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12
유럽 여행을 앞두고 나의 주된 관심사는 ‘내가 무사히 잘 다녀올 수 있을까?’였다.
오랜 시간 비행기 안에 갇혀 있어야 할걸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는 것 같았기에.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잘 다녀왔다.
우리나라에서만 해도 여행 전후 항공기 사고가 두 차례나 있었지만 우리는 사고 없이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었다.
제일 걱정했던 나의 폐소공포증은 여러 상황 속에서 약간씩 머릿속에 일렁이긴 했지만 더 이상 진행하지는 않고 안정을 되찾았다.
어떻게 가능했는가?
폐소공포증에 대한 정의를 찾아보았다.
폐소공포증은 특정 공포증의 한 종류로 주로 닫힌/밀폐된 공간(예, 엘리베이터, 터널, 비행기 등)에 있는 상황에 대해 지나친 두려움, 공포감을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질환이다. 이러한 상황에 노출되면 거의 예외 없이 지나친 공포를 보이는데, 공황 발작과 유사한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닫힌/밀폐된 공간에 가는 것을 피하려고 하며, 이러한 회피 행동으로 인하여 생활 범위가 제한되기도 한다.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꼭 그랬다. 백화점이나 고층빌딩에 들어서면 너무 공간이 방대하고 미로 같았다. 내가 어디쯤 있고 어디로 나갈 수 있는지 가늠이 잘 안 되어 방향감을 잃고 당황했다.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공포와 밀폐감에 숨이 막힐 듯하여 되도록 그런 공간에 가기를 피했다. 나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는 기차나 시외버스를 장시간 타는 일도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잘 만들지 않았다. 자가용으로 이동할 때도 터널이 너무 긴 구간에서는 폐쇄감이 밀려와 식은땀이 났다. 그러다 보니 확실히 생활 범위가 제한되었다. 점점 여행을 꺼리고 집에만 있게 되었다.
이번 유럽 여행기간 동안 한 사람이 서면 딱 맞을 아주 좁은 엘리베이터를 짐까지 들고 셋이 끼어 타고, 열두 시간이나 좁은 좌석에 갇힌 채 이동해야 했던 비행을 해내고 나니 이제는 어디든 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나처럼 폐소공포증으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에게 혹 약간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여 나의 탈출 노하우를 공유해보고자 한다.
다음에 사용하는 용어들은 내 경험상 편의로 붙인 것이다.
1. 체력 단련.
체력에 대한 자신감이 없으면 정신적인 극복도 어려울 것 같다. 여행 출발일을 앞두고 한 달 보름 동안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아침 운동을 했다. 요즘 유행하는 슬로 조깅인데, 다시 달릴 수 있어서 뿌듯했고, 한 달 반 정도 계속하고 나니 몸이 꽤 단단해진 걸 느낄 수 있었다.
2. 노출.
노출법이라는 용어는 심리학에서 쓰는 전문용어인 걸로 알고 있다.
내 경우에는 두 가지 방법을 썼는데 하나는 간접 노출법이다. 상상노출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비행기에서 내 주의를 공포증으로부터 돌려줄 장편 드라마를 찾아 초반부를 몇 편 보았다. ‘라스트 킹덤’ 이란 미드인데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는 영웅들의 용맹함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들의 상황에 나를 대입하여 간접 경험을 하며 나도 멋진 영웅들처럼 용기를 내야겠다는 독려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걱정이 되는 공간에 있는 걸 상상하면서 내가 안전하다는 걸 수시로 확인했다.
직접노출법은 엘리베이터나 백화점, 지하주차장, 긴 터널처럼 폐소공포증을 일으키는 공간을 회피하지 않고 그 속에서도 안전하다는 걸 직접 경험하는 것이다. 믿을 수 있는 가족이나 친구가 동행하면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3. 집중. 비행기에서도 라스트킹덤 드라마를 이어서 보았는데 좁은 공간에서 갑갑함이 밀려 올라올 때 드라마에 더욱 집중했다. 뇌를 다른 흥미로운 쪽으로 유도하여 공포증으로 넘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또한, 코끝의 들숨과 날숨에 주의를 집중하며 잘 숨 쉬고 있음을 뇌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4. 온도. 겉옷을 벗어 몸을 시원하고 통풍이 잘되게 해서 피부가 원활히 호흡할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아주 중요했다.
