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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어사리 Mar 13. 2023

지하주차장에 길들여지다.

조금 불편하게 살아볼래요.

편리한 것들이 넘쳐난다.

스마트폰으로 가전제품의 상태를 확인하고 세탁기 예약시간을 정하고 에어컨 온도와 사용시간을 조절하고 아이의 스마트폰 사용시간을 확인할 수 있고 스마트폰 사용을 제한할 수도 있다.

주말아침 운동을 나가기 전, 집안에 있는 인공지능에게 현재 날씨를 묻는다.

"OO야~ 오늘 날씨는?"


인간이 만든 제품으로 일상을 제어할 수 있지만 날씨만은 인간이 감히 관여할 수 없다.

가끔씩 어긋나긴 하지만 참 신기한 것은, 날씨예측 어플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날씨예측 정확도가 떨어진다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슈퍼컴퓨터로 어떻게 이런 기상예측을 하냐고 의견들이 다양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꽤 정확하다는 생각이 든다.


주말 오전,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걷기 운동을 한다.

이번주는 구례에 꽃축제가 시작되었고 토요일 아침에는 대숲 걷기를 했기에 일요일 아침에는 아들과 집 근처 산을 오르고 싶었다. 씨름부 참여한 지 며칠 되었다고 움직이는 것에 꽤 재미를 붙인 것 같다. 아마도 외모에 민감해지기 시작한 10살이라서 자신의 몸매 변화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운동을 하고 안 하고 벌써 느끼고 있는 건가. 


인공지능은 오후 비소식을 전했고 스마트폰 웹에서는 오전 11시 비소식을 알려줬다.

그럼 점심 먹기 전에 잠깐 다녀오면 좋겠구나, 아들과 비오기 전에 다녀오자라고 전하니 아들은 좋다고 말한다. 9시 30분쯤 출발 10시 정상 도착!

우리는 코로나19때 처음 산을 올랐을 때보다 훨씬 빠르게 산을 올랐다.

그만큼 체력이 좋아졌다. 정상에 앉아서 멀리 풍경도 바라보고 지리산도 바라보고 사성암이 있는 오산도 바라보고 하늘도 올려다봤다.

구례 봉산에서 바라본 구례읍내

자연의 색은 참 다양하고 아름답다.

아들과 함께 잠깐의 대화도 나누고 할머니, 할아버지께 안부전화도 하라고 부탁해 본다.

이제 어떤 길로 내려갈까 함께 고민했다. 천천히 느긋하게 내려가는 길이냐 굽이치는 급한경사의 길, 우리가 올라왔던 그 길로 다시 가느냐. 아들은 성향이 그렇다. 천천히 느긋하고 몸이 안 아픈 것을 선택하고 싶어 했다.

빗방울이 땅바닥에 점을 찍었다. 하나 둘 셋 넷 점점 많아지고 세어보려 하면 사라지고 다시 생겼다.

바람막이 점퍼의 모자를 올려 쓰고 우리는 올라왔던 경사진 그 길로 내려갔다.


산을 중간쯤 내려오니, 비는 멈췄다.

아들과 나는 쉬엄쉬엄 장난을 치며 걷는다. 주변의 풍경과 어떻게 걷는 것이 더 안전한지 데이트하듯 걸어본다. 집에 도착하자 남편이, "생각보다 빨리 왔네."

아들과 나는 샤워 순번을 정하며 티격태격, 갑자기 쏴 아악~ 소리가 들린다.

10시 55분.

여름철 장대비 같은 빗소리가 들린다.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친다. 

'오늘 세차하려 했는데.'


샤워하면서 상상을 해봤다.

저 장대비가 세차장의 헹굼물이라고 생각하고 지금 내가 나가서 차에 거품을 칠하고 비가 계속 내리면 자동세차일까. 사람들이 미친년이라고 하겠지. 그렇게 상상만 했다.


오후 늦게 도서관에 반납할 책을 들고나갔다.

나의 붕붕이는 조금 하얗게 변했지만 더러움은 여전했다. 꽃가루와 황사가루가 한가득, 어디서 이런 모래먼지들이 묻어왔는지 세차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영하로 내려간다는데 지하주차장에 넣어야 할까.

오해 마시길, 내가 사는 곳은 주택이다. 주택이지만 근처 관공서 지하주차장이 있어서 편리하게 이용한다. 지인에게 지하주차장이 있는 주택이라 하니 부럽다고 했다. 퇴근시간과 주말에는 모두가 퇴근한 뒤라 정말 여유롭다. 이중주차나 외출 시 주차에 대한 두려움은 1도 없고 새벽 늦게든 아침일찍이든 오후든 그저 내가 주차하고 싶을 때 선택해서 주차하면 된다. 물론 평일 낮에는 조금 망설여진다.

고로 일반적인 아파트 주차장 같은 불편함은 없다. 대신 아파트 지하주차장의 장점은 없다.

스마트 센서로 연결된 아파트의 최첨단 지하주차장.

나의 퇴근과 외부 손님의 차량을 알려주고 비바람으로부터 차를 안전하게 그리고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지하주차장.

다음번에는 그런 지하주차장이 있는 아파트로 이사 가고 싶다.


정수 이, 픽사베이 출처

최첨단의 아파트 지하주차장, 그러기 위해선 최신 아파트로 이사 가야 한다.

그래 다음번엔 아파트로 갈까.

아니다. 당분간은 조금 불편하게 살아보려고 한다.

편리한 것은 돈이 많이 든다. 조금 불편한 것은 느리지만 정서적으로 경제적으로 합리적이다.

지금의 지하주차장 만족한다. 조금 불편하고 내 것인 듯 내 것이 아니지만 관리비가 들지 않고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이 아니니 관리비를 내지 않는 것도 아니니 아주 매력적인 조건이다.

그래 불편하지만 아주 매력적인 주차장, 태풍이 올 때 주차하고 집에 돌아오면 날아오는 돌을 맞을 가능성이 높은 지하주차장. 불편하지만 이렇게 길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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