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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우 May 01. 2022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신당동 떡볶이

즉석 떡볶이

1987년 3월 2일을 기억한다.


과거 신문을 살펴보니 그날 정부는 기존 노인부양 소득공제 금액을 기존 연 24만원에서 36만원으로 대폭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독재자 전두환은 학생중앙군사학교에서 거행된 ROCT 임관식에 참석해 ‘국권 수호 소명 완수’를 역설했다. 경찰은 다음날인 3월 3일에 있을 故박종철 열사 49재 추도회 겸 3·3민주화국민평화대행진을 불법 시위로 규정하고 원천 봉쇄하겠노라고 엄포를 놓았다. 체육계에서는 미도파 여자 배구단이 태광산업을 세트 스코어 3대0으로 꺾고 대통령배 배구대회 결승에 진출했다.


이러한 세상사와 무관하게 그날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그날을 기억하는 이유는 신당동 떡볶이를 처음으로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충격이었다.

그날 싱거운 입학식을 마치고 엄마와 함께 신당동 떡볶이촌으로 향했다. 내가 입학한 고등학교에서 떡볶이촌까지는 버스로 불과 서너 정거장. 걷는다 해도 20분이면 충분히 도착하고도 남을 거리였다.


며칠 전부터 신당동 떡볶이를 먹는다는 생각에 잠을 설쳤다. 2년 먼저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한 형으로부터 종종 그 명성에 대해 익히 듣고 있던 터였다. 평소 말수도 적고 무뚝뚝한 형은 신당동 떡볶이에 대해서만큼은 진심을 담아 말을 얹곤 했다. 나도 먹어보고 싶다는 말에 엄마가 사오라고 한 적이 있지만, 야박한 형은 포장이 안 된다며 단칼에 거절했다. 나는 그 말이 사실인 줄 알았고, 이후 까맣게 잊어 버렸다.       


떡볶이촌으로 향하는 길에는 우리 말고도 일행이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1년 내내 단짝으로 지냈던 J와 그의 엄마. 여기까지는 괜찮았는데, 또 다른 한 모자가 합류해 나를 조금 위축시켰다. J의 친구와 그 엄마인지, J 엄마의 친구와 그 아들인지 지금으로선 도무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이들이었다.


즉석 떡볶이에서 떡은 바지에 가깝다. 관건은 양배추를 바닥에 꽉꽉 채우고 기름기와 물기 뺀 어묵도 푸짐하게 넣는 것이다.


아무려나 이렇게 아들 셋, 엄마 셋은 둥근 테이블 주위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잠시 엄마들 사이에서 괜히 남기지 않게 5인분을 시킬지 넉넉하게 6인분을 시킬지 의견이 분분했지만, 다행히 엄마의 활약으로 6인분에 라면 사리도 추가할 수 있었다. 한참 먹을 나이 애들인데 사람 수만큼은 시켜야죠. 더구나 우리 애도 있는데….


곧이어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갖은 재료를 산처럼 수북하게 쌓아올린 널찍한 철판이 등장했다. 조리되지 않은 속살 그대로의 재료. 곧 있을 변화를 예측할 수 있게 하는 검붉은 양념. 지금까지 먹어본 것과는 형태도 색깔도 다른, 그런 까닭에 맛조차 쉽게 예측할 수 없는 떡볶이를 영접하는 일은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 그리고 마침내 조리가 되어 보글보글 끓고 있는 떡볶이의 맛은, 가히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고추장 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으면서 달고 짠 기운이 적절히 느껴지는 양념의 균형감은 물론이거니와, 어느덧 쫄깃해진 떡과 함께 씹히는 양배추의 달콤한 식감, 거기에 양념이 한껏 베인 어묵과 만두, 심지어 늘 먹던 것이지만 왠지 양념 덕분에 뭔가 다르게 느껴지는 퍽퍽한 삶은 계란까지. 나는 뜨거워 입천장이 벗겨지는 것도 모른 채, 낯선 사람이 두 명이나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엄마들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저 열심히 떡볶이를 먹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우리 아들은 여기에 밥 한 공기 비벼 먹으면 좋을 텐데.”

철판 위의 음식을 찌꺼기 하나 없이 말끔히 비우고 포크를 내려놓자 엄마가 한 말이었다. 떡볶이에 대한 나의 공격적인 자세가 민망해서 그랬는지, 혹은 귀여워서 그랬는지 뉘앙스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갑자기 부끄러움이 느껴져 얼굴이 빨개졌다. 혼자 유난히 너무 많이 먹은 것을 그제야 깨닫고는.      


아, 얼마나 푸짐한가!


그것이 신당동 떡볶이와의 첫 만남이었다. 이후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떡볶이촌을 찾았다. 가끔은 친구들과 몰려가 DJ 형의 오글거리는 멘트를 흉내 내거나 인근 여자 고등학교 학생들을 곁눈질하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토요일 4교시를 마치고 하굣길에 혼자 방문해 ‘포장’해오는 걸 더 즐겼다. 처음 방문했을 때부터 떡볶이촌의 모든 매장 입구와 실내 곳곳에 붙어 있는 ‘포장 됩니다’라는 문구를 확인한 바였다. 형이라고 그 문구를 읽지 못했을 리는 없었을 것이었다.


“2인분을 1인분씩 따로 포장해 주세요. 양념은 많이 주시고요.”

