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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Jun 08. 2020

실컷 손을 잡을 수 있어서 좋았어.

아내는 산책하는 걸 좋아한다. 함께 산책을 나서면 아내는 일단 손부터 잡는데, 산책하는 내내 잡은 손을 놓으려 하지 않는다. 무더운 여름날에 땀 때문에 잡은 손이 미끄덩 거려도 개의치 않는다. 한 번은 땀도 식힐 겸 슬쩍 손가락만 잡는 걸로 바꿨다. 그러자 아내는 잔뜩 서운한 표정을 짓고는 어릴 때 얘기를 했다.

‘길 가다가 내가 무언가 잘못해서 엄마가 화나면, 손가락 하나만 잡게 했어. 그럼 그게 서운해서 손 전체를 달라고 더 떼를 썼어.’

나란히 갈 수 없는 좁은 길이 나와 앞뒤로 걷더라도, 손은 잡고 있어야 한다.




사내연애는 당연히 몰래 해야 하는 걸로만 알았다. 회사 사람들에게 비밀로 하자는 서로의 약속도 없었으면서, 연애 초기에는 둘 다 그게 당연한 것처럼 조심했다. 연애 중이라는 사실을 회사 동료들이 알게 되는 날이 우리 관계의 마지막 날이 되는 줄로만 알았다. 항상 잘 웃어주던 아내의 표정은 굳었고, 뭐든 잘 들어주던 나는 아내의 말을 끊었다. 회사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애정표현은, 받는 사람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던 희미한 눈웃음뿐이었다.


퇴근 후 데이트를 할 때에도 조심스러웠다. 유명하다는 회사 근처 맛집은 피했다. 회사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가 맛보다 중요했다. 함께 손을 잡는 건 일단 주위에 아무도 없는지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할 수 있었다. 걷다가 저 멀리 앞에 누가 오는 게 보이기라도 한다면,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손을 뺐다. 보고 싶은 영화는 가장 늦은 마지막 회차를 예매했고, 극장의 불이 다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어야 손을 잡았다. 스스로 서로가 늘 경계하는 초식동물이 되어 주위를 살폈다.


자연스레 주말만 되면 아는 사람이 없는 다른 도시로 여행을 떠났다. 다른 도시에서는 주위를 살필 필요가 없었다. 사람들로 붐비는 유명한 맛집을 가도 걱정이 없었다. 결혼 후 언젠가 그 당시 다녔던 도시들을 얘기한 적이 있다. 천안은 순대국밥이 맛있어서 좋았고, 청주는 시내 곳곳에 유적이 많아 걷는 재미가 있어 좋았다. 아내는 그곳들이 좋았던 이유를 하나 더 보탰다.

‘실컷 손을 잡고 있을 수 있는 곳이어서 좋았어.’




아내는 여전히 손에 집착한다. 여행 가는 차 안, 옆자리에서 잠깐 잠이 들 때에도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분명 잠이 든 거 같은데 잡은 손의 힘이 빠지지 않는다. 집착의 시작이, 화가 나면 손가락 하나만 허락하시던 엄마에 대한 서운함 때문인지, 맘 편히 손 잡기가 어려웠던 사내연애 시절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이유가 무엇이 됐건 이제는 내가 먼저, 어차피 잡힐 손을 아내에게 내어준다.


주말에 집 앞 공원 산책을 하다 보면 가끔 손을 꼭 잡고 가는 노부부가 보인다. 걸음이 조금 더 느릴 어느 한 분에 맞춘 속도로 함께 산책을 즐기신다.  

‘우리도 나이가 들었을 때 저런 모습이면 좋겠다.’

30년쯤 지나면 우리도 저런 모습으로 보일까.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건 잡은 손을 놓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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