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sed on Oct 24, 2021
나무는 든든하고 우직하다. 말이 없으며 내 얘기를 하지 않아도 알아준다. 그리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주고 있다.
누군가 나에게 표정이 왜 그러냐며 무슨 일 있냐고 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서 표정이 어두운 건 사실이었지만 다시 그 가슴 아픈 사실과 기억을 내 입으로 다시 되새기고 싶지 않아 아무 일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과 잠시 긴장을 풀었을 뿐인데 그게 티가 났나 싶어 아차 싶었다.
결국 나의 힘듦을 말을 하나 안 하나 속으로는 쌓여간다. 소중한 나의 주위 사람들은 왜 말을 안 하냐며 화를 내기도 하는데, 나는 사랑하는 나의 사람들이 내 눈앞에서 날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그냥 그 이유 하나다.
그래도 나름 나만의 해소 방법들이 존재했기에 일정 시간이 지나면 훌훌 털고 잘 일어났다. 수영이나 달리기와 같이 아무 생각이 안 나게 해주는 운동이라던지, 며칠 동안 잠만 자기, 미친 듯이 식물 분갈이하기 등등.. 그리고 결국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지난 어느 날은 아무리 달려도, 잠을 자도 풀리지 않는 응어리가 생겨버렸다. 다시는 웃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으로 산 입구라고 할 것도 없는 좁은 흙길을 따라 들어가게 되었는데, 우연인지 선물인지 내 눈앞에는 내가 좋아하는 초록이 울창한 나무 숲이 펼쳐져있다.
등산과는 다른 기분이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아 길도 울퉁불퉁했으며, 바람이 불어 공기는 시원했다. 그리고 그 바람과 나뭇잎들이 부딪치는 소리들이 너무 아름다워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목이 빠지게 하늘만 바라봤다.
그냥 가만히 서서 주위 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니, 나무가 마치 내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듯이 그랬냐고 그렇게 속상했었냐고, 힘들었냐고 달래 주듯이 흔들렸다.
내가 내 입으로 힘든 이야기를 억지로 꺼내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잎사귀를 살랑살랑 흔들어준다. 거기에서 오는 향기로운 풀냄새는 또 내 기분을 한껏 올려준다.
나간 지 꽤 되었는데 하도 안 들어오니 전화가 왔다. 언제 들어오냐고.
"나 오늘 사실 되게 힘들어서 뒷산에 갔다가 정말 힐링했잖아."라고 하니, 상대방이 "너 힘들었었어?"라고 한다.
참 웃긴 게 저 대답을 듣고는 이번에는 힘든 모습을 걸릴 줄 알았는데, 몰랐었다고 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안심했다.
힘든걸 무조건 숨기는 것은 좋은 게 아니다. 도움을 요청하고 나의 상황을 공유하는 것은 건강한 행동이다.
그렇다고 해서 말하고 싶지 않은 나의 아픔과 상처를 억지로 꺼낼 필요도 없다. 그냥 가끔 힘든데 힘들다고 말하고 싶지 않을 때 이제 저 뒷산에 가서 나무에게 위로받을 수 있게 되어 기쁠 뿐이다.
작년 봄에서 한겨울 직전까지는 출근 전 새벽에 옥상에 가 물을 주고 식물을 살피고, 퇴근 후 집에도 들리기 전에 옥상에 가 다시 물을 주고 식물을 봤다.
그렇게 많게는 하루에 4-5번씩 옥상에 왔다 갔다 하니, 옥상이랑 정이 들었는지 슬픈 일이 있으면 그렇게 옥상에 가서 노래도 듣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한 여름엔 모기에 너무 물려 모기 패치까지 붙이고 울었다. 그래도 좋았던 게 내가 기른 여러 종류의 식물들이 옆에 있고, 날이 좋은 날에는 달이 너무 잘 보여서 그거 보느라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 짓을 작년 한 여름부터 정말 추워서 코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겨울까지 자주 반복했다.
올해부터 건물 사정으로 옥상에 식물을 키울 수 없게 되어, 이제 옥상에는 내가 쓰던 빈 화분 몇 개와 기존 화단에 심어진 배롱나무와 장미 몇 줄기가 애처롭게 남아있다.
몇 주 전 조금 속상한 일이 있어 조용히 옥상을 찾았다. 언제나 그렇듯 슬프고 속상한 일들은 예상하지 못한 때에 찾아온다. 더 이상 식물이 없고, 빈 화분과 흙만 널브러진 옥상에 가고 싶지 않아 안 간 지 꽤 오래됬었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옥상으로 가고 싶었다. 오죽했으면 싶었다.
비가 조금씩 오는 날이었고 해가 거의 질 때쯤이었는데 옥상 철문을 열고 들어가니,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정면 화단에 정말 누가 놓고 간 듯이 장미 한 송이가 피어있었다. 마치 내가 올 줄 알았다는 듯이 제일 잘 보이는 자리에, 허허벌판 화단에 정말 빨간 장미 한 송이를 피워줬다.
울컥하고 답답했던 가슴이 갑자기 뻥 뚫리진 않았지만, 장미를 가만히 쳐다보니 너무 아름다워서 속상한 일을 잠시 잊을 순 있었다. 마음도 조금 누그러진 듯했다.
사진을 찍고 정말 한참 쳐다보다 비가 갑자기 쏟아져 내려 집으로 왔다.
장미 한 송이가 뭐라고 위로를 하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항상 행복하고 기쁜 일이 가득하지 않은 이 세상에서 나를 위로해 주는 장미 한 송이라도 있는 게 어딘가 싶다.
결국 힘들고 슬픈 일은 지나가고, 다시 기쁜 일이 오면 웃을 것을 잘 아니까. 잠시 장미 한 송이를 만난 그날의 기억으로 버텨보는 것이다. 다시 행복할 그때가 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