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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박스 Oct 19. 2023

시계가 고장날 지라도(장편 소설)

21 : 휘림의 시야

 매 방과후 도서관에 앉아있는 학생들은 정말 고요했다. 모든 소리는 사람이 아닌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마치 사람들은 소리를 빼앗기기라도 한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로 조용했다. 종잇장이 팔락팔락 넘어간다. 0.5mm 규격 샤프가 사각사각 지면을 걸어가는 소리만이 공간을 스쳐 지나간다. 사방에 앉은 이들 모두가 그렇게 해서라도 소리를 제외한 모든 것으로 의사 표현을 대신하고자 하는 듯 했다. 이것이 중학생들의 시험기간이구나.


 어느덧 벚꽃이 만발한 사월이었다. 중학교 입학식이 엊그제같은데 벌써 한달이 지났다.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더니 과연 그 말 그대로였다. 초등학교의 도서관은 본디 독서를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었지만, 중학교의 도서관은 달랐다. 학생들은 독서보다는 주로 조용히 공부를 할 요량으로 이곳을 찾았다. 거 다들 서가에 꽂혀있는 책에도 관심 좀 가져주면 좋을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 나 마저도 지금은 수업시간의 필기를 보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도서부원의 책임을 미룬 채 공부를 하고 있었으니, 그 마음은 실로 위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쩐지 머쓱한 이 기분을 아무도 몰라야 할텐데. 다행히 모두들 공부에 몰입한 나머지 내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도서관은 공부하기 편하도록 책상이 교실과 비슷한 구조로 배치되어 있었다. 줄 창가 자리에 앉은 아이는 과학 문제집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다만 하복 위에 억지로 가디건을 걸치고 다녔던 탓에 꿉꿉한 쩐내를 풍겼다. 애매한 날씨의 환절기인 탓에 그런 패션을 선택했으리라. 교실 위 천장에 걸려있던 선풍기가 묶어두었지만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의자에 걸어둔 가디건 자락을 가만히 흔들며 공연히 그녀의 악의없는 냄새를 퍼트리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서 창가로 걸어갔다. 최대한 냄새를 의식하지 않고, 소리를 내지 않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는 것이 내가 지금 이 공간의 모두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문득 뒷통수를 향한 시선을 느꼈다. 그 아이가 내게로 시선을 돌린 것이었다.

 ' 아차, 불편했나.'

 아이는 나를 몇초 정도 바라보더니 황급히 머리에 후드를 뒤집어 쓰고 가방을 챙겼다. 불편하게 할 목적은 아니었는데.

 나는 잠시 당황했다. 곧이어 본능적으로 나 역시 짐을 허겁지겁 챙겼다. 서둘러 나보다 먼저 짐을 다 챙긴 후 이제 막 도서관을 나서려던 그 아이의 뒤를 좇았다. 우리 두 사람의 당황이 맞부딫히는 소리가 순식간에 공간을 메웠다. 아마 우리의 뒤통수로 다른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꽂혔으리라. 미안함이 바람을 갈랐다.

 복도에서 그 애의 가방 윗 지퍼 부분에 터치 다운을 했다.

" 미안, 너 때문이 아니었어!"

 나는 터치 다운과 동시에 다급하게 지껄였다.

 " 앗, 아, 음..."

 처음보는 아이가 왜 이렇게까지? 그 아이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까부터 어째 사고뭉치가 된 기분이다.

 " 아니야, 너가 잘못한 건 없어. 그냥 네가 창문을 여는 걸 보고 내가 깨달은 것 뿐이지."

 아이는 이내 진정하곤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 직접 말하지 않았다는건 오히려 배려하려던 거잖아, 그렇지?"

 " 네, 그래요. 그 쪽이 불편하면 안되니까요..."

 나는 불현듯 내 말에 이상함을 느꼈다. 뭔가...

 " 잠깐, 혹시 몇학년이세요? 아까는 급해서 실수로 반말을, "

 " 삼학년이야! 나보다 선배일 리는 없으니 나는 무심코 반말을 했는데, 나야말로 미안하네."

 그 아이, 아니 그 선배는 삼학년이었다.

 " 나는 삼학년에 재학하는 호영이야. 너는 몇 학년의 누구니?"

 " 저는 일학년에 재학하는 이휘림이에요."

 " 그래, 안녕 휘림아. 배려해주어서 고마워!"

 " 아니에요. 저야말로... 누나는 바쁠텐데 방해한 것 같아서 미안해요."

 " 아냐아냐, 정말로 괜찮아. 혹시 도서관에 자주 오니?"

 " 도서부원이에요."

 " 그래서 맨 앞에 서있었구나. 서서 공부 정말 열심히 하더라. 누나가 배워야겠는데."

 " 아니에요, 실은 어려운 부분이 너무 많아서 아직 시험 범위를 다 훑지도 못했어요."

 " 그거야 기실 나도 그런 걸. 다들 어려우니까 공부하는거지. 이미 쉽게 알고있는 거라면 공부를 왜 하겠어. 그렇지 않니?"

 누나의 말이 나의 쑥스럽던 마음을 따뜻한 위로로 감쌌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 그것도 그렇네요. 그래도 시험기간이 끝나버리기 전에 제가 시험 범위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나도 그래. 누나도 도서관에 자주 올게, 같이 공부하지 않을래? 학년이 달라서 시험 범위는 다를테지만 내가 너를 조금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 그렇다면 저야 감사하죠, 누나. 고맙습니다."

 " 자, 나는 이제 정말 더워서 땀을 씻으러 어서 집에 가봐야 할 것 같아."

 " 그래요, 얼른 가서 씻고 쉬어요, 누나."

 " 또 보자, 휘림아."

 호영이 누나는 어느덧 생머리에 가깝게 풀어 헤쳐진 머리칼을 흐드르며 발길을 돌렸다. 독특하지만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그녀가 꿉꿉한 냄새를 풍기던, 내 시혜의 대상이라는 생각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타인과 소통하지 않는 자신만의 사고는 교차 검증이랄 게 없기에 도리어 확고하다. 근거없는 믿음에는 파훼할 근거 자체가 없으니 어찌 부수랴.

 그러나 살다보면 다면체의 모서리가 꼭 접하듯이 아주 상반된 이들이 스쳐지나가면서 만나는 지점이 있다. 우리는 방금 꼭 그런 교차로를 막 마주친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누나는 이리저리 각진 거친 암반을 적시는 민물이었다. 언젠가는 기꺼이 바위를 깨부수고 말 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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