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이는 처음 시작하는 새로운 무언가를 할 때에는 꽤 오랜 시간 마음의 준비와 적응이 필요한 아이다.
대한이한테 "이거 해볼래?"하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무조건 "아니요!"이다.
대한이가 4살이 되었을 때, 어린이집에 낮시간 동안만이라도 보내는 게 어떨까 하고 남편하고 의논한 적이 있다. 놀이터에 나가면 또래 친구들과 놀고 싶어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모습과 어쩌다 누가 먼저 자기한테 말 시켜줘서 같이 어울려 놀기라도 한 날은 아주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는 모습이 내 눈에 짠해 보였기 때문이다. 또래 친구들을 좋아하고 같이 어울려 놀고 싶어 하긴 하는데, 먼저 다가가는 건 늘 주저했다. 그러면서 나를 늘 등 떠밀듯 밀며 "엄마가 가서 먼저 말 시켜봐." 하고 내가 나서 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런 모습들이 늘 안쓰러웠고, 낮 시간 동안만이라도 어린이집에 가서 또래 친구들과 즐겁게 놀다 왔으면 했다. 그래서 우리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어린이집에 상담받으러 갔고, 구구절절 대한이에 대해 설명하는 나의 말에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해 주는 원장선생님의 모습과 대한이 담당선생님의 선한 인상을 보니, 믿고 맡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이가 등원하기로 한 첫날, 내가 호들갑 떨면 대한이는 더 불안하고 긴장할 것 같아, 나는 내심 긴장되었지만 겉으로는 티를 안 내려고 노력했다.
무덤덤하게 별일 아닌 것처럼 대한이의 손을 잡고 집 코 앞에 있는 어린이집을 가면서 대한이한테 1시간만 재미있게 놀다 오라고 했다. 아이는 긴장한 것 같았지만, 또래 친구들을 만난다고 하니 약간은 설레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이상하리만큼 등원 첫날은 무난하게 지나갔다.
하지만, 둘째 날이 되자, 본인이 생각했던(친구들하고 마냥 놀기만 하는) 그런 곳이 아니고, 또 엄마랑 떨어져 있는 잠깐의 시간도 불안했는지, 어린이집에 안 간다고 고집부리며 울기 시작했다.
안 가려고 하는 아이를 억지로 보낼 수 없으니 난감할 노릇이었다. 어찌어찌 어르고 달래 어린이집에 보내긴 했지만, 눈물 한 바가지 흘리며 들어가는 대한이의 모습을 보니, '이렇게까지 해서 어린이집에 보내야 하나.'하고 고민이 되기까지 했다.
원장선생님한테 이런 상황을 얘기하니, 이런 일은 아주 흔하고 자연스러운 상황이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아주 여유로운 태도로"적응기간이라 그런 거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다."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일주일의 적응기간이 지나고, 그 후로 몇 달이 지나도 대한이는 어린이집에 가고 싶지 않아 했고, 나는 원장선생님께 아이가 힘들어해서 더는 못 보내겠다고 말씀드렸다.
대한이 담당선생님의 말씀으로는 어린이집에서의 모습은 잘 지내고 밥도 잘 먹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린다고 하는데, 왜 아침에 등원할 때는 안 간다고 그렇게 고집부리고 우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도 내 맘을 아프게 하는 사진이 하나 있다. 어린이집에 잠깐 다닐 때, 크리스마스 행사로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주고 사진촬영하는 행사가 있었다. 그때 아이들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셨는데, 해맑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대한이만 슬픈 표정이었다. 산타할아버지가 직접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인데도 설레고 기뻐 들뜬 표정이 아니라, 세상 다 잃은 망연자실한 표정이랄까. 아무튼 4살 아이의 얼굴에서 나올 표정은 아니었다. 어린이집에서는 잘 생활한다고는 하지만, 사진 속 대한이 표정이 말해주듯 대한이 마음은 힘들고 복잡했나 보다.
결국 대한이는 어린이집 다니는 걸 잠깐 쉬기로 했다.
몇 개월 쉬고 5살이 되었을 때, 다시 가니 예전에 다녔던 곳이어서 그런지 몇 개월 전에 안 간다고 난리부리던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졌다. 그 대신 대한이가 불안하지 않게 미리 늘 얘기해줘야 했다. 엄마는 대한이가 어린이집에 있는 동안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낮잠은 안 자도 되니 3시간 정도만 재미있게 놀다 오라고 말이다.
실제로 난 대한이가 어린이집에 있는 동안 밖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그리고 대한이도 하원할 때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꼭 물어보며 확인하곤 했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차근차근 아이의 입장에서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니 대한이도 더 이상은 불안해하지 않고 어린이집에 잘 다니게 되었다.
그렇게 잘 적응하고 평화로운 날들만 계속되겠다 싶었는데, 우리 가족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가게 되었다.
익숙한 공간을 좋아해서, 새로운 곳에서의 적응은 남들보다 두배로 걸렸다.
대한이는 7살에 병설유치원에 다니게 되었다.
머리가 커지니 더 이상은 4살 때처럼 어린이집에 안 간다고 울고불고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학교 정문 앞에서 빠빠이 할 때면 대한이는 늘 슬픈 표정을 지으며 혼자 조용히 눈물을 훔치곤 했다.
