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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하 Sep 30. 2024

나쁜 X

칸나를 믿는다. 아니, 칸나를 선택한 자신의 안목을 믿는다.

칸나는 분명 다를 것이다. 엘레나와는... 지난번과는 다를 것이다....


끊임없는 자기 세뇌 속에 빠져있는 리온은 그것이 불안을 억지로 누르려하는 것일 뿐, 그런다고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는 네 시간이 넘도록 집무실에 앉아 있었지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불안하고 초조한 눈빛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손아귀를 움켜쥐었다.


처리해야 할 서류가 많지만, 그것을 재촉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리온을 오랫동안 옆에서 봐 온 이안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이안 폰 베르트.


왕의 최측근이자 자작의 지위를 소유한 기사로 리온이 성인식을 치르기 이전부터 함께 해 온 무술 교사였으며, 리온이 아버지였던 마크윈이나 어머니인 샬롯보다 더 온전히 신뢰할 수 있다고 믿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안은 칸나에 대한 리온의 감정과 계획을 모두 알고 있었고, 파장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그 모든 것을 지지해 준 사람이었다.

또, 자신의 가문은 동생인 휴고에게 넘겨주고, 성 안에서 늘 리온을 보필해 왔다.


항상 그의 결정에 단 한마디도 반대하거나 거절하지 않았던 그가, 유일하게 리온에게 적극적으로 만류했던 것은 전 왕비 엘레나의 일이 있었을 때뿐이었다.




.........


"차라리 스카드 공작을 부르십시오."



출산을 앞두고 엘레나의 불안감은 커져갔다.

태어나는 아이의 모든 것이 염려스러웠다.


엘레나가 걱정된 이안은 그녀의 오빠에게서라도 해결책을 찾으라 권유했지만, 엘레나는 거절했다.

자신의 아이를, 자신의 눈앞에서 잃고 싶지 않다는 소망 때문에.



"이 아이를 공작 가에서 낳는다고 하면 오히려 의심이 증폭될 거예요."



엘레나는 출산 이후에 자신에게 쏟아질 수많은 루머들을 예상하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 운이 좋아서 루머와는 상관없는 출산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 문제는 그런 확률에 걸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엄마인 내가 아이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어설프게 위장하면 리온의 화만 돋구게 될 뿐이예요.."



그녀는 리온의 사랑보다 의심이 많았던 지난날들을 기억하고 고개를 떨궜다.

사실 의심보다는 증오가 더 많은 날들이었지만.

사랑받았던 때는 언제였지, 하고 회상을 해보아도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출산이 시작될 즈음, 리온은 한순간도 자리를 피하지 않고 계속해서 지킬 거예요."

"태어난 아이가... 정말 내가 낳는 아이가 맞는지... 알고 싶을 테니까."



리온은 엘레나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자 아이와 산모를 '지키기 위한' 중대한 사항이라며 성 안에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검문과 경계를 강화했다.


성 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바깥출입도 극도로 자제시켰으며, 그녀의 가족인 프로이센 가문에서도 엘레나의 모친인 마리안을 제외하고는 드나들지 못하게 막았다.

마리안 또한 리온이 보낸 기사가 문 앞을 지키고 있을 때만 방문할 수 있었으며, 방문이 끝난 후에는 기사가 엘레나의 방에 찾아와 다른 특이점이 없는지 검사하고 나갔다.


이것은 명백히 왕비에 대한 모욕이며 선을 넘는 행동이었기에, 그녀는 충분히 거절하거나 화를 낼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엘레나는 끝까지 그 모든 일을 묵묵히 견뎠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명예나 자존심 같은 건 전부 내려놓고서라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었다.



".....스노우는 어떻게 됐나요?"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던 엘레나는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소리로 물어보았다.


그런 그녀의 물음이 안쓰럽고 답답하다고 느껴진 이안은 선뜻 입을 떼기 어려웠지만, 아무런 희망도 없는 채 하루하루 살아가는 엘레나의 모습에 연민이 들어 그냥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직까지 별다른 것은 없습니다. 근무지가 바뀌긴 했지만, 다른 부당한 대우가 있거나 처벌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거짓말로 속여서 자신에게 알려줄 수도 있겠지만, 이안은 달랐다.

그가 진실된 사람이었기에 엘레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위태로운 안심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너무도 쉽게 무너져버릴 수 있는 감정들인데.


리온이 다시 그 마음에 화를 토해내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

그 화가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고 아이와 가문, 그 사람에게 미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


계속되는 스트레스에 엘레나는 복부에 통증을 느끼며 주저앉았고, 이안은 다가와 얼른 부축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기절한 그녀의 얼굴을 보자, 놀란 이안이 크게 소리쳐 문 밖에 있는 여관에게 의사를 부르게 했다.



"......다행히 산모와 태아는 무사합니다. 스트레스로 인한 것 같으니 편히 쉬게 해 주십시오."



엘레나를 진찰한 의사는 무거운 방 안의 공기 덕에 자신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쓰러진 왕비님이라니.

물론 모두가 긴장되는 순간이지만 리온은 단순한 걱정이라기엔 지나치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리온은 이안을 불러 둘만 들을 수 있게 가까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의사에게는 산모와 태아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묻고 내보냈다.



"......어때."



