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만큼 물을 주지 말아라. 너무 많은 욕심은 화분을 죽인다."
며칠 전 엄마가 나에게 하신 말씀이다. 몇 년 동안 나름 열심히 꽃을 키움에도 불구하고, 꽃이 계속 죽어나간다. 투덜대듯 투정 부리는 나에게 엄마는 일러 주셨다.
문득 사람 역시 그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서울에서 사업을 다시 시작하셨고, 엄마는 작은 반지하에서 새 살림을 시작하셨다. 우리 집은 매우 가난했지만, 난 그때 내가 가난하다는 사실을 완전히 알지 못하였다. 학교에서의 첫 시작은 망쳤지만, 가족으로서의 시작은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맞벌이로 바쁘셨던 부모님은 매일 저녁 퇴근길이면 우리와 함께 먹을 음식을 사 오셨다. 어느 날은 시장 통닭, 어느 날은 삼겹살. 우리는 좁은 거실에 신문지를 깔고 옹기종기 모여 저녁을 먹었다. 그때의 가난이 꼭 불행한 것만은 아니었다.
시간이 점점 흐르고 있었다. 처음엔 혼자였던 쉬는 시간에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오는 친구도 생겼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에 대한 오해도 흐려지고 있는 것 같았다. 친한 친구들 무리가 생기기도 하였고, 난 어느새 그들과 당연한 듯 등하교를 함께 하고 있었다.
평화로웠다. 무엇하나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하루가 나에겐 가장 인상적이었다.
당시 반지하에 살 던 나는 침대 머리판을 밟고 올라가 바깥세상을 종종 구경하였다. 창문 앞엔 조그마한 베란다 같은 공간이 있었는데 시멘트로 벽을 바르고 샷시를 달아 놓은 창고 같은 곳이었다. 그 너머엔 덧마루가 있었고 동네의 어르신들은 그곳에 걸터앉아 해가 질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셨다.
심심할 틈이 없었다.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은 늘 나에게 눈인사를 건네셨다.
"엄마 아빠 기다려?"
"아가 뭐 먹었어? 이리 오너라"
할머니가 창문 안에 빼꼼한 나를 불러내신다. 궁금한 마음에 대문을 돌아 나가면 덧마루에 걸터앉아 뭐 하나 내어주신다. 어느 날은 삶은 고구마, 어느 날은 대추 평소라면 먹지 않을 것들이 그날따라 맛있다. 헝클어진 머릿결을 손 빗으로 빗어주며 '이쁘다. 곱다. 나도 너처럼 그랬다' 해 주신다. 그때마다 나는 속으로 '내가 이쁜가 보다, 고운가 보다' 했다.
정 많은 어른들은 아이혼자 세상을 지키게 하지 않으셨다. 나누고 살펴 주셨다. 그리고 해가 뉘엿뉘엿 질 때면 어느새 삼삼오오 헤어진다. 그럼 나는 우리 집 뒤편이랑 연결된 문방구에 쪼르르 들어갔다.
문방구 아저씨, 아줌마는 나를 아주 잘 아신다. 내가 맥주맛 사탕을 좋아하는 것도, 오락은 별로 안 좋아하는 것도 너무 잘 아셨다. 수중에 백 원짜리 3개만 있어도 골라가며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문방구 아줌마는 수다스럽지 않으셨다. 그저 좀 멀찍이 앉아만 계실 뿐, 뭐라 나에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 묵묵하기는 문방구 아저씨 역시 마찬가지셨다. 그저 티브이 채널만 돌리실 뿐 '뭐 하냐, 안 살 거면 나가라' 등의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았다.
무얼 먹을까, 뭘 살까 한참을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문방구는 신기한 게 가득했다. 그리고 그만큼 이쁜 것도 가득했다. 넋을 빼고 구경하다 요리조리 살피고 오늘은 딱 이백 원만 쓰기로 한다. 내일을 위해서 말이다. 적당한 간식 한 개 고르고 집으로 돌아오면 금세 엄마가 오신다. 복잡하게 꼬여있는 주택 살이는 그전에 지냈던 신축빌라보다 나았다. 나는 그때 전혀 외롭지 않았다.
저녁마다 손 빈날 없이 들어오는 부모님이 반가웠고, 문을 열고 나가면 나를 알아주는 동네 어르신들이 있어 재미있었다. 어쩔 때는 친구들이 찾아와서 같이 놀기도 했다. 나의 가난은 전혀 흠이 되지 않았다. 자주 가는 단골 정육점 아저씨는 우리 식구들이 삼겹살을 자주 먹는 것까지 모두 꿰뚫고 계셨다. 엄마 심부름으로 사러 가기라도 하면 꼭 서비스를 챙겨 주셨다. 맛있게 먹으라는 인사도 빼놓지 않으셨다.
동네 재래시장의 통닭집 아주머니는 아빠가 항상 문 닫기 전에 오는 마지막 손님이었다면서 아빠의 사랑을 나에게 들려주셨다. 그 통닭 먹는 아이가 너 였냐며 반가워하셨다. 온갖 군데에서 사랑이 넘치지 않게 차 오른다.
특별할 것 없는 이웃들의 마음이 아이의 마음에 조용히 모인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그 나이의 어른이 되어서야 그 평범했던 마음들이 사실은 아주 큰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라지 않는 일상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단단한 것인지, 그리고 내가 내 아이에게 그런 사랑을 주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귀한 일인지를 말이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아이는, 욕심 없는 사랑으로 자란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