엄마 마음 편하게 씩씩하게 들어가면 좋으련만, 꼭 저렇게 한껏 축 처진 어깨로 눈물 훔치며 들어가니 내 마음도 늘 불편했다. 하지만 몇 개월의 적응기간이 지나니 더 이상은 눈물 훔치며 들어가진 않았다.
난 병설유치원 예찬론자다.(우리 둘째도 5,6세 다 병설유치원에 다녔고, 7세인 지금도 다니고 있다.)
대한이가 살면서 유일하게 제대로(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닌 곳이 병설유치원이기 때문에, 항상감사한 마음이다.
그리고 병설유치원을 다닌 덕분에 초등학교 1학년 생활도 무난하게 잘 적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병설유치원에서 잘 생활하고 잘 적응한 덕분인지, 초등학교 3학년인 지금도 학교 생활을 아주 잘하고 있다.
학교 안에서 하는 활동에는 거부감이 없어, 대한이는 방과 후 수업도 월요일 빼고는 다 하고 있다.
태권도, 복싱, 피아노, 수영 등 학원에 보내고 싶어도 얘기 꺼내기가 무섭게 곧바로 NO라고 하는 아이라, 지금까지 제대로 된 학원을 보내본 적이 없지만, 대신에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은 뭐든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좋아하기에 학교에서 하는 프로그램들은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또 만족하고 있다.
"아이가 하기 싫어한다고 해서 무조건 안 시키는 건 아닌 것 같다. 하기 싫다고 해도 몇 번 다니다 보면 또 잘 다니게 된다."라는 말을 주변에서 종종 듣는다. 즉 학원 보내라는 말이다. 나랑 가장 가까운 남편조차 나에게 이런 말을 할 때면, 그래야 될 것 같은 생각과 괜한 조급함이 생겨 우리 아이의 성격, 성향은 무시한 채, 여기저기 좋다는 학원 설명회를 찾아다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영어를 강조하는 시대이니만큼 우리 남편도 영어교육에는 진심이다. 남편은 대한이가 영어만큼은 전문적인 학원에서 교육을 받았으면 하는 생각이 크다. 이 부분에서 나와 교육 가치관이 달라, 종종 의견 충돌이 생길 때가 있다. 늘 항상 가벼운 대화로 시작했다가 말다툼으로 끝난다. 내가 추구하는 영어학습방법이 대한이한테 큰 효과가 없는 것 같다고 느낀 남편은 올해는 무조건 영어학원을 보내서 제대로 영어공부를 했으면 좋겠다고 나를 설득했다. 아주 간절하고 절실하게 말이다. 많은 돈을 내고 영어학원을 다니는 게 썩 마음에 내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 방법도 정답이라고 할 수 없고, 대한이의 영어실력도 계속 제자리인 것 같아 우리 부부는 처음으로 대한이를 대형 영어학원에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원어민이 있는 학원으로 말이다. 주변 지인의 추천으로 방문 상담을 받고, 체험수업까지 받았다. 대한이는 다행히 체험수업을 아주 만족스러워했고, 무엇보다 재미있게 수업을 하는 모습이 나도 마음에 들었다. 대한이와 상의한 후 본격적으로 대형 영어학원에 다니기로 했다. 대한이 인생 10년 만에 처음으로.
영어학원 가는 첫날, 대한이를 학원 차 타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잘 갔다 오라며 손을 흔드는데, 가슴이 뭉클했다. 이제는 제법 컸다고 씩씩하게 혼자 걸어가서 차 타는 모습이 엄마로서 대견하고 뿌듯했다.
영어학원을 갔다 온 첫날, 대한이는 너덜너덜해져서 집으로 들어왔다. 수업 어땠냐고 들뜬 목소리로물으니, 세상 다 잃은 사람처럼 나에게 한 마디하였다.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아~ 그때 체험 갔을 때랑 정말 달라. 그냥 나 안 다니면 안 돼? 학교에서 더 열심히 할게."
어린 아들의 입에서 우울증이라는 단어까지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들 말에 충격을 받긴 했지만, 그래도 일단 영어학원 다니기로 결심한 이상 최소 한 달은 다녀보고 결정해야겠다고 생각하곤 아들에게도 그렇게 얘기했다.
하지만 결국 한 달이라는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대한이는 영어학원을 그만두었다. 늘 밝고 웃음이 많던 아들은 영어학원을 다니면서 웃음을 잃었고, 아들 말마따나 우울증 걸린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에 더 이상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그 대신 대한이와 약속했다. 학교에서 하는 영어 방과 후과정은 6학년까지 계속하는 걸로.
그렇게 우리 대한이는 영어학원대신 학교 영어 방과 후과정을 듣게 되었다.
일주일에 세 번하는 영어수업이지만, 대한이는 전혀 힘들지가 않단다. 오히려 영어가 재미있다고 한다.
하루는 학교 영어방과 후수업을 들으러 학교로 올라가다가, 우연히 예전에 다녔던 영어학원 차량을 보게 되었다. 대한이는 그 차를 보고는 나를 보며 씩 웃으며 얘기했다.
"엄마! 나 영어학원 안 다니고, 학교 영어 방과 후 들어서 너무 좋아! 진짜 엄청 힘