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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 중에 만진 그것 - 혹을 발견한 날

나 암이래

by 율마

샤워 중에 만진 그것 - 혹을 발견한 날


2022년 8월, 샤워를 하다가 왼쪽 가슴 윗부분에 손이 닿았을 때, 나는 처음엔 그저 지나가는 감촉으로 여기려 했다. 하지만 손끝에 느껴지는 그 무언가는 너무나 분명했고, 바둑 돌 반쪽 같은 단단한 형태가 이전에 제거했던 섬유선종의 말랑한 느낌과는 전혀 달랐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았고, 경계가 뚜렷했으며, 마치 내 몸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다시 한 번 만져봤다. 그리고 또 한 번. 여전히 거기 있었다. 심장이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나는 샤워기를 끈 채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거울 앞에 섰을 때 겉으로 보이는 내 몸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여전히 똑같은 나였고, 똑같은 가슴이었다. 하지만 손끝에 느껴지는 그 낯선 감촉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로 거기 존재하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잠들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이건 뭐지?'라는 생각을 끝없이 반복했고, 시계 바늘이 새벽 세시를 가리킬 때까지 뒤척였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엄마에게도,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말로 꺼내는 순간 그것이 진짜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그 두려움이 구체적인 형태를 갖게 될 것만 같았다.


혼자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유방외과'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검색창에 세 글자를 입력하는 손가락이 떨렸다. 집 근처에 있는 병원에 전화를 걸었고, 전화를 받은 직원의 목소리는 친절했지만 그다음 들려온 대답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죄송한데요, 다음 달 중순까지 예약이 다 찼어요."


다음 달.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는 없었다. 기다리는 동안 이 불안을 안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나는 다시 검색했고, 송파, 강남, 서초의 유방외과들을 하나씩 찾아 전화를 돌렸다. 집에서 한 시간이 걸리든 두 시간이 걸리든 상관없었다. 가장 빠른 곳이면 어디든 좋았다.


"이번 주 금요일 가능하세요?"


송파에 있는 한 유방외과에서 드디어 원하던 대답을 들었고, 나는 주저 없이 그 날짜로 예약을 잡았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다음 날, 신랑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 내일 병원 가는데, 같이 갈래?"

"무슨 병원?"

"유방외과. 가슴에 뭔가 만져져서."


신랑의 표정이 찰나의 순간 굳었다가 이내 평소처럼 밝게 돌아왔는데, 그 짧은 순간의 표정 변화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불안이 스치고 지나간 흔적을. 하지만 그는 곧 평소의 목소리로, 내게 안심을 주려는 듯 말했다.


"그냥 혹일 거야. 같이 가자."


우리는 철썩같이 믿었다. 양성일 거라고, 아무것도 아닐 거라고. 병원 가는 차 안에서도, 대기실에 앉아 내 이름이 불리길 기다리는 동안에도, 우리는 걱정하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걱정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괜찮을 거야'라는 말을 속으로 수없이 되뇌며, 그 말이 주문처럼 현실이 되길 바랐다.


검사실 문이 열렸고,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상의를 벗고 차가운 침대에 누웠을 때 느껴지는 딱딱한 감촉, 가슴에 발라지는 차가운 젤,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는 탐촉자의 압박감까지, 모든 것이 낯설고 불편했지만 처음엔 괜찮았다. 검사가 끝나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라는 말을 듣고, 신랑과 함께 안도의 한숨을 쉬며 집에 갈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뭔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의사 선생님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고, 탐촉자를 움직이는 속도가 느려지더니 같은 부위를 계속해서, 반복해서, 집요하게 훑었다. 초음파실 안의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고, 간호사가 조용히 들어와 의사와 무언가를 속삭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나는 천장을 보며 가만히 누워 있었지만, 그 순간 직감적으로,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 이거... 진짜구나. 나 암이구나.'


"검사 끝났습니다. 암으로 저는 예상이 됩니다. 정확한 것은 조직검사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일단 급하니 최대한 빨리 대형병원에 예약을 잡아보도록 할게요. 소견서 작성해서 아산병원과 서울대병원에 예약잡을 곳 알아볼게요."