5. 수분 보충. 한 모금씩 종종 수분을 보충해 주는 것도 좋은데 따뜻한 물보다는 차가운 물을 마시는 게 몸을 신선하게 하고 정신을 맑게 해 주었다.
6. 공간지각. 새로운 장소에 갔을 때 내가 어디로 들어와서 어디로 나갈지 공간을 확인하여 스스로 공간을 인지하고 장악하고 있다고 느끼면 불안감을 사전에 막아주는데 유효하다.
7. 유대감. 위안이 되고 믿을만한 동행인이 있으면 제일 좋다. 다음으로 비행기나 기차의 승무원과 친절한 인사와 교감을 나누는 것도 중요하다. 위급할 때 언제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음을 스스로에게 안심시키는 효과가 있다.
8. 감정처리. 두려움이 생기려고 하는 느낌이 들면, 두려움과 내가 일체가 아니라는 걸 인식하고 두려움을 내게서 떼어 아주 먼 데로 보내 버리는 이미지를 상상한다. 나는 평온한 나로 오롯이 있을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방법으로 폐소공포증을 떨쳐낸 공간들을 차례로 살펴보겠다.
어둡고 좁고 깊은 지하 주차장
장시간 이동하는 ktx 기차
일단 들어가면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는 공항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꼼짝없이 좁은 좌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비행기
밀폐감이 있는 호텔식 숙소
지하철
공기가 무겁고 갑갑한 루브르 박물관 지하 공간
오래된 건물 에어비앤비 숙소의 좁은 엘리베이터와 복도
내가 정말 더 이상 폐소공포증에 메어 있지 않게 되었을까?
여행을 다녀온 후, 설 전날 동생네 집에 다녀왔다. 동생 집은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좁은 편이고 12층으로 다소 높은 층에 있다. 지난번에 갔을 때는 엘리베이터를 타면서부터 서서히 시작해서 4인 가족의 물건들로 가득한 동생 집에 들어서자마자 민망하리만치 폐소공포증이 밀려왔다. 헐떡이며 이쪽저쪽의 창문을 열어젖히고 크게 심호흡을 하며 난리를 쳤다. 이번엔 과연 어떨까 싶어 살짝 긴장했지만, 별문제 없이 저녁 내내 잘 놀다 왔다.
어제는 부산 이케아에 다녀왔다. 가는 길에 7km의 긴 터널을 지나야 했다. 지난번에 갔을 때는 밀려오는 폐쇄감에 죽을 것만 같아 동생을 꼭 안고 이 구간을 벗어나기만을 식은땀 흘리며 괴로워했다.
“저기가 금정산 터널이다. ”
말하며 운전하는 남편이 한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내가 무서울까 봐 무섭다면서.
두려움이 오나 안 오나 살피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어둡고 긴 7km 터널은 생각보다 금방 지나갔다. 나는 괜찮았다.
이케아에서 무거운 물건을 사면 사방에 육중한 스테인리스 철판으로 꽉꽉 막힌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 전에 왔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엄청 공포스럽던 기억이 있어 이번에도 약간 긴장이 되었다. 안에 들어가니 역시나 이런 공간은 좀 힘들군 생각하다가 마음속 어딘가에서 떠오르는 공포감을 뚝 떼어 저 멀리 보내 버리는 상상을 했다. 그 좁은 비행기 좌석에서 12시간을 버텨냈는데 이 정도쯤이야, 곧 다음 층에서 문이 활짝 열릴 텐데 뭐,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맹훈련을 마친 용사처럼 밀폐공간에 대한 두려움을 저 멀리 떨쳐 버릴 수 있게 된 듯하다. 완전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이만하면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게 아닌가.
그렇다면, 자, 다음은 어디에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