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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랑의 책읽기 Jun 28. 2020

소외된 모든 것들을 향한 모험

<시와 타자의 목소리>, 황현산

[어떻게 살 것인가] 에 실린 황현산 선생님의 꼭지. 아마도 그의 글 중 (트위터를 제외하면) 가장 힘을 빼고 쓴 글이 아닐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거창한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하지 않고, 대신 그는 차분하게 ‘타자’와 ‘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모든 이야기 뒤에는, 그 이야기에 등장하지 못하는 존재가 있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것 같은 큰 목소리에서 우리는 소외되어 있지만, 외따로 벌어진 것처럼 보이는 당신의 사정으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유발 하라리의 명작 [사피엔스] 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는 “이야기”이다. 이 두꺼운 책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사피엔스가 진화게임에서 다른 종을 압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무기는 바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인류는 이야기를 만들어 서로 화합한다. 국가, 회사, 철학, 화폐, 이 모든 것은 자연에 없는 거짓 개념들이다. “내일 미국에 가려고 은행에서 달러를 환전했어”라는 문장에서 ‘내일’을 제외한 모든 단어는 인류가 만들어낸 허구의 상징이다. 이 허구적 이야기가 서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같은 방향으로 행동할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된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와 상징들은 그것들이 만들어지는 즉시 누군가를 소외시킨다.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미드는 그 피라미드를 쌓으면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을 소외시켰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를 기치로 내걸고 등장했던 미합중국의 민주주의는 여성과 유색인종을 소외시켰다. 한 사회를 정의하는 이야기는 그 이야기에서 정의할 수 없는 사람을 소외시키고, 나 자신을 정의하는 이야기는 역시 나의 어떠한 부분, 내가 감추고 싶거나 혹은 존재하는지도 잘 모르는 부분을 소외시킨다. 이 모든 소외된 것을 일컬어 “타자the others” 라고 부른다. 



> 사람은 누구나 내면에 세상에 절대로 드러내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완전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도, 아무리 도를 닦거나 수양을 한 사람이라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꽁꽁 숨겨놓은 자기만의 비밀이 있기 마련입니다. 허물없는 사이라면 “내가 생각해도 나의 이런 면은 맘에 안 들어”라는 정도의 이야기는 할 수 있지만, 딱 거기까지 만이지요. 절대 밑바닥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바로 그 부분을 가리켜 디 아더스 (the others), 즉 ‘타자’라고 이야기합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저마다 ‘나’라고 인정할 수 없는 부분을 가지고 있는데, 그 부정하고 싶은 ‘나’가 바로 타자입니다.
종교적 혹은 정치적으로 발전한 다양한 철학적 담론과 사상 체계들, 또는 문학에서의 미학적인 담론들은 대부분 우리 안에 있는 타자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질문입니다. 불교에서 미망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자기 안에 있는 타인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이고, 원죄 역시 자기 안에 있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도 밑바탕에는 자기 이해가 깔려 있었을 것입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전두환정권은 “한국을 찾아오는 외국인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성화봉송길과 비행기가 들어오는 길에 있던 상계동과 목동의 빈민촌을 철거한다. 이 가난한 사람들은 정권이 원했던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이라는 이야기에 등장하면 안 되는 존재들이었다. 30년이 흐르고 2018년, 어떤 신문에서는 평창올림픽 가는 길목 용산 빈민촌이 부끄러워 가림막이라도 쳤으면 좋겠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런 사회에서 경제성장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타자를 타자 아닌 것을 만드는 새로운 이야기들은 당연히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던 이야기들보다 더 복잡해 보이고 불편해 보인다. 하지만 새로운 이야기들을 익숙하게 만들려면, 그 불편함을 건져내어 계속 되풀이하는 방법 밖에 없다. 이전 글에서 영화 <조커>의 ‘단순함’을 싫어한다고 한 이유가 이와 비슷하다. <조커>는 언뜻 보면 소외된 자들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영화이다. 하지만 감독은 관객들이 가질 불편함을 두려워한 나머지 약자의 시시함을 걷어내고 약자의 폭력을 마냥 정당화시켰다. 결과적으로 <조커>는 자본주의의 약자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왜곡함으로서 그들을 더 소외시킬 뿐이다.



문학은 타자를 주체로 만들려하는 모험이다. 그 모험의 최전선에 시가 있다.


