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
1970년대 초반에 태어난 내 또래 남자들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나에게는 10대 초반 일상생활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몇 가지 관심사가 있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영화와 야구를 들 수 있겠다.
젊은 시절부터 영화 감상이 음주 외에 유일한 취미였던 아버지 덕분에, 나는 기억이 존재하는 때부터 ‘토요 명화’와 ‘주말의 명화’, 그리고 ‘명화 극장’을 거의 빼놓지 않고 보았다. 특히 토요일에 7번 채널인 KBS 2방송의 ‘토요 명화’를 볼 것인지, 아니면 11번 채널인 MBC의 ‘주말의 명화’를 볼 것인지는 한 주의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아버지는 과거 극장에서 관람한 기억이나 주연 배우의 명성, 혹은 장르를 기준으로 채널을 선택하곤 했는데, 주로 서부 영화와 전쟁 영화가 일 순위였다.
이 가운데 나는 유난히 서부 영화를 좋아했다. 광활한 들판에 먼지를 휘날리며 말을 타고 달리는 사나이들. 매끈하게 굴곡을 이룬 챙 모자를 쓰고,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다소 불편하고 무거워 보이는 망토를 두르고, (사실은 이게 결정적인데) 허리에 찬 권총으로 서슴없이 악당들을 물리치는, 그러니까 늘 상대의 총알은 거뜬히 피하면서도 단 한 방의 총알로 상대를 명중시켜 언제나 승리하는 모습이 여간 매혹적이지 않았다.
헨리 폰다, 존 웨인, 게리 쿠퍼, 버트 랭카스터, 찰스 브론슨, 제임스 코번, 커크 더글러스, 폴 뉴먼, 로버트 레드포드, 그리고 특히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테렌스 힐까지. 나는 제작된 순서나 타입, 또는 역사적 배경 등에 대한 아무런 이해 없이 닥치는 대로 영화 속에 빠져들었다. 덕분에 언제나 주인공은 승리한다는 할리우드식 서사, 자신의 이익과 자존심을 이유로 서슴없이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탐욕과 잔혹성, 인디언이나 여성 등 백인 남성이 아닌 존재에 대한 비하와 혐오 따위를 의심과 여과 없이 받아들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전형적인 남성주의자이자 미국, 보다 구체적으로는 백인 사대주의자로 성장하고 있었다.
서부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주인공이 허름한 식당에 들어서거나 사막 어딘가에서 야영을 하며 음식을 먹는 장면에서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핵심은 바로 음식이었다. 총잡이들은 팬이나 깡통에 무언가를 걸쭉하고 되직하게 끓여 숟가락으로 떠먹기도 하고 빵을 찢어 찍어먹거나 했는데, 음식의 이름이 무엇인지 또 어떤 맛일지가 궁금했다.
걸쭉한 국물에 가려진 내용물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눈으로 대충 확인할 수 있는 건 감자나 당근, 콩 정도였다. 그런데 한눈에 보아도 폭신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게 그간 내가 맛본 감자나 당근, 콩과는 도무지 같은 맛이 아닐 것만 같았다. 콩을 끓여 먹는다고? 이전까지 콩밥과 콩자반 외의 콩을 먹어본 적이 없는 나는 걸쭉한 국물에 끓인 콩 맛을 도무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영화에 등장한 메뉴의 이름이 스튜이며, 종류가 소스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는 건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엄마가 해준 카레를 먹다가 문득, 어쩌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음식이 이와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까지 엄마가 종종 해주었던 카레는 항상 밥에 비벼 먹었기에 한 번도 서양식 같은 인상을 받지 않던 터였다. 그런데 그 날만큼은 여기에 밥만 빼면 왠지 외국 맛이 날 것도 같았던 것이다.
며칠 후 주방을 살피다가 식은 카레가 담긴 냄비를 발견했다. 나는 당장 엄마에게 카레를 먹어도 되는지 물었다. 엄마는 밥이 없으니 얼른 안치겠다고 했지만 나는 카레만 먹어도 된다고 우겼다. “밥도 없이? 짠 걸?” 했지만 바쁜 엄마는 선선히 허락했다. 나는 숟가락으로 카레를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카레 특유의 짜고 달콤한 느낌이 입 안 가득 맴돌았다. 맛이 좋았다. 나는 카레를 떠먹으며, 마치 내가 황야에 와 있는 듯한, 비록 챙 모자를 쓰지도 총을 차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서부 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다음에는 식빵을 찍어 먹어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야구는 내가 처음 사랑한 스포츠이자 평생 사랑하는 스포츠다. 아주 어릴 때부터 동네 형들과 ‘세미’ 야구인 ‘찜뽕’과 발야구 놀이를 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은 매주 사회인 야구를 열심히 하고 있다.
