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끄럽지만)먹는데 예민한 편이다. 지금은 그정도 아니지만 식탐이 있는 편이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라는 말을 맹신하는 편이다. 스트레스도 먹는 걸로 푸는 편이다. (참 없어보이지만)배고픈 거 잘 못견뎌 한다. 당뇨끼가 있는지 배가 너무 고프면 손이 떨려 두렵기까지 하다. 밥 안주고 일시키면 짜증는다. 일도 힘든데 배고프면 서럽다. 특히 누가 먹는 걸로 차별하면 세상 억울하고 서럽다.
대학교 3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당 5만원짜리 아르바이트를 소개받았다. 호텔 식음업장이었는데 낮에 있는 결혼식부페부터 저녁에 디너쇼 까지 하루 뛰는 일이었다. 디너쇼는 지금도 너무 유명한 1초만에 매진된다는 '나훈아 디너쇼' 였다. 결혼식 피로연장 부페식당은 그릇만 빼면 되는 단순한 일이었고, 디너쇼는 코스 서빙으로 조금은 힘이 부치는 일이었다.
당시 아르바이트 시급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2,000원이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2020년 지금은 법정최저시급이 8,590원이니 당시 최저시급을 2,000원이라고 가정하면 약 4.3배정도 뛰었다. 내가 나이가 이렇게 먹었나? 너무 옛날사람 같다. 여튼 그런 때였다. 지금 호텔 아르바이트 주말하루 일당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4.3배를 적용하면 21만원 정도 된다. 그러나 그정도 받지는 않을 것 같다. 많이 줘도 10만원 되려나? 여하튼 당시 하루일당 5만원은 시간은 차치하더라도 학생에게는 아주 큰 금액이었다. 내가 주로 하던 패스트푸드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로를 뛰면 시간당 1800원, 기본 교대시간으로 5시간 정도 근무로 하루 9천원의 시급이 쌓였으니 말이다. 그랬으니 5만원짜리 일은 허리가 부서지도록 힘든 일이었겠지 싶다.
처음으로 간 호텔 아르바이트여서 그런지 힘들긴 했지만, 전공이 관광경영학이라 배운다는 생각으로 즐겁게 일을 했다. 나란 사람은 그런 사람이다. 일단 즐겁게 일한다. 어떻게든 즐거운 구석, 장점 하나라도 찾아낸다. 어차피 해야하는 일이라면 '즐겁게 하자' 주의다.
전날에 쫙쫙 펴서 다림질한 하얀블라우스에 H라인으로 똑떨어지는 깜장스커트를 입고 (나비넥타이를 맸던가? 기억이 정확히 나지 않는다) 걸을때 마다 똑똑 예쁜 소리가 나는 반짝반짝 까만 구두신고 내가 지금 제일 예쁘다는 생각으로 생글생글 웃으며 일했다. 아 역시 서비스업은 내 천직이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결혼식 피로연장의 부페식당에서의 일을 무사히 마치고 이제 잠시 쉬는가 싶었는데 부페식당에서 사용된 스푼, 포크, 접시 등 기물들이 스튜워드(Steward 주방에서 접시, 유리잔, 식기 등을 저장, 운반, 세척하는 일을 맡은 호텔 종사원)에 의해 배달되어 졌다. 나를 비롯한 아르바이트생들은 그 기물들이 나오자마자 린넨으로 물얼룩이 생기지 않게 후다닥 닦아야했다. 스커트를 입어서 앉는것도 불편한데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기물을 닦았다. 직원들이 쉬는동안!!!
그래도 이때만해도 할만했다.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기물들을 닦아서 새것으로 셋팅하는 과정에서 상쾌함이 느껴졌다. 닦아야할 기물들이 눈앞에서 조금씩 사라지는데 왠지모를 쾌감이 느껴졌다. 기물을 닦으며 잠시 가지는 수다도 휴식이라면 휴식이었다.
기물 다음은 린넨. 테이블에 셋팅될 린넨냅킨을 접었다. 삼각형 모양이었던가? 부채 모양이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손 끝이 아팠던 기억이 남아있다. 나에게는 기물 닦는게 더 나은 작업이었다. 린넨을 접는데 왜 손끝이 아리던지... 손에 있는 수분을 린넨이 다 뺏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가내수공업 같았던 이 작업 또한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잠시의 쉴틈도 없이 대형 연회장으로 불려갔다. 이제는 디너쇼 셋팅이었다. 남자직원들이 대형 원형 테이블을 굴려서 기본 위치를 잡고나면 아르바이트 생들은 그 테이블 주위로 의자를 깔았다. 그런다음에는 테이블에 아까 닦은 기물들인 플레이트, 포크, 나이프, 글라스들을 셋팅했다. 시간이 촉박한지 여기저기서 부르는 소리, 뭔가 셋팅이 잘못됐다는 소리, 글라스랙을 들고 뛰어 다니는 직원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마지막으로는 접어놓은 린넨을 플레이스 플레이트(Place Plate, 식탁 장식용 접시)에 살포시 얹고는 셋팅을 마무리 했다.
