제법 심각해져 있었다. 의사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을 벗어났으며 매우 위태로우니 당장 앰뷸런스를 불러 큰 병원으로 옮길 것을 권유했다. 우리는 의사의 소견서를 들고 근처 대학병원으로 가서 아무런 채비도 없이 곧바로 입원 수속을 밟아야 했다.
이후 긴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간혹 태아의 성장을 촉진시키기 위한 링거를 맞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처방은 배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 누워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아내로서는 여간 지루하고 답답한 생활이 아닐 수 없었다. 아내는 갑작스러운 생활의 변화를 견디지 못했다. 일을 마치고 병원에 도착하면 부른 배를 감싼 채로 울고 있는 아내를 발견하곤 했다. 이 좋은 날, 병원에 누워 있는 게 억울하고 답답하다며 짜증을 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두 달 가까이 보내고서야,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고 난 뒤에야, 아내는 겨우 퇴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짧은 휴가에 가까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증상은 악화되었고, 겁이 난 아내가 자진해서 병원에 가자는 말을 했다. 두 번째 병원 생활은 딸이 태어나고서야 끝이 났다. 병원에 입원한 아내는 상태가 매우 위험하다는 진단을 받고 격리실로 옮겨졌고, 그래서 하루 두 번 그것도 오후 8시까지만 면회가 허용되었고, 태아의 장기 발달을 촉진시킨다는 값 비싼 링거를 맞고 또 맞아야 했다.
이른 면회를 마치고 돌아온 날이었다. 집에 도착해 옷을 갈아입을 겨를도 없이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외할머니가 근처에 와 있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병원을 못 찾는 것 같으니 어서 모시고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우선 아내가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낯선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 할머니가 부탁해 잠시 전화기를 빌려줬을 뿐 어디로 가셨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서둘러 병원에 주차한 후 전화기를 빌려주었다는 곳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되돌아오기를 반복한 끝에 외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전화도 없이, 길도 잘 모르면서, 무작정 인천에서 서울 노원구까지 전철을 타고 오신 거였다.
외할머니와 아내는 한 시간 가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아내는 인천에 사는 친척들의 안부를 묻고 최근에 벌어진 일들을 일러바치고 옛날 추억들을 떠올리며 오래 묻어두었던 어리광을 마음껏 부렸다. 나는 밖에서 열린 문틈으로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는 게 여간 흐뭇하지 않았다.
그날은 밤도 참 길었다. 외할머니를 모셔다 드리고 돌아온 자정 너머, 나는 아내로부터 다시 전화를 받았다. 하혈이 심한데 간호사에게 얘기해도 별 반응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 병원으로 되돌아가 면회가 안 된다는 간호사를 뿌리치고 병실에 들어가 의사를 불렀다. 내 난동에 호출된 의사는 아내의 상태를 보고는 깜짝 놀라 긴급하게 수술실을 열었다. 새벽 두 시 팔 분. 딸은 그렇게 태어났다.
우리가 결혼한 후부터 외할머니는 김장철만 되면 아내를 위해 김치 통을 보내왔다. 그 안에는 김장김치가 아니라 무채장아찌, 그러니까 쉽게 말해 김치 소만 한 가득 들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외할머니의 무채장아찌를 좋아했다는 아내는, 다용도실에 김치 통을 두고 겨울 내내 아껴가며 그 맛을 즐겼다. 첫 맛부터 맵고 짜고 새콤했던 무채장아찌는 익어갈수록 더욱 진해지고 깊어지면서 변화무쌍한 맛으로 우리를 중독시켰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내는 겨울이면 간혹 무채장아찌 얘기를 꺼내곤 했다. 그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조차 짧은 시간 만에 매료되었던 맛을 아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싶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괄목할 만한 요리 내공을 쌓게 된 나는 몇 번이나 무채장아찌에 도전했다가 실패를 맛보았다. 너무 싱거워, 뭔가 부족해, 식감이 달라…. 아내는 젓가락질을 하며 미진한 맛에 아쉬움을 토로했다. 때로 다음에는 이렇게 저렇게 시도해보라고 팁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실패와 도전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나는 아내가 기억하는 무채장아찌를 만들 수 있었다. 물론 감히 100% 맛을 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래, 이런 맛이었지!” 하는 정도까지는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맛의 비결은, 과연 양념에 있었다. 지나치다 싶게, 넘치는 거 아닌가 싶게, 아끼지 않고, 걸쭉하고 찐한 양념을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열쇠였다.
내가 만드는 무채장아찌는 이렇다. 무 두 개를 채썬 후 한 줌 소금으로 절인다. 나는 15~20분 정도 있다가 절인 무의 물기를 심하다 싶을 정도로 최대한 짜는데, 아삭한 식감이 좋기 때문이다. 양념으로는 김장용 고춧가루 2컵, 매운 고춧가루 1컵에, 새우젓 1컵 반과 액젓 2/3컵, 매실청 1/2컵, 설탕 2/3컵, 다진 마늘 1/2컵, 풀죽이나 찬밥 1공기를 갈아 섞어 준비한다. 풀죽 대신 찬밥을 쓸 때는 물에 충분히 불려야 밥알 입자가 보이지 않게 잘 갈린다. 여기에 양파 1개, 대파 1~2대를 무채 길이로 썰어 한 데 버무리면 완성. 무채의 물기를 심하게 짰기 때문에 나중에도 맛의 변화가 크게 차이 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처음 먹었을 때 조금 짜다 싶을 정도로 간하면 나중에 익은 후 더욱 절묘한 맛을 즐길 수 있다.
만족할 정도의 무채장아찌를 만들었던 첫 날, 아내는 “오! 비슷해!”하며 감탄해 주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를 뿌듯하게 해준 말이 있다. 이삼 일 후였던가. 맨밥에 무채장아찌를 얹어 먹던 아내가 혼잣말처럼 읊조리던 “아, 외할머니 생각난다.”던 말. 음식이 불러내는 추억과 향수, 그보다 진한 맛의 힘은 없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