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괜찮지가 않습니다.
난 괜찮아 난 괜찮아
그대가 나의 전부일거란 생각은 마
아무리 약해 보이고 아무리 어려보여도
난 괜찮아 나는 쓰러지지 않아 난 괜찮아
뒤돌아가 그대의 사랑 같은 사랑 원하지 않아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무리 꿈결같아도
영원토록 변치않을 수 없다면
난 괜찮아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던 때가 있었다. 이렇게 안 좋은 일만 일어날 수도 있구나 싶은 그런 때가 있었다. 나름 순탄하게 살아왔던 나에게는 이런 시련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든 시련이었다.
아마 그보다 더 힘든 일은 더 이상 생기지 않을 거라 생각이 들 만큼 숨이 안 쉬어질 만큼 힘들었던 때였다.
결혼하고 난임으로 힘들어할 때 한 번의 유산을 하였고 그사이 시간은 야속하게만 흘러가고 시험관은 늘 실패로 이어졌다. 그러던 와중 아빠는 담도암 확정을 받았고 속 끓이던 나까지 암환자가 되었다.
졸지에 나는 난임에 암까지 걸린 세상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게 내 나이 30대 초반이었다.
아빠의 암소식에 전전긍긍하며 밤잠을 못 이루는 날이 많았고 가족들의 의견충돌까지 감당해 낼 수 없다고 느끼면서 입버릇처럼 '이러다 나 암 걸리겠어'라고 말했던 게 진짜 현실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나는 이제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을 전적으로 믿는다.)
유명하다는 서울의 한 병원에서 '암 0기입니다.'라는 말을 듣고서야 실감이 났다. 교수님의 안쓰러운 눈빛과 단호한 말투를 듣고서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저 귀에서는 삐----- 하는 소리만 들릴뿐 교수님의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병원의 지시대로 어찌어찌 시술 날짜를 예약하고 여러 검사를 받고 나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려고 들어갔는데 갑자기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도저히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의자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지나가던 커플이 '남자한테 차였나?' 이런 눈으로 날 보고 지나갔지만 한동안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 그대로 앉아있었다. 그날 도저히 남편에게 4시간이 걸리는 집으로 나는 돌아갈 수 없었다. 병원 옆 숙소를 잡고 남편에게는 내일 내려가겠다며 담담한 척 전화를 걸어 말했다. 병원이 보이는 호텔 창밖을 바라보며 캔커피 한잔을 마셨다. 다이어리에 마음속 말들을 써 내려갔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이렇게 암까지 걸리다니 나는 운이 지지리도 없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다음날 집으로 돌아와 마중 나온 남편의 차에 올라타 저녁을 먹으러 갔다. 참치를 먹었는데 맛이 어땠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자그마한 방에 둘이 앉아 담담히 병원에서 들은 얘기를 전했다.(사실 제대로 기억도 안 났다.) 다행히 혼자 있는 시간 동안 마음을 다잡아서 인지 남편 앞에서 울지는 않았다. 애써 담담한 척 이야기를 서로 나눴다.
시술을 하고도 결과가 좋지 않아 한 번의 시술로 끝나지 않고 결국 총 세 번의 시술을 했다. 그 사이 나는 술독에 빠져있었다. 원래도 술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아빠의 병원진료를 함께 받으면서 슬픈 마음을 감추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곧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지만 해줄 수 없다는 무기력감에 나는 지쳤고 술로 버텼다. 어느 순간 술 마시고 답답한 마음을 노래방을 가는 걸로 풀고 있었다.
노래방에 가서는 늘 나의 18번인 '난 괜찮아'를 불렀다. 사실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나는 슬픈 상태였지만 가사에 나오듯이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 너의 동정 따위는 내겐 필요치 않아'처럼 나는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상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인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을 겪는 동안 마음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천당과 지옥을 오갔지만 나는 여전히 기분 좋게 취한 다음 노래방에 가서 '난 괜찮아'를 불렀다. 그러면 정말 괜찮아질 줄 알았다. 물론 말처럼 결국 나는 버텨냈다. 우울 속으로 한없이 빠져들 수 있었지만 다행히 빠지지 않았다. 긍정적인 성격도 아닌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노랫말처럼 '나는 괜찮다 괜찮다' 스스로를 다독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