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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Jun 01. 2020

따라와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감정 표현이 풍부한 아내에 비해 난 내색을 잘 안 하는 편이다. 듣기 좋은 말을 자주 하는 것도 아니고, 표정 변화도 그리 많지 않다. 결혼하고 1년쯤 지났을 때 아내가 말했다.

‘이제 좀 표정을 알겠어. 당신은 기분이 좋으면 입꼬리가 살짝 흔들려.’

내가 그랬던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니 없는 표정에서도 감정을 읽어낸다.




‘따라와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내는 이 말을 듣고 심쿵했다고 했다. 그렇게 낭만적으로 들렸단다. 심지어 나중에 인생을 같이 살 때 자신이 조금 뒤처지게 되더라도, 재촉하지 않고 천천히 기다려 줄 것 같았단다. 나를 바라보는 눈이 이때 이후로 달라졌다고 했다.


친하긴 하지만 아직 이도 저도 아닌 직장 동료일 뿐이었을 때, 간혹 밤에 메신저로 대화를 할 때가 있었다. 그날은 서로 어릴 때 좋아했던 노래 얘기를 했었다. 누군가가 노래 하나를 말하면 각자 멜론에서 노래를 찾아 동시에 재생시켰는데, 그렇게 하면 떨어져 있지만 같은 곳에서 함께 음악을 듣는 기분이 났다. 그러기 위해서는 메신저로 시간 체크가 필요했다.

‘지금 10초예요.’ ‘저도 막 10초 지났어요.’


내가 좋아했던 최성원의 ‘제주도의 푸른 밤’을 들을 때였다. 함께 노래를 재생시키고 시간 체크를 해보니, 내가 3초 정도 앞서 나갔다. 같은 시간으로 듣기 위해서는 서로의 시간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그때 한 말이 ‘따라와요. 기다리고 있을게요.’였고 아내는 지금까지도 이날 얘기를 하면 표정이 밝아진다.


사실 저 말은 아내의 감정선을 건드리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다. 내게 그 3초의 차이는 맞지 않는 오류이자 장애 상황이었다. 데이터의 싱크를 맞추는 일은 중요했다. 오류를 발견했으니 수정해서 정상으로 돌려야 했다.

‘싱크를 맞추어야 하니 제가 3초간 정지하고 있겠습니다.’

이런 뜻의 말이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될 줄은 몰랐다. 문과생의 감성을 이과생이 이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입꼬리만으로 표정을 읽어내고, 듣기 좋은 말이 없으면 스스로 찾아낸다. 아내에게 부족한 샘플에서도 의미 있는 데이터를 뽑아내는 능력이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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