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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ream Apr 03. 2024

일상 여행

이렇게 살아도 되네 9편

     

 아이를 키우며 시골 마을의 사철과 함께 보낸 10년은 동갑내기 부부의 삼십 대가 고스란히 담긴 정착기였다.     

 시골에서는 멀리 가지 않아도 눈앞에서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났다. 

 봄기운이 돌면 전에 본 적 없는 들꽃들이 죽은 듯 삭막하던 땅 위를 꽃의 융단으로 어느새 뒤덮었다. 제 차례가 오면 이 때다 하며 다투듯 꽃들이 피어났다. 개불알꽃, 냉이꽃, 꽃다지, 광대나물, 씀바귀, 애기똥풀, 복숭아꽃, 살구꽃, 진달래, 아카시아, 달맞이꽃, 나리꽃,,,....

 생장을 위한 들꽃의 의지는 얼마나 강한지. 조금의 여지만 있어도 씨앗을 싹 틔우고 꽃을 피운다. 은은하면서도 또렷하게 내뿜는 저마다의 개성은 또 어떻고. 들꽃에 반해 몇 시간씩 꼼짝 않고 앉아서 색연필로 꽃을 그렸다. 처음 보는 꽃들의 이름이 궁금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뒤적이며 이름도 알아갔다. 꽃들의 이름은 꽤나 직관적이어서 한 번 알면 찰떡같은 이름이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마당 여기저기에 돋아나는 연한 질경이, 민들레, 방가지똥, 돌나물, 냉이, 쑥 같은 들나물로 샐러드를 만들거나 된장국을 끓여 먹기도 했다.

 앞산과 뒷산은 연두 빛이 파르라니 돌기 시작하는 봄부터, 갈색 잎을 떨어트리고 긴 잠에 빠져드는 겨울까지 철 따라 색이 달라졌다. 뒷산 상수리나무는 가을이면 동그랗고 반들반들 윤기 나는 도토리를 또르르 마당으로 떨어트렸다. 가끔은 높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도토리가 큰 소리로 지붕에 딱밤을 놓아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집 앞을 흐르는 농수로에는 다슬기도 있고 물풀이 흔들리는 사이로 작은 물고기들이 휙휙 지나다녔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더운 여름날에는 근처 개울로 달려가 몸을 풍덩 던져 넣었다. 물 위에 배영으로 누워 물결 따라 떠내려가면 더위는 사라지고 눈앞에 둥둥 떠가는 풍성한 흰 구름을 하염없이 볼 수 있었다. 

 사자자리 유성우가 쏟아지던 11월 어느 날에는 폭죽 터지듯 불꽃을 단 유성들이 앞산 위로 휙휙 떨어졌다.     

 결혼 전에 인도여행을 계획했다가 나를 만나 결혼하면서 여행을 뒤로 미루었던 남편도, 혼자서는 두려워 든든한 동행인이 있다면 어딘가 미지의 세계를 찾아 세상을 여행하고 싶었던 나도, 시골의 사계 속에서 살다 보니 달리 어디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티코를 타고 아이와 함께 우리 셋은 청도의 골짜기 골짜기뿐 아니라 인근의 창녕과 밀양까지 다니며 맑은 시골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가다 보면 너른 들 가에 우뚝 선 봉기리 삼층석탑도 만나고, 이끼에 덮인 대산사 작은 탑 앞에 쪼그려 앉아 멧돼지 그림을 발견하기도 했다.  단아한 대비사 마당에서는 빠알간 주목나무 열매를 처음으로 맛보았다. 천년 동안 손대지 않고 고스란히 나이 든 것 같은 적천사에서는 시간을 넘어 다른 세상의 공기를 숨 쉬는 듯한 기묘한 느낌에 신기해했다.

 윗동네 상수월 마을 뒤편 비슬산에는 길을 낸 지 오래지 않은 임도를 따라 나무딸기가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루비처럼 영롱한 붉은빛으로 흐드러지게 열린 산딸기도 배부르도록 실컷 따먹었다.

 청도 여기저기에 우리처럼 시골에 들어와 손수 집을 짓는 선배들이 몇 분 계셨는데, 그중에서도 산중에 혼자 사시는 형님 댁에 자주 놀러 갔다. 집 옆으로 가재도 살 정도로 깨끗한 계곡물이 흘러서인지 반딧불이가 살았다. 어느 가을날 초저녁에는 수십 마리 반딧불이가 날아올라 빛의 춤을 추었다. 우리는 황홀한 광경에 감탄을 연발했다.     

 봄에 남편이 벚꽃 따라 열리는 축제장을 다니며 초상화로 돈을 벌어 와서 여름까지 살고, 가을 단풍 명소를 다니며 번 돈으로 겨울까지 살았다. 이른 봄에 생활비가 다 떨어지면 가까이에서 콩나물 공장을 하는 시누에게서 얼마간 빌려 벚꽃이 필 때까지 모자라는 생활비를 충당했다. 살기 어렵다거나 힘든 줄은 몰랐다. 우리 집이 있었고, 젊었고, 우리의 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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