오후 5시 였던가? 이른 저녁을 먹었다. 손님들의 저녁식사 시간에 일을 해야 하기에 호텔 직원들은 빨리 밥을 먹는다. 시간도 촉박하고 이미 많이 지친 상태라 밥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연회장으로 다시 투입. 디너쇼에 온 손님들이 자리에 착석하면 바로바로 글라스에 물을 채워드렸다. 해본적도 없는 일이라 더 힘들었다. 오른손에는 무거운 워터저그(water jug, 물주전자)를 들고 냅킨을 두른 왼팔은 허리뒤로 살포시 감추어놓고 물을 흘리지 않으며 깔끔하게 따르는게 얼마나 힘들던지(지금 호텔리어가 이 글을 읽으면 아주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배가 고파서 더 그랬나 싶기도 하다.
에피타이저, 식전빵, 앙뜨레, 디저트 등등 쭉 이어져 나가는 동안 너무 정신이 없이 일했다. 덕분인지 몸이 힘든지 모르고 일했다. 문제는 행사가 다 끝나고 난 뒤였다. 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특히 배가 너무 고팠다. 앞서 이야기하고 시작했지만 나는 먹는데 예민한 편이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라는 말을 맹신하는 편이다. 스트레스도 먹는 걸로 푸는 편이다. 무엇보다 (참 없어보이지만)배고픈 거 잘 못견뎌 한다. 당뇨끼가 있는지 배가 너무 고프면 손이 떨리고 화가난다.
이른 저녁을 먹는둥 마는둥 하고 폭풍같은 행사를 해치우고 나니(사실 아르바이트가 뭘 해치웠겠냐 만은) 다리가 후들거리고 배가 고팠다. 하지만 아르바이트생들에게 배달되어 온 것은 스튜워드 아저씨가 가져온 기물들 이었다. 다시 쪼그려 앉아 플레이트를 닦고, 글라스를 닦고, 포크를 닦고, 스푼을 닦았다. 내일 영업을 위해 랙에 차곡 차곡 쌓아서 내보냈다. 그런다음 다시 린넨이 왔다. 내일 영업장에 쓸 린넨들을 아린 손을 참아가며 접었다.
9시쯤 되었던 것 같다. 아 이제 끝났나 하면서 같이 일하러 왔던 학교친구와 나가서 떡볶이 사먹을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낮부터 우리를 인솔하던 귀엽게생기고 친절한 캡틴이 우리를 부른다. 부페식당으로 가잔다. 10시에 마감하는 부페식당에서 마지막 일을 하란다. 손님 글라스에 물 채우고, 다먹은 접시빼고 또 일했다. 배가 등에 붙은 기분이었다. 9시 40분쯤 되니 마지막 손님까지 다 빠졌다. 직원들이 쪼로록 달려가더니 남은 부페 음식을 수다를 곁들어 먹는다. "맛있겠다. 정말!" 이런 생각을 했다. 그 순간은 정말 너무 먹고 싶더라. 우리도 먹게 해 주려나? 살짝 기대했지만 언감생심 이었다. 뒷정리를 시킨다. 손님들이 다 빠져나간 자리의 접시를 주방으로 보내고 닦고... 뒷정리가 우리의 몫이었다.
배고픔이 '화'로 승화되었다. '화'로 인해 서러움이 폭발했다. 저네끼리 먹고 나는 음식물이 뭍은 접시를 치우고... 아 씨! 5만원은 이미 머리속에서 지워진지 오래였다. 오만가지 때만가지 서로움이 밀려왔다. 10시가 되니 귀엽게 생기고 친절한 캡틴님이 환하게 웃으며 퇴근하라고 한다. 수고했어라고 말을 건넨다. 하루종일 우리에게 이래저래 관심을 표해줬던 캡틴이었다. 인사도 안하고 쌩하고 와버렸다. 그 캡틴은 살짝 쫓아오며 "왜? 무슨일 있어?"라고 물었으나 배가 고파 답할 기운도 없었다. 연애하다 삐친 사람마냥 쌩 찬바람 일으키며 그냥 그길로 빠이빠이 하고 나왔다. 그리고 다시는 호텔 주말 아르바이트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파트타임잡을 거쳐 가진 내 첫 공식 직업은 호텔리어였다. 그리고 나는 지금 당시 맛나게 남은 음식을 먹던 직원들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었다. (창피하지만) 여전히 가끔은 먹는 걸로 맘상하는 일이 있다. 반대로 먹는 걸로 후배들이 맘상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 시절로 돌아가더라도 절대로 말 못하겠지만 여기에서나마 한번 외쳐본다.
어이! 선배님들! 같이 일했으면 같이 먹읍시다. 그게 사람사는 거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