아홉 살 무렵부터는 당시 최고 인기 스포츠였던 고교 야구에 흠뻑 빠졌다. TV에서 해주는 야구란 야구는 대학, 실업 야구까지 모조리 챙겨 보았다. 당시 서울운동장이었던 동대문운동장과 이후 새롭게 문을 연 잠실야구장을 수시로 드나들었으며, 거의 모든 선수의 이름을 외울 수 있었다. 이 가운데 특히 좋아하는 선수가 있었으니, 단연 이만수 선수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나중에야 군부 독재 정부가 조장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당시에는 사방천지 온 관심사가 ‘프로야구’일 정도로 분위기가 들썩들썩했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서울 출신인 가족 모두 ‘MBC 청룡’을 응원했지만, 나는 홀로 ‘삼성 라이온즈’ 팬이 되기로 결심했다. 이유는 단 하나. 이만수 선수가 삼성 라이온즈 소속이었기 때문이었다.
주변 남자 어린이들은 너도나도 연 회비 5,000원에 ‘프로야구 어린이 회원’이 되어 야구 모자를 쓰고 점퍼를 입기 시작했다. 나 역시 신문광고를 보자마자 프로야구 어린이 회원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식구들 가운데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무섭고 무관심한 사람이었고, 엄마는 ‘먹고사니즘’에 치여 내 결심을 실현시켜 줄 겨를이 없었다.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선착순 일부에게만 조금 더 혜택을 부여한 정회원은 고사하고, 때를 놓쳐 일반 회원조차 되지 못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들었다.
나는 틈 날 때마다 징징거리며 엄마를 괴롭혔다. 이틀 밖에 안 남았다고 소리 지르고 울음을 터뜨렸을 때에야 비로소 엄마는 짜증을 내며 회원 가입을 도와줬다. 증명사진이 없다며 입술을 잔뜩 내밀고 툴툴거리는 나를 앞에 두고 앨범에서 아무 사진을 골라 얼굴 부분만 가위로 오려내던 엄마 얼굴이 기억난다. “너는 엄마보다 이만수가 더 좋냐?”고 했던 말도.
다음날 거래처 방문을 위해 시내에 나가는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가 긴 줄을 기다려 접수를 끝내고 집에 돌아왔다. 마침내, 그리고 다행히 삼성 라이온즈 어린이 회원이 된 것이다. 그날 저녁 밥상 위에 올라온 메인 메뉴가 또 다시 카레였다. 나는 대접 위에 밥을 한가득 푸고 몇 번이나 국자로 카레를 담아 맛있게 비벼 먹었다.
그날이 카레를 밥 없이 떠먹으며 서부 기분을 만끽한 다음이었는지, 아니면 그 전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몇 해 전 어느 웹진 의뢰로 이만수 감독을 인터뷰했다. 촬영에 앞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준비해간 야구공으로 사인도 받고, 내 스윙을 보여드린 후 원 포인트 레슨도 받고, 사진도 함께 찍었다. 대학생 시절 마지막으로 야구장에 관람 갔을 때도 목청껏 ‘이만수’를 연호했는데, 실제로 만나니까 느낌이 남달랐다.
인터뷰가 성사된 이후 자주 엄마 생각이 났다. 그렇게 살가운 아들은 아니었지만, 만약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아마도 나는 인터뷰 당일 아침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을 것 같다. 이만수를 만난다고. 인터뷰를 끝마치고 나서는 감독님과 함께 찍은 사진도 보냈을 것이다. 엄마는 스마트폰도 쓰지 않고 노안도 심해 잘 보지 못했을 테지만, 아마도 나만큼 신난 목소리로 칭찬해 주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런 척이라도 했을 것이 분명하다. 엄마는 나를 위해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만수 감독을 만나고 나서, 엄마가 나를 아주 오래 전부터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막연히 떠올랐다. 한동안 머리와 가슴을 어지럽히는 묘한 감정을 털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카레는 조리하기에 세상 쉬운 음식이다. 감자와 양파, 당근과 브로콜리, 버섯 등을 넣고 볶다가 카레와 물을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된다. 나는 특히 고기를 먹지 않기 시작하면서부터 카레를 더욱 자주 먹곤 한다.
카레를 끓일 때 굳이 유의사항을 꼽는다면 감자를 얼마나 잘 익히는가 하는 것이다. 감자는 볶는 방법만으로는 결코 쉽게 익지 않기 때문이다. 감자를 잘 익게 하려면 적당히 볶은 후 물을 많이 붓고 익을 때까지 한참 동안 카레를 끓이거나, 아니면 감자를 최대한 얇고 작게 썰어 조리해야 한다. 하지만 전자는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리고 다른 재료가 너무 흐물흐물해지는 단점이 있고, 후자는 모양도 식감도 떨어진다.
나는 조금 손이 가더라도 전자레인지나 압력솥으로 감자를 먼저 찐 다음 볶는다. 그러면 조리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고, 다른 재료인 양파와 당근, 브로콜리 등의 조금은 단단한 식감도 살릴 수 있게 된다.
가끔은 삶은 계란 한 알을 카레와 섞어 먹기도 하는데, 이 또한 소소한 별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