대체 뭐가 어떻다는 건지. 그는 삐뚤어진 리온이 공감 가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왕비님을 괴롭히는 것은 그만두십시오. 라고 말하고 싶은, 새어 나오는 속내를 꾹 참고서 간신히 입을 뗐다.



"힘들어하십니다. 새 장에 갇힌 새나 다름없으니까요. 알을 낳으면, 그 알도 자신도 어떻게 될지 모르고."


".....내가 너무한 걸까?"



이안은 당연한 소리를 묻는 리온에게 어쩐지 반발심이 올라왔다.



"잘하시는 일은 아닙니다. 전하께서 그간 좋은 남편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나쁜 남편을 자처하고 계시잖아요."


"........"


........




"나쁜 남편이라....."



과거가 떠오른 리온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아직도 엘레나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는, 이 모든 게 평생 자신을 잠식시킬 독이 되는 것 같았다.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과거라니.


리온은 말없이 몇 시간이나 서 있는 이안을 보며 피식하고는 비웃듯이 내뱉었다.



"나쁜 아내에게 더할 나위 없는 남편 아니었던가?"



뜬금없는 소리 같지만, 이안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조용히 참고 흘려들을 수도 있는 이야기였지만, 그는 엘레나의 일에 있어서는 리온과는 다른 편이었기에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이안은 가시 돋친 말로 다시 리온의 심기를 긁었다.



"나쁜 아내로 만든 나쁜 남편이지요."

"그분이 어떤 분이었는지, 얼마나 전하를 사랑했는지, 전하만 모르고 계십니다."



리온은 제대로 긁힌 듯, 책상을 쾅 내려치고 일어나 소리쳤다.



"그렇다고 모든 게 정당화될 수는 없어!"



이안은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것 같은 리온이 안타까웠다.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게 엘레나가 아닌 자신에게 더 어울리는 말이라는 걸 그는 알까?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는 없기에 밤을 비추는 아름다운 달이라고 불렸던 왕비의 자리.

민중을 자애롭게 안아주고, 비춰주는 만월이 되고 싶었던 엘레나는, 리온의 어둠에 갇혀 빛을 잃었다.


국혼을 스스로 선택할 수도 없었으면서, 피할 수 없었던 것임에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노했던 비겁함.

분노한 자신의 감정의 정당성을 내세우며 그녀에게 상처 주었던 이기심.


결국 마지막까지 자신의 감정과, 자신의 입장과, 자신을 생각한...

그는 탄생부터 지금까지, 왕실에서 특권층이자 지배층으로 존재해 온 오만한 생명이 맞았다.



리온...

나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러나 이안은 리온을 버릴 수 없었고, 버릴 생각도 없었다.

그저 그를 회개하여 돌이키게 하려는 마음을 접었을뿐.


엘레나를 살리려 했던 최선의 시간도, 더 이상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막을 차선의 시간도, 이제는 모두 저 깊이 묻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리온에게 다가가는 이안의 기대없는 발걸음은 무겁고 처연했다.

그를 아끼는만큼 괴로움이 흘러넘쳐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힙겹게 집무실 책상 앞에 선 이안이 리온에게 차악의 선택을 하도록 권했다.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왕권을 강화하십시오."

"차라리 아무도 이런 전하에게 도전할 수 없도록."

"패권을 가진 사람이어야 평화를 논할 수 있다고 배우셨으니까요."



이안은 손에 들린 서류를 내려놓으며 그의 눈을 보고 경고하듯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힘도 없이 패악을 부리는 건, 최악의 인간이나 하는 짓입니다."




<미라 아르투아>



밤늦게 마법 기사단에 관한 서류를 보고 있던 칸나는 최근 리온에게서 느낀 불안감을 곱씹어보게 되었다.

늘 자신만만하고 당당해 보이는 사람이 한순간에 불안과 혐오를 넘나들었던 찰나의 순간.


미라 아르투아.

그를 곁에 두겠다고 말한 그날이었다.



"........."



칸나는 단순히 동정 때문에 미라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왕비가 되었지만, 타인이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충성하도록 할 자신은 없었다.


왕족에게 충성하는 것은 의무, 귀족에게 충성하는 것은 이익이라는 말에 비춰보면, 마녀에 불과한 자신은 어설프게 쓴 왕관 하나만 가지고 있을 뿐이니까.


귀족들이 선물한 고급 물품으로 여관들의 환심은 살 수 있어도, 그들의 충성심을 살 수는 없다는 것은 일찌감치 알았다.

그들이 진심으로 칸나를 왕비로서 받아들이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저 그곳이 그들의 일자리기에 칸나의 옆에 있는 거라는 말이 더 맞았다.

누군가는 귀족에게 보고하는 새가 되기 위해 옆에 있는 것일 테고.


그래서 칸나는 똑같이 세상의 반대편에 있는 이를 찾았다.


함께...

세상의 불합리함 앞에서 견뎌낼 수 있는 사람.

다른 모습이라고 해서 차별받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은 사람.


칸나는 미라에게 먹을 것을 제공했던 주점을 운영하는 중년 남자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시켜 지난날 미라의 행적과 그의 고향까지 모두 조사하여 리온에게 서류로 전달했다.


의심스러울만한 점은 없었을 텐데.

그의 불안은 어디에서 기인된 것일까.

프로이센과 연관이 있을까.


......아니면...

정말 과거에 무언가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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