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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박스 Oct 15. 2023

시계가 고장날 지라도(장편 소설)

17 : 온정의 시야

 이월의 짧은 등교 기간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업무가 몰리는 시기인지라 정신없었던 탓도 있겠지만, 올해 이월은 유독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 것도 같았다. 아이들은 곧 졸업식을 맞을 예정이었다.
 얼마 전에 본 환상의 잔상이 진하게 남은 나는 졸업식 축사에 데미안의 구절을 인용했다. 마침 이번에 졸업을 하는 그 아이의 글에 뭔가 화답을 하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합니다. 그 알은 새가 지내왔던 세계입니다. 새는 태어나기 위해서 하나의 세계를 깨트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앞으로도 수많은 세계를 깨고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해야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지쳐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안주하는 순간도 오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경험을 통해 점점 강해질 겁니다. 깃털이 망가지고 부리가 깨지더라도, 상처가 아물면서 더 큰 날개와 더 튼튼한 부리를 갖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과정 속에서 자라면서 그만큼 더 넓은 세상을 만나게 될 거에요.
 부디 여러분이라는 아기새들이 그렇게 언젠가 자라서 솜털을 덜어내고 근사한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화려한 공작새가 되어 찬란하게 반짝이고, 멋진 타조가 되어 드넓은 들판을 달리고, 용맹한 독수리가 되어 창공을 날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으로 졸업식 축사를 마치겠습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식을 마친 후 아이가 찾아왔다.
" 선생님, 아까 하신 말씀 정말 감사했어요."
" 선생님도 네가 쓴 글이 정말 좋았단다. 그래서 축사에서 한 말도 네가 쓴 글에서 영감을 받아서, 선생님이 읽었던 책에서 인용한 구절이란다."
" 어떤 책이에요?"
"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란다. 딱 너희 나이 즈음에 읽기 좋은 내용이지 않을까 싶구나. 교무실에 선생님 자리에도 한 권 있는데, 가져다줄까?"
" 아니에요, 제가 직접 사 읽어도 괜찮아요. 알려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
" 아니야, 선생님은 이미 다 읽었거든, 좀 낡았지만 필요하다면 가져가도 된단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을래? 선생님이 가져다줄게. 교무실은 지금 한창 바쁠 시기라 네가 들어오면 정신이 없을 수도 있거든."
"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기다릴게요."
 나는 교무실 쪽으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저 아이 정말 책을 좋아하는구나. 졸업할 때서야 알아주다니, 아쉽다.
 나 역시 최근 몇년 사이에는 기존에 비해 책을 읽는 시간이 줄었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참 많이도 읽었던 것 같은데. 그 시절의 가정집 컴퓨터는 으레 아버지 서재에 있었고, 스마트폰은 커녕 어린이는 기본적인 휴대전화조차 갖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부모님 휴대전화를 빌려서 게임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마저 미로찾기나 스도쿠 따위의 간단한 게임 정도만이 깔려있는 정도였다. 놀고 싶으면 책을 읽든지, 놀이터로 직접 나가든지. 친구가 없던 나는 양자 택일의 선택지에서 책을 읽는 것 밖에는 고를 수가 없었다.
 이제는 그마저도 상당히 상투적인 표현이 되었지만, 책 이외에도 선택할 수 있는 오락이 너무나 많다. 이제 게임은 데스크탑 뿐만이 아니라 노트북, 태블릿, 스마트폰, 게임기로도 즐길 수 있다. 책보다 재미있는 오락거리가 그렇게 많아졌는데 책을 선택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애들도, 그리고 나도 예외가 아니다.
 내가 가르친 아이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학부 시절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가축화된 동물들은 인간이 아주 오랜 세월 길들여서 그 몸집과 생활 반경을 줄인 결과물이라고.
나는 문득문득 내가 꼭 양치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아마 너른 들판에 울타리를 두르고 아기양들은 몰아가는 양치기라고. 오늘 내가 한 일은 단지, 그 울타리의 대문에 걸쳐두었던 빗장을 꺼내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 너머에 있는게 알 껍질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험준한 산맥이라면...
 상념에 젖어 걷는 사이 교무실 문 앞에 도착했다. 파티션 너머로 키보드가 타각타각 울리고 복사기가 돌아가는 익숙한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발걸음을 옮겨 내 자리로 간다. 파티션 벽면에 좋아하는 사진을 붙여두고, 낡은 소설책이 꽂혀있어 유독 고색창연한 느낌이 있다보니 눈에 띈다.
 나는 책상 위에 끼워둔 데미안을 꺼내 손으로 먼지를 탁탁 털어냈다. 너무 낡았는데, 거 좀 봉투에라도 넣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책등 쪽으로 책을 쥐어들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제법 둔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 자, 여기 데미안이야. 너무 낡은 책이라서 이런걸 줘도 될지 모르겠다만, 가져도 된단다."
" 감사합니다, 잘 읽을게요."
" 졸업하고 나서도 가끔 궁금하거든 놀러오렴. 여기는 사립학교라서 선생님은 계속 있을 예정이니까."
아이는 살짝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이내 등을 돌려 복도 저편으로 걸어나갔다. 그곳에 닿기도 전에 아이들의 인파에 묻혀 너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너희들은 오늘 이곳에서 시간을 걸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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