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느질이 완성한 따스함, 책 표지
오후 5시, 전화가 온다.
"바빠요? 목소리가 왜 그래요?"
일교차가 큰 오후, 실내온도가 따스해져서 졸음이 쏟아져 무아지경의 닭이 되어가고 있을 때였다.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연약한 느낌이었나 보다.
"안 아파요. 그냥 졸려서요."
"그럼 다행이고 그럼 오늘 저녁 8시 반에 2층에서 만나요."
커피숍을 운영하는 사장님께서 브런치와 하이볼만 파는 이상한 가게를 오픈했다.
메인으로 운영하는 커피숍은 오후 4-5시가 되어야만 한가해지고 그때쯤 하고 싶은 말을 전화로 알려온다. 일주일에 한두 번 안부 인사를 전화로 주고받고 얼굴을 보며 커피 마시는 사이인데 안 보면 허전할 때가 있다.
오늘의 만남은 새로 오픈한 가게다.
그곳은 여자만 입장하고 여자들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남자가 입장하고 싶을 땐 여자와 동반 입장해야 하는 곳, 남자들은 이상하게 생각한다. 작은 동네에 여자들만 이용할 수 있는 편안한 클럽인 것이다. 상상력을 실제로 만드는 것.
주변에 몽상가가 많다.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은 비슷하게 만나지는 것 같다.
작업실을 정리하고 약속 장소로 향하니 9시다.
오늘은 10시에 문 닫는다 했는데 늦었다.
도착하니 입구 문이 닫혀있다. 답답하고 황당한 마음에 사장님에게 전화를 했다.
"사장님 왜 문이 닫혀 있어요?"
"원래 비밀번호 걸려 있어. 비밀번호는......"
여자만 입장하기로 한 가게에 가끔 막무가내로 방문을 원하는 남자분들이 계신단다. 예약을 하면 충분히 해결되고 여자와 함께 동반 입장한다는 규칙을 지키면 되는데 가끔 규칙을 무시한 분들은 있단다. 입구에 가드를 둘 정도의 규모는 아니고, 가드가 있지도 않으니 안전장치로 선택한 것이 번호키였단다.
작은 동네에서도 자기 차량으로 이동한다.
술은 마실 수 없으니 냉장고 안에 준비되어 있는 오렌지맛 탄산수 한 병을 마시기로 했다.
노란색 북커버가 입혀진 책을 꺼내고 사장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무리 못한 바느질 거리를 꺼냈다.
북커버를 보더니,
"나도 북커버 결정해야 하는데."
한 달 전, 패브릭으로 제작된 북커버를 보시곤 본인 것도 필요하다고 하셨었다.
사장님께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닌데 책을 좋아하는 분이라 북커버가 갖고 싶은 것 같다.
"나 북커버 말고 다이어리 커버로 할까?"
"어떤 걸 하시든 상관없어요. 사장님 필요한 걸로 하세요."
"근데 지금 만드는 거는 뭐예요?"
마무리할 시간이 부족해서 들고 나온 바느질 거리는 작은 동전이나 귀중품을 넣을 수 있는 주머니였다. 동전을 사용할 일이 없으면 사용할 일이 없는 주머니지만 현금을 쓰기로 마음먹기로 한 나에겐 필수품 같아서 만들고 있었다. 판매용이라면 조금 더 꼼꼼했겠지만 직접 사용할 꺼라 대충대충 삐뚤어져도 괜찮다.
"갑자기 그건 왜 만들어요?"
"드라마를 봤는데 드라마 속에 비슷한 주머니가 나와서 만들고 싶어 졌어요."
"그런데, 어두워서 바느질이 가능해요?"
또렷한 불빛이 아니어서 바느질을 걱정하는 사장님, 어차피 삐뚤빼뚤 손바느질인데 완벽하지 않으면 어때서? 마음 가는 대로 삐뚜름한 것에서 온기를 느낀다.
따스함이 없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차갑게 얼려질 것 같다. 고립되어 방치되어버린 존재, 사람의 관심에서 벗어나 버린 오래된 책은 외딴섬 같다. 책은 추위를 타지도 않고 차가워질 수도 없는데 냉장고 안에서 나온 탄산수처럼 차가워지는 것이 싫었다.
작업실 한쪽 책꽂이에는 신간과 오래된 책들이 뒤섞여 있다.
표지가 더러워서가 아니라 알려주고 싶지 않은채로 혼자 보고 싶다.
사람들 몰래 읽고 나만의 시간 속에서 책과 마주하고 싶다.
한때는 소중했지만 오래된 표지가 낡고 너덜거려 미안해지고 마음이 무거워진다. 한번 만들어지면 그 수명이 다할 때까지 변화를 갖기 못한다. 음료는 계절에 따라 차갑고 뜨겁게 골라 마실 수 있다. 사람도 겨울에는 따순 옷을 입고 여름에는 시원한 옷을 선택할 수 있는데, 책은 변화를 주게 되면 다른 쓰임새가 되는 것일까.
책에게 새로운 옷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오래되서 붙잡고 읽기 불편해질 때 책을 붙들고 있는 손을 위해 포근함을 알려주고 싶었다. 차가워진 것처럼 보이지만 이 옷(Book Cover)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너도 포근하고 상냥한 책이다'라는 것을 기억할 것 같다.
바느질이 책에게 새 생명을 줄 수는 없다.
바느질이 진실한 따스함을 전해주지는 않는다.
그래도 따스한 관계를 만들어 주고 싶다.
처음 만든 북커버 샘플입니다.
너무도 사랑스러운 노란색 원단이었지만 이제는 구매할 수 없는 원단입니다.
절판된 책처럼 원단도 구매 불가나 수입불가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만들어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