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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May 25. 2023

여행은 일상이 된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꽤나 길다. 단정하던 머리는 처치곤란이 되고(덥수룩하게 그냥 둔다), 짧던 손톱도 길게 자라난다(여행 짐을 쌀 때 손톱깎이를 챙겨야 한다). 뿌리에서 자란 흰머리가 거슬려 염색도 해야 하고(여행 짐에 염색약도 챙긴다), 일주일 정도는 마법에 걸린 채로 지낸다(아내는 마법에 걸리면 온순해진다).


   돌이켜보면, 어느 도시든 순수히 관광을 위해 필요했던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아테네라면 이틀, 이스탄불이라면 삼일 정도면 충분했다. 2,000년의 시간을 깔고 있는 로마도 4일 정도가 지나면서 시큰둥해졌고, 에게해를 넘어가는 보드룸에서의 일몰구경도 일주일 까지였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이름난 유적지나 눈부신 풍경을 그저 일상으로 만들어 버릴 만큼 긴 시간이다.


   한 달을 별 탈없이 지내기 위해서는 파르테논이나 콜로세움 말고도 다른 것들이 필요하다. 한 시간 정도 가볍게 걷기 좋은 산책로, 와이파이 빠르고 오래 있어도 눈치 안 보이는 카페, 크고 가까워 장 보는 것이 불편하지 않은 마트, 밥 하기 귀찮을 때 갈만한 저렴한 로컬 식당, 비 오는 날 시간 때우기 좋은 공공 도서관 등등. 결국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 한 달 치의 짐을 들고 온 이상 여행은 어쩔 수 없이 일상이 된다.



 

   한 달을 예약한 숙소에 도착해 가장 먼저 둘러보는 건 주방이다. 집주인이 에어비앤비에 올려놓은 주방사진을 꼼꼼히 확인한 후 숙소를 구하긴 하지만 사진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오스트리아 빈의 주방은 완벽했다. 프라이팬이나 냄비는 깨끗하면서 충분했고, 접시나 컵은 용도에 따라 다양했다. 넉넉한 크기의 냉장고는 냉동과 냉장이 잘 분리되어 있었고, 설거지하기에 불편하지 않을 만큼 싱크볼이 큼직했다. 심지어 화구가 3개였고 주방 뒤편으로 크게 난 창 마저 밝았다. 경험상 주방이 괜찮으면 숙소의 다른 부분은 주방을 닮아 쾌적하다. 시작이 좋다.


   짐을 풀고 동네 산책을 나선다. 아니, 산책이라기보다는 탐방이다. 와이파이가 빵빵한 카페나 현지인 식당, 한 달간의 식재료를 공급할 큼직한 마트를 찾기 위함이다. 차량 통행이 금지된 널찍한 동네 길이 마음에 든다. 길 가운데로 전깃줄에 매달려 길게 이어진 가로등도 이국적이다. 곳곳에 식당은 많은데 메뉴판에 적혀 있는 가격이 만만찮다. 한가하게 시간을 버릴 카페도 몇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대형마트 한 곳을 건졌다. 이마트만 하다. 집밥 걱정은 없다.


밥은 집에서 술도 집에서.


   쇤브룬 궁의 넓고 화려한 정원은 무료이다. 빈의 구시가지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이곳에 숙소를 정한 이유이다(그 동네 월세가 싸기도 했다). 숙소에서 10분만 걸으면 맘껏 쇤브룬 궁의 정원을 이용할 수 있다. 18세기 바로크양식으로 지어진 궁전이라는데 사실 궁전은 크게 관심 없다(유료이다). 오로지 정원. 산책용 정원.


산책을 하다가 호수도 만나고 놀이공원도 구경하고 포토밭도 지나고.


   카페는 3일이 지나고 찾았다. 세계에 유일하다는 주차장이 없는 이케아가 숙소에서 세 정거장 떨어져 있는데 그 이케아 건물 5층에 있는 카페이다. 이케아에 밥그릇 2개와 젓가락 두 쌍을 사러 갔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이상할 정도로 테이블 간격이 넓어 마음에 드는데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없어 망할까 걱정이다. 우리 떠날 때까지만 버텨라.


   빈에 온 지 일주일이 되는 날 도서관을 찾았다. 빈의 중심가, 무려 합스부르크 왕가가 거주하던 호프부르크 왕궁에 있는 국립 도서관이다. 비록 하루 이용에 3유로를 내야 하지만, 이곳은 화장실 한번 이용에도 1유로를 받는 유럽이니까. 호프부르크 왕궁 화장실 세 번만 가면 그래도 본전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듣지 않아도 틀어 놓는 배경음악이 방 안의 공간을 채우듯 한 달간의 일정을 공원과 카페,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으로 채워 놓는다. 그 시간 사이사이에 알베르티나 미술관과 슈테판 대성당, 혹은 뮤직 페라인을 끼워 넣는다. 어쩌다 마음이 동하면 기차를 타고 옆 나라 다른 도시를 가보기도 하고.


   테이블에 올려놓은 탁상달력의 칸들은 휑하다. 칸을 꽉 채우지 않은 일정으로 한 달을 보낸다. 그날의 일정은 아침을 챙겨 먹으면서 생각해도 늦지 않다. 가볍게 차린 늦은 아침을 먹으면서 창밖 하늘을 본다. 금세 일정이 정해진다. 오늘은 도나우 강변을 따라 걸어보는 걸로. 갖다 붙일 이유는 많다. 하늘이 맑으니까, 비가 오니까, 날이 따뜻하니까, 바람이 부니까. 그렇게 여행은 일상이 된다.    

 



이번 매거진은 idle​​​​ 님과 함께 꾸려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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