의사의 목소리는 무거웠고, 그 무게가 내 온몸을 짓눌렀다. 나는 그 무게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검사실 밖에는 신랑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문을 열고 나왔고,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의 눈 속에는 아직 희망이 남아 있었다.


"괜찮아?"


신랑이 물었고, 나는 짧게 대답했다.


"나... 암이래."


그 순간의 신랑 얼굴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입이 살짝 벌어졌고, 눈동자가 흔들렸으며, 뭐라고 말하려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가, 내 손을 꼭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


"...일단 집에 가자."


돌아오는 차 안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이 흐릿하게 보였고,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고 빨간색으로 바뀌는 것이 느린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신랑도 울지 않았으며, 나 역시 울지 않았다. 한마디라도 꺼내는 순간, 우리 둘 다 왈칵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꾹 참았고, 나는 그저 창밖을 보며 지나가는 풍경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사람들이 길을 걸어가고 있었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이를 손잡고 걷는 엄마,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남자, 전화기를 들고 웃는 여자. 모두가 평범한 하루를 살고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멈춘 건 오직 우리뿐이었다.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신랑은 거실로 향했고 나는 내가 운영하던 가게로 나갔다.

공간, 익숙한 의자, 익숙한 풍경. 하지만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자리에 앉아 문을 닫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동네 언니였다. 내가 병원에 간다는 것을 알고 있던 언니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뭐래? 아무것도 아니라지?"

언니의 목소리는 밝고 가벼웠다. 나도 그렇게 밝은 대답을 하고 싶었다. '응, 아무것도 아니래. 괜히 걱정했어'라고 웃으며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달랐다.

"나... 암이래."

"......"


침묵이 흘렀다. 길고 무거운 침묵. 전화기 너머로 언니가 숨 쉬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렸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온몸으로 깨달았다. 내가 암 환자가 되었다는 것을. 내 입으로 말하고, 누군가의 침묵으로 확인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나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을, 그렇게 말하고 나니 알 수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는 그제야 무너졌다. 세상이 통째로 무너진 사람처럼, 소리 내서 크게, 한참 동안 울었다.


꺼이꺼이, 엉엉.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고, 숨이 막혔으며,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왜 나야, 왜 하필 나야.'

'나는 뭘 잘못했어.'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모든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왔고, 나는 그것들과 싸울 힘조차 없었다. 그저 울 수밖에 없었다. 쏟아내야 했다. 이 슬픔과 두려움과 억울함을 어디론가 내보내지 않으면 내가 먼저 무너질 것 같았다.


한참을 울고 나서, 이상하게도 속이 조금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눈물이 멈추고 나니, 숨을 쉴 수 있었다. 세수를 하고 거울을 봤을 때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머릿속은 조금 맑아진 것 같았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살아야 해. 진짜 살아야 해.'


울기만 할 순 없었고, 무너지기만 할 순 없었다. 나는 다시 일어서야 했다. 싸워야 했다. 이 병과, 이 두려움과, 이 운명과.

일주일 후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다. 역시나 암이었다. 이미 알고 있던 결과였지만, 서류로 확인되는 순간은 또 달랐다. 병원에서 서울대병원 예약을 잡아줬는데, 가장 빠른 날짜가 한 달 뒤라고 했다.


결과를 알았는데도 치료는 한 달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답답하고 막막했지만, 그때 나는 결심했다. 이 한 달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겠다고. 불안 속에서 소모되지 않겠다고. 체력을 길러야겠다고. 암과 싸우려면 몸이 건강해야 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읽었던 기억이 났고, 나는 그 말을 꼭 붙잡기로 했다.


그날부터 나는 매일 아침 운동화 끈을 묶고 집을 나섰다. 하루 만 보가 목표였다. 처음엔 정말 힘들었다. 다리가 아팠고 숨이 찼으며,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하지만 걷는 동안만큼은 생각을 덜 할 수 있었다.


발을 옮기는 데 집중하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불안과 두려움이 조금씩 잠잠해졌다. 아스팔트를 밟는 발바닥의 감촉, 바람이 뺨을 스치는 느낌,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 그런 것들에 집중하면 '암'이라는 단어가 조금 멀어지는 것 같았다.


