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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y Oct 24. 2021

무엇을 싹 틔울 것인가

Revised on Oct 24, 2021

항상 방 문 앞에 걸려있는 나의 가드닝 모자들


어느 날 갑자기 어린 왕자의 종이책 그대로 다시 읽고 싶었다. 책도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은 내가 방구석 책장이라고 하기도 뭐한 곳에서 정말 오래전 사둔 어린 왕자 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 얇은 책 한 권. 이 얇은 책 한 권이 뭐라고 이렇게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기억되고 있는 것일까. 나의 어린 왕자 책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책을 열어보니 책 종이 끝이 바래 있다.
 


종이 끝이 바랜 나의 어린왕자


한번 쓱 훑어보고 뒷면을 보니 당당하게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쓰여있다. 나는 어른이 된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렸을 때 읽은 그 어린 왕자의 줄거리 내용이 정말 지금은 다르게 느껴질까 궁금해졌다.
 

1시간도 안되어 얇은 책 한 권을 다 읽었다.  더 빨리 읽을 수 있는 두께의 책이었으나 어른이 되었다고 믿고 싶은 나는 한 줄 한 줄 나의 생각을 대입하여 재해석하려는 겉만 어른인 아이 같은 짓을 하며 시간을 낭비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제 나는 보아뱀만 기억하는 어린 나와는 다르게도 식물을 키우며 생긴 나의 생각을 바탕으로 어린 왕자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나는 어른이 되었다고 말은 못 하겠지만, 다행히도 한 없이 철부지였던 나를 식물이 키워준 덕에 나는 조금 자랐다.


내가 읽은 어린 왕자의 별에는 식물이 자란다.


 

처음엔 수줍은 듯 귀엽고 조그마한 싹을 태양을 향해 쑥 내민다. 그것이 무나 장미의 싹이라면 그대로 둬도 된다. 하지만 나쁜 식물일 경우에는 발견하자마자 가능한 한 빨리 뽑아 버려야 한다.

그런데 어린 왕자의 별에는 무서운 씨앗들이 있었다. 바로 바오밥 나무의 씨앗이었다. 그 별의 땅은 바오밥 나무의 씨앗 투성이었다.

바오밥 나무는 때가 늦으면 결코 없애 버릴 수가 없게 된다. 별을 온통 엉망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별이 너무 작고 바오밥 나무가 너무 많으면 별이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어린왕자-



가드닝을 시작할 때에는 잡초마저 사랑스러운 식물이었다. 잡초도 식물이라고 겨우 싹을 튼 저 식물을 억지로 제거하기 미안했던 마음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허브들 옆 조그마하게 싹을 틔운 잡초의 싹은 결국 빠른 속도로 자라 나의 소중한 로즈마리의 뿌리를 삼키고 줄기를 감아 숨통을 조여버렸다. 결국 소중한 걸 잃고 나서야 무엇이 중요한지 깨닫는다.
 

어린 왕자의 별처럼 나의 작은 별에는 좋은 씨앗과 나쁜 씨앗들이 가득하다. 매해 바람을 타고 날아와 나의 별에 자리 잡는다. 안타깝게도 씨앗일 때 좋은 씨앗과 나쁜 씨앗을 구분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어디에 자리 잡았는지 잘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 구분하기도 어렵다.
 

나의 별에 해가 들고, 단비 같은 비가 오고 가끔 강한 태풍이 와 흙을 뒤집어주면 숨어있던 나의 씨앗들은 이제 싹 틔울 준비를 한다. 가장 양지바른 곳에 조그마한 연두색 새싹이 나왔다. 아직 초보 가드너인 나는 외로운 나의 별에 나타난 저 귀엽고 여린 새싹이 아직 좋은 씨앗의 싹인지 나쁜 씨앗의 싹인지 모른다.



귀여운 나의 실론 시나몬의 새싹



설레는 마음으로 매일 물을 주고 말을 걸어본다. 갑자기 거세진 날씨에 상처라도 입을까 밤새 옆에서 바람을 막아주고, 거센 소나기가 내리면 잎이 찢어질까 쪼그리고 앉아 우산도 직접 씌워준다.


이렇게 열심히 키운 나의 새싹이 나쁜 씨앗의 새싹이었다. 수많은 씨앗들 중, 가장 먼저 나쁜 씨앗이 싹을 틔웠고 나는 그것도 모르고 온 정성을 다했다. 나의 작은 별 안에도 분명히 좋은 씨앗이 있을 텐데, 나쁜 씨앗의 싹을 먼저 틔워 준 나의 별을 원망했다. 이제 막 틔운 나의 첫 씨앗이 좋은 씨앗이 아닌 나쁜 씨앗의 싹이 먼저 나와 겁이 났다.
 