나는 주말 내내 먹고 싶은 생각에 항상 이렇게 주문하곤 했다. 양념을 많이 요구한 것은 이런 저런 사리를 추가하고 싶은 이유였다. 단단한 비닐봉지 두 개를 손에 쥐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는 가슴은 언제나 설렘으로 부풀어 올랐다. 한 번은 무리하게 가방에 구겨 넣었다가 양념이 터져 곤란을 겪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떡볶이를 끓일 때는 형도 즐거워했다. 내가 떡볶이를 사오는 날은 형과 제법 긴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가끔씩은 라면 사리를 두 개나 넣었다가 맛이 떨어진다고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말이다.      

계란과 만두는 거들 뿐.


3학년에 올라가고 나서는 오히려 떡볶이촌을 더 자주 드나들었다. 지금까지 30년 넘게 어울리고 있는 D와 K가 언제나 함께였다.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우리들은 3학년이 되어 다른 반으로 뿔뿔이 흩어졌지만, 신당동 떡볶이촌이 있었기에 여전히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전까지 친구 관계에 항상 어려움을 겪었던 나는 어느 순간 D와 K와는 왠지 오래 갈 것 같은 확신을 가졌는데, 아마도 신당동 떡볶이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는 종종 떡볶이를 안주삼아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유명하다는 ‘원조’와 ‘맛집’들을 마다하고 다락방이 있는 이모네만 주구장창 다닌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모네 떡볶이 집의 딸인지 직원이었는지 우리가 ‘누나’라고 부르던 분은 굳이 넓은 1층을 놔두고 다락방으로 기어 올라가는 우리를 말리지 않았고, 가방에서 꺼내는 맥주를 눈감아 주었고, 항상 재떨이를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때론 웃고 때론 진지한 대화를 나누며 긴 시간을 머물렀다. 곧 성인이 되어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서 앞날이 막연하기도 설레기도 했지만, 다른 건 모르겠고 떡볶이가 언제나 맛있었다는 기억만큼은 생생하다.      


고등학교 시절 이후 신당동 떡볶이촌은 10년에 한 번 방문할까 말까 한 곳으로 바뀌었다. 어쩌다 근처에 갔다가 짬이 나면 식구들을 위해 포장해 오는 정도가 전부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떡볶이촌이라는 촌스러운 이름이 사라진 대신 떡볶이 타운이라는 어색한 영어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가평으로 이사 온 이후로는 더 이상 우연히 방문하는 일도 생기지 않았다.     


집에서 즉석 떡볶이를 조리할 땐, 라면사리를 따로 익힌 뒤 섞어야 물 조절이 쉽다.


가끔씩 신당동 떡볶이를 만들어 먹곤 한다. 당연히 그 맛을 낼 수는 없다. 1996년 해찬들 고추장 CF에 출연한 신당동 떡볶이의 원조 마봉림 할머니가 밝혔듯, 며느리도 모르는 맛의 비밀을 감히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다만 다행스럽게도 ‘즉석’ 떡볶이 맛 정도는 충분히 구현해낼 수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즉석 떡볶이에서 떡의 역할은 그다지 크지 않다. <맛있는 녀석들> 김준현의 표현을 빌리자면, ‘바지’에 가깝다. 맛의 팔 할은 양배추와 어묵, 그리고 양념이 책임진다. 떡볶이용 떡에 양배추 1/4개를 채 썰고, 뜨거운 물에 한 번 행군 기름을 뺀 얇은 어묵을 푸짐하게 준비한다. 양배추 때문에 부피가 커지는 것에 당황할 필요는 없다. 익으면서 가라앉게 되니까. 대파는 1/2대를 떡 크기로 썰고 삶은 달걀과 만두도 준비하면 좋겠다.


양념을 최소 3일 이상 숙성시키면 나름 깊은 맛이 난다.


문제는 양념이다. 나는 떡볶이를 먹기 위해 양념을 만드는 게 아니라 양념이 만들어지면 떡볶이를 먹는 편이다. 가끔씩, 골아서 먹을 수 없다며 아내가 사과를 버리려 할 때가 그날이다. 골은 부분을 제외한 사과를 믹서에 간 후 간장 3숟가락, 물엿 2숟가락, 설탕 1숟가락, 다진 마늘 1숟가락 등과 함께 섞어 양념을 만든다. 여기에 고추장 크게 1숟가락과 라면 수프 1/2개를 섞어 2~3일 숙성시키면 즉석 떡볶이를, 그대로 숙성시키면 간장 불고기를 만드는 것이다. 양념은 듬뿍, 물은 2컵 반 정도면 충분하다. 양배추가 익으면서 물이 발생해 전혀 부족하지 않다. 마지막 간은 조리할 때 추가해서 맞추면 되겠다.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에 관심‘만’ 많았던 나는 한동안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이라는 시를 참 근사하게 여겼다. 특히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라는 싯구를 유난히 좋아했다. 그래서  당시에 아무 데나 “나를 키운 건 팔 할이…”라는 말을 가져다 붙이곤 했다. 예컨대 왕십리가, 성수동이, 파르페가, 돼지고기가 팔 할에 해당되었다.


돌아보니 신당동 떡볶이촌, 아니 신당동 떡볶이도 예외일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어쩌면 그 시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신당동 떡볶이였는지도 모른다.


즉석 떡볶이. 존맛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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