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주사와 레몬사탕
**22년 호르몬성 유방암 2기 선고 -
선항암, 수술, 방사선치료까지 표준치료를 마치고 5년 호르몬약 치료중인 환자입니다.
암치료를 했던 시기의 기록, 사진, 감정 그리고...
현재 일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기록합니다.
AC 항암 스케줄이 정해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조용히 숨을 한번 길게 들이쉬었다.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이제부터 진짜 항암이구나.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씩 무거워졌던 것 같다.
병원에 가기 전, 가방 하나를 챙겼다.
텀블러에는 물을 가득 담았고, 사람들이 입맛이 이상해진다고 해서 레몬사탕 몇 개를 넣었다.
그리고 혹시나 병원 안이 추울까 봐 부드러운 겉옷도 하나 챙겼다.
별거 없는 준비물이었지만, 그 작은 것들이 나를 조금 덜 불안하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나는 혼자 운전을 해서 서울대병원으로 갔다.
병원 중에서도 암병원, 그 중에서도 4층 주사실.
그곳은 일반 외래와는 또 다른 공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이 어떤 곳인지 모를 수도 있겠다.
나 역시 처음엔 전혀 알지 못했던 곳이었으니까.
4층 주사실로 올라가는 길, 2층 3층 통창이 있는 곳을 보면 창경궁 정문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주사실 복도 끝 창가쪽으로 이전에는 나갈 수 있었는데, 그곳으로 나가면 창경궁 안이 훤히 잘 보였었다.
생각보다 너무 멋지고 아름다워서 한참이나 바라봤던 것 같다.
그 풍경은 어쩐지 위로 같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름다운 궁을 바라보며, 나는 항암을 맞으러 들어가고 있었으니까.
주사실은 침대가 놓인 구역과 리클라이너 의자가 있는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처음엔 침대에서 항암을 맞았는데, 중간에 화장실을 가게 되면서부터는 리클라이너 의자로 바꿨다.
살짝 누운 자세로 편하게 맞을 수 있었고, AC 항암은 주사 시간이 아주 길지 않기 때문에 그게 더 나았다.
나는 케모포트를 삽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항암할 때마다 팔로 주사를 맞았다.
대부분 암이 없는 쪽 팔에 주사를 놓게 되는데, 바늘이 아주 크거나 무섭게 생기진 않았지만,
그래도 주사바늘을 꽂고 나면 마음이 조용히 긴장했다.
처음 맞던 날은 더더욱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이 주사를 맞게 되면 이후 내 삶은 어떻게 바뀌게 되는 걸까?
나는 이 주사를 맞고 다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돌아갈 수 있는 걸까?
주사가 주는 압박감이 상당했다.
그럼에도 나는 혼자 주사를 맞으러 갔었는데 내가 그렇게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가족에게 보이고 싶진 않았다.
괜찮냐고 묻는 말도 대답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AC주사 - ‘빨간 약’이라 불리는 항암 주사액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몸속 어딘가에서부터 이상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피도 아닌데 붉은색, 혈관을 타고 주사액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지는데 그 느낌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마치 몸이 나 아닌 것 같고 기분이 점점 이상해지고, 어딘가 울렁거리는 감각이 가슴 위로 떠오른다.
의사 선생님이 말하길, 물을 많이 마시고, 가능한 빨리 소변으로 약을 배출해주는 것이 좋다고 했다.
항암을 맞고 화장실에 처음 갔을 때, 소변이 붉게 나오는 걸 보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 장면은 꽤 충격이었다.
몸속에 진짜로 뭔가 낯선 게 들어왔다는 것, 그걸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마음이 조금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가 지금까지 한 것이라곤, 유방암이란 얘기를 듣고 한달가까이를 마음졸이며 기다렸다가
다시 수많은 검사를 하고 항암을 하러 온 것.
이건 내가 암환자가 됐다는 걸 알게되고 두달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떤 치료라도 당장 하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있었는데 막상 항암을 시작하고 나니 또다른 무서움이 닥쳤다.
몸에 주사를 꽂고, 그 주사액이 내 몸에 들어왔다가 나온 그 과정을 오롯이 두 눈으로 확인했다는 것.
눈물이 나진 않았는데 마음이 이상하게 아팠다.
다시 침대로 돌아온 나는 입안이 쓰고 이상해져 준비해온 레몬사탕을 입에 넣었다.
입맛이 이상해지기 시작하면 입안을 개운하게 해준다고 글을 보고 한 행동이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개운함보다는 그 상황을 견디기 위한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사탕을 먹고 있었던 그 순간의 느낌이 너무 강하게 남아서
치료가 끝난 지금도 다시는 그 사탕을 먹지 못하게 되었다는 거다.
어쩌다 마트에서 그 레몬사탕 봉지만 보게되어도 항암할 때의 그 기분이 떠오른다.
그 이후로 나는 깨달았다.
항암 중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사탕은 가능한 먹지 않는 게 좋다는 것을.
그 순간의 기분이 내가 사랑했던 맛에 엉겨 붙어서 영영 그 맛을 싫어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으니까.
항암약이 거의 다 내 몸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면서 문득 생각했다.
‘이제 머리카락이 빠지겠구나.’
유방암 카페에서 봤는데, 머리카락이 빠지기 전에 작은 ‘행사’ 같은 걸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혼자 사진관에 가서 지금의 모습을 남겨놓거나 스티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병원에 주사를 맞으로 오기 며칠 전, 나도 해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그러지 않았다.
그때의 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돌아올 거라고...
지금의 나로 다시 살아날 거라고...
그래서 그 순간의 나와 작별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모습을 남기는 것 자체가 나에겐 너무 무서운 일이었다.
작별 인사를 미리 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생각보다 항암 직후엔 몸이 괜찮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바로 쓰러지거나 토하거나 하지는 않았고 병원에서 집까지 다시 운전을 해서 무사히 도착했다.
그날은 참 이상하게 조용하고 차분했던 하루였다.
꽤 요란하게 지나갈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었다.
TV에서 봤던 것처럼 항암주사를 맞는 순간부터 당장 내일 어떻게 될 사람처럼 변하게 될 거란 예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모든 치료과정을 끝내면서 느낀점도 그렇다는 거다.
3시간 .. 4시간 정도 지난 이후, 배가 고파 사과를 하나 깎아먹었다.
그런데…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느꼈다.
‘이제 내 몸에 항암약이 돌기 시작했구나.’
그 이상한 입맛이 곧 찾아올 부작용의 시작이었고, 몸의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신호였던 것이다.
머리카락은 주사를 맞는다고 바로 빠지지 않는다.
‘14일의 법칙’이라고, 딱 2주가 되는 날부터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조금 의심했다. 설마 딱 2주만에?
13일까지도 멀쩡했으니까 ‘나는 아닐지도 몰라’ 하는 마음도 살짝 있었고...
그런데 정확히 14일째 되는 날 샤워를 하며 머리를 감았는데
정말로, 말 그대로!
가발이 벗겨지듯 머리카락이 손에 감겨 나왔다.
당황했고 그 순간 멈춰버렸다.
그때 알았다.
내가 그렇게까지 두려워했던 머리카락 빠짐은 사실은 진짜 큰일이 아니었다는 걸.
그건… 진짜 아무 것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