다행히도 저 나쁜 씨앗의 새싹을 뽑지 않으면, 내 별에서 빠르게 뿌리를 내려 무서운 속도로 자랄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자란 커다란 나쁜 씨앗의 나무는 더 이상 내 별에 따뜻한 햇빛도, 시원한 바람도 불지 못하게 막을 것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저 나쁜 씨앗의 싹이 자라 커다란 바오밥 나무가 되어 나의 별을 깊숙이 뿌리내려 나중에는 나 스스로 제거하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저 나쁜 씨앗의 싹이 더 깊이 뿌리를 내리기 전에 뽑아 버려야 하는데, 나는 저 나쁜 씨앗의 싹 뽑아보려 시도도 하지 않은 채 나의 별이 이미 커다란 나쁜 씨앗의 나무에게 잡아 먹힌 듯 포기하고 주저앉아 손을 놓아버렸다.


나쁜 씨앗의 새싹은 이제 물을 주지 않아도 잘만 자란다. 나의 걱정과 한숨이 나쁜 씨앗의 영양이 되어 더욱더 빠르게 자랄 수 있게 도운다.



항상 방 문 앞에 걸려있는 나의 가드닝 모자들


나쁜 씨앗의 싹을 힘겹게 뽑아도, 또다시 나쁜 씨앗의 싹이 날 수 있다. 나쁜 씨앗의 싹이 난 후 바로 좋은 씨앗의 싹이 자라라는 법은 없다. 나의 걱정은 또 다른 걱정을 낳는다. 아직 자라지도 않은 나쁜 씨앗들이 다른 곳에서 싹을 틔우려고 꿈틀대는 것이 보인다.


나의 생각이 현실이 되어 나의 별 한 구석에서 새로운 새싹이 땅을 박차고 콩알만 한 머리를 내민다. 저 새싹도 나쁜 씨앗의 새싹일 수 있다. 별의 주인인 내가 이미 새로운 새싹을 나쁜 새싹이라 생각하고있다.


이렇게 소중한 나의 별을 나쁜 씨앗의 새싹들로 가득차려 할 때, 어린 왕자의 별이 떠올랐다. 어린 왕자의 별은 바오밥 나무의 씨앗 투성이지만, 그중에 무나 장미와 같은 좋은 씨앗도 심어져 있었다. 그리고 어린 왕자의 장미는 어린 왕자가 자신의 별에서 살아갈 이유가 되어준다.


나의 별도 마찬가지이다. 어린 왕자의 별처럼 나쁜 씨앗이 좋은 씨앗보다 더 많이 심어져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나쁜 씨앗인지 확실해 지기 전까지는 내가 먼저 새로운 새싹에게 나쁜 씨앗일거라 단정짓지 않기로 약속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계속 나쁜 씨앗의 싹을 뽑으면 결국엔 나의 별 깊숙이 심어진 좋은 씨앗이 싹을 틔운다.
 

시간이 오래 걸리면 걸릴수록 나의 좋은 씨앗의 새싹은 더 소중해진다.
 

그때, 여리고 여린 나의 좋은 씨앗의 새싹을 누구보다 강하게 키워 나의 별의 뿌리를 가득 퍼지게 해야 한다. 나의 별의 좋은 씨앗의 싹이 뿌리가 가득 차면 나쁜 씨앗은 더 이상 싹을 틔울 공간이 없어진다. 혹여 어느 틈새에 싹을 틔우더라도, 내가 가진 좋은 씨앗의 싹이 자라 이미 튼튼한 나무가 되어 나쁜 씨앗의 싹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의 별의 자리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식물들과 나


용기를 내고 힘을 주어 나쁜 씨앗의 새싹을 뽑았다. 기대를 한만큼 실망도 크다했던가, 나쁜 씨앗이 자리 잡았던 곳에 구멍이 아주 크게 났다. 옆에 있던 흙으로 다시 덮어주니 완전히는 아니지만 걸려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는 메꿔졌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이제 그곳에는 더 이상 나쁜 씨앗이 자라지 않을 것이다.


나는 동화 속 주인공인 어린 왕자가 아니지만, 나의 별의 가드너로서 좋은 씨앗을 키울지 나쁜 씨앗을 키울지 결정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
 

좋은 씨앗의 싹을 키우는 것도, 나쁜 씨앗의 싹을 키우는 것도, 결국 나의 손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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