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부
평소 그림을 그려보고 싶은 마음을 원동력 삼아, 인터넷을 활용해 초보자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인스타툰 그리기 강의를 들어 보았다. 책상에 앉는다는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부담스러웠는데,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앉은 책상은 서서히 편안해졌다. 강의를 천천히 들으며 내 속도에 맞춰 일시 정지와 재생을 반복하며 그림을 배웠다.
그림이라는 단어가 거창하게 느껴질 만큼, 내가 그린 캐릭터는 엉성한 인체 비율이었지만,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지는 드러났다. 빈 종이에 무언가를 형상화하며 굳어갔던 머릿속 부품을 다시 움직이도록 기름칠을 했다. 삐걱삐걱하던 생각을 술술 풀리게 말이다.
나아가 그림 안에 내 이야기도 담아 그림일기를 만들기로 했다.
그림일기를 만들며 과거의 힘들었던 일을 꺼내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속을 꺼내는 일은 참으로 괴로웠다. 다시 상기하면 숨이 막혔다. 나 자신으로부터 회피하는 일은 쉬웠지만, ‘나의 그림일기’를 만들려면 '내가 왜 그림일기를 그리는지, 내 마음이 왜 이랬는지'를 짚고 넘어가야 했다. 그래야 마음에 드는 일기가 완성될 것 같았다.
과거를 짚는 과정을 반복하여 그림일기를 쓰다 보니, ‘좀 더 빨리 알아차릴걸, 어차피 안 됐을 건데 뭐가 그리도 무서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 이 글을 다시 쓰며 그때의 일기를 보았다. 삐뚤빼뚤한 그림은 지금 보니 가관이지만, 진실한 마음을 기록해 둔 흔적은 다시 흔들릴 때마다 꺼내 볼 수 있는 기준으로 남아 있다.
더불어 그동안 해 보고 싶었던 것들을 이참에 해보기로 했다. 운동은 정말 필요하다고 느껴 동네 요가원을 다녔다.
의사 선생님은 정적인 운동도 좋지만 유산소 운동도 권했다. 그것이 교감신경을 활성화해 나의 높아진 부교감신경을 안정시킨다고 했다. 그 말을 따라 종종 숨이 찰 때까지 달린 뒤 가쁜 호흡을 내쉬며 나를 진정시켰다.
그런데 이 느낌이, 마치 내가 과호흡이 왔을 때와 비슷했다. 내가 정말 싫어했던 그 느낌을, 달리기를 하며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다. 달리기 후 가쁜 호흡을 가라앉히다 보면 어느새 평화가 찾아왔다. 그렇게 과호흡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도 서서히 친숙해졌다. 무엇보다 이제 내가 뛸 수 있는 체력이 되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그다음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전에도 재봉틀을 한 번쯤 배워보고 싶어, 원데이 수업을 들어 본 적이 있다는 걸 알고 있던 남편이 어느 날 말했다.
“괜찮은 미싱 공방을 찾았는데, 한번 같이 가볼래?”
“어?! 좋긴 한데... 망설여져...”
요가는 모르는 불특정다수가 있는 곳에서 혼자 매트 위에서 따라 하고 오면 되는 것처럼, 그동안 내가 해오던 대부분의 활동은 혼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공방을 다닌다는 건 왠지 본격적으로 선생님과 직접적인 소통을 하며 무언가를 만들어야하니, 이번에는 사람을 대면해야 한다는 점이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수강료도 부담이었다. 나에겐 여전히 부담스러운 게 천지였다.
“돈도 벌지 않는 휴직자가 공방까지 다니다니, 너무 사치를 부리는 것 같아. 자신도 없고...”
“그래도 다녀 봐. 그동안 너의 여가에 돈 써본 적, 딱히 없었잖아. 지금처럼 시간이 있을 때 해보고 싶은 걸 해봐야지”
그 말이 고마웠다. 그래, 한번 해보자.
하기 전에는 한없이 주저했지만, 막상 시작하니 이 또한 마음에 들었다. 이번에는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에서 직접 선생님의 설명을 천천히 들으며 기록했다. 그 기록을 보며 내가 직접 실을 꿰고 천을 재단하다 보면 결국 도면 그대로 옷이 나왔다. 오랜만에 일의 마무리를 내 손으로 지어 보았다. 그 성취감이 바닥을 치고 있던 나의 자존감을 조금씩 쌓아 올려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첫 번째 휴직이 종료되는 날이 다가오자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여전히 사무실을 떠올리면 무서웠다. 강제로 돌아가는 방법뿐인가 싶어 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병원에서 선뜻 6개월 더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서를 내주었다. 다행히 연장된 6개월의 목숨을 감사히 받아들였다.
이제는 휴직자의 생활도 나름 안정되었고, 내 안을 지배했던 “무언가를 해야 해”에서 벗어나 “좋아하는 것에 집중해”로 관심을 돌릴 수 있었다.
예전에 비하면 건강이 괜찮다고 느껴지니 미뤄 두었던 임신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신과 약을 먹으면서 임신을 시도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멋대로 며칠간 약을 먹지 않았다.
그러던 중 갑자기, 길을 걷는데 땅이 올록볼록 올라왔다. 마치 도수가 맞지 않는 안경을 쓴 것처럼 바라보는 모듯것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균형감각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정신을 붙잡으며 겨우 걸었다. 가만히 있어도 멀미가 났다.
“그거, 금단 증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