소외된 것들을 건져내는 새로운 이야기들이 필요하다. 이 이야기들을 만드는 것이 문학의 가장 큰 목적 중 하나이다. 문학은 철학, 경제학 같은 거대담론들이 가질 수 없는 유연함을 가지고 있다. 문학은 개인의 사소한 이야기 하나, 문득 나타나는 거리의 장면 하나에서 타자를 주체로 만드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 법이 어쩌고, 위에서 내려온 지시가 어쩌고 떠들기 시작하면 섬사람들은 더 이상 말을 못 하고 입을 닫습니다. 그런데 글을 못 읽는다고 해서 생각까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부조리한 부분을 논리적으로 표현할 방법이 없으니 그저 답답할 수밖에요.
문학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입이 되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이론들이 존재합니다…그런데 거기에는 농민들이 사정, 공무원들이 무시해버린 그 사정을 대변해줄 말은 없습니다.
문학이 바로 그 역할을 해주는 것입니다. 모두가 농민들은 법도 안 지키는 무지렁이라고 말할 때 문학은 그 농민들의 사정을 대신 이야기합니다. 철학도, 법률도, 경제학도 하지 않는 말을 시와 소설이 해주는 것이지요. 저는 거대 이론들에 맞서서 개인들의 사소한 사정을 어떤 형식으로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사회의 발전 정도를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황현산 선생님의 오래된 믿음: 세상의 진보란, 지금 세상에서 소외된 존재들이 더 이상 소외받지 않게 하는 것이다. 


> 문학이 사람들이 표현하지 못하는 지극히 사소한 사정들을 대신 이야기해주고 표현해주듯이, 우리 안의 타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교육을 받고 교양을 쌓는 일에 관해서는 온갖 방식의 말하는 법과 형식, 표현법 등이 개발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얼마든지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억압되고 감춰져 있는 그거, 밖으로 내보일 수 없는 그것들은 여전히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 안에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을 때가 더 많습니다.


시는 타자를 주체로 만드는 모험의 최전선에 있다. 거대담론의 반대편에서, 시는 아무런 이론도 요구하지 않는다. “밑도 끝도 없는 말과 리듬"의 힘이 우리를 살려낸다.


> 서울 아이들과 싸울 때 우리가 부르던 노래가 있었습니다. “서울내기 다마네기 맛 좋은 고래고기”라는 노래였는데, 다마네기는 양파입니다. 서울내기, 다마네기, 고래고기 모두 네 음절에 ‘기’로 끝납니다. 사실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밑도 끝도 없는 가사이지요. 그런데도 운율이 딱 떨어져 리듬감이 생기니까, 이 노래를 부르면 절로 힘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시는 온갖 방법으로 말을 할 수도 있고, 설득도 가능하며, 공격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 갇힌 것은 표현해주는 힘입니다. 시는 우리 안에 있는 타자, 우리 안의 소외된 부분을 밖으로 꺼내서 꺼져가던 불씨를 살려냅니다.


다시 말해 시는 소통의 기술이고 새로운 말의 전략입니다.


문득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자신 안에 숨겨져있는 존재는 개개인마다 다 다르다. 거대담론과 달리, 시를 읽는 독자들은  “같은 페이지”에 있을 필요가 없다. 같은 시를 읽는 사람이 정반대의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 이것이 시의 유연함에서 나오는 힘이다.


> 시를 읽다 보면 시가 사람을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합니다. 시를 통해 내안에 갇혀 있던 것들이 해방되기 때문입니다. 또 시가 가지고 있는 극단성은 나를 나라고 느끼게 했던 주체성을 깨부숩니다….어떤 철학자는 책을 도끼라고 말했지요. 저는 강구한 나, 변함없이 굳센 나를 깨부수는 것이 바로 시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나라고 주장했던 것들을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게 되는 경험이 시가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며, 또 그런 마음으로 시를 읽어야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를 깨부수는 것이 힘들어진다. 내 안에서, 사회 안에서 소외되는 것을 발견하고 건져내는 힘은, 거대담론에 휘둘리지 않는 끊임없는 성찰에서 나온다. 그 성찰을 이끌어내는 건, 예나 지금이나 좋은 책, 좋은 텍스트이다.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 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 프란츠 카프카, [변신]-저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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