땀이 흘러 옷이 젖을 때쯤이면 '오늘도 만 보 걸었어, 나 잘했어'라는 작은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았던 그 시간에, 나는 적어도 걸을 수 있었다. 움직일 수 있었다. 살아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한 달 동안 만 보씩 걸었다.


돌이켜보면, 그 한 달이 나를 준비시켰다. 잡생각을 없애기 위해 몸을 바쁘게 움직였던 것, 하루하루 조금씩 체력을 쌓아갔던 것, 걸으며 나 자신과 대화했던 모든 시간들이 나중에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정말 큰 힘이 되었다.


항암치료를 견뎌낼 수 있었던 건, 그때 걸으며 길렀던 체력 덕분이었다. 탈모가 시작되고, 구토가 올라오고, 온몸이 아플 때도 버틸 수 있었던 건, 그 한 달 동안 쌓아둔 에너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할 수 있다'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기다리는 것만이 아니라, 준비하고 있다는 느낌. 그게 나를 지탱해주었다.


한 달 후 서울대병원 진료실에 앉았을 때, 나는 준비되어 있었다. 울지 않았고, 흔들리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왼쪽 유방에 1CM 하나 2CM 하나, 총 3cm 크기의 종양이 있고, 겨드랑이 림프절 전이가 있습니다. 선항암치료를 먼저 진행하겠습니다."


림프절 전이. 선항암치료. 낯선 단어들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조용히 생각했다.


'좋아, 시작하자. 치료하면 되는 거지 뭐. 그리고 나는 분명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거니까.'


지금 이 글을 쓰는 건, 그때의 나처럼 샤워 중에 뭔가 낯선 것을 만진 누군가를 위해서다.

손끝에 느껴진 그 이상한 감촉 앞에서 '설마 이게 암은 아니겠지?'라고 스스로를 달래고 있을 당신에게, 나는 몇 가지 말을 전하고 싶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인터넷을 뒤지며 밤을 새우고 있다면, 괜찮다. 나도 그랬다. 말로 꺼내는 게 두려웠고, 검색할 때마다 최악의 경우만 눈에 들어왔다.


집 근처 병원이 예약이 다 찼다면, 멀어도 괜찮다. 한 시간이든 두 시간이든, 가장 빠른 곳으로 가면 된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은 커지니까.


그리고 혼자 가지 말고 누군가와 함께 가길 바란다. 검사실에서 나와 "나 암이래"라고 말해야 하는 순간, 혼자 듣기엔 너무 무거운 그 말을 함께 나눌 누군가가 필요하니까.


검사실에서 나와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세상이 무너질 것이다. 괜찮다. 무너져도 된다. 혼자 있을 때 실컷 울어도 된다. 소리 내서, 꺼이꺼이, 엉엉, 한참 동안. 그게 치유의 시작이다.


나도 울었다. 많이 울었다. 울고 나니 속이 조금 시원해졌고, 그제야 생각할 수 있었다.

'나는 살아야 해.'

한바탕 울고 나면, 당신도 그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어서게 될 것이다.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기다리는 동안, 걸어라. 하루 만 보씩, 매일. 힘들어도, 숨이 차도, 다리가 아파도, 걸어라. 몸을 움직이고 체력을 길러라. 그게 나중에 치료받을 때 정말 큰 힘이 될 것이다.


나는 지금 치료를 마치고 3년차 회복 중이다. 샤워 중에 만진 그 혹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지만, 나는 이겨냈다. 힘들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여전히 호르몬 치료를 하고 있고 온갖 호르몬약의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지만 괜찮다. 그래도 반은 일상으로 돌아가서 반은 일반인처럼 살고 있다.


누군가 나와 같은 일을 겪기 시작하고 있다면,

두렵지만 시작하면 된다. 무너져도 괜찮다. 울어도 괜찮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면 된다.


한 발짝씩, 하루씩, 만 보씩.

그렇게 걸어가면, 이 글을 일고 있는 누군가도 이 글을 쓰게 될 것이다.

다른 이제 막 혼란스러워 검색창에 유방암 관련 모든 것을 최악의 상황까지 검색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 당신의 이야기를.


Firefly_Close-up of gentle hands holding a warm cup of tea by a window, soft natural light, c 774734.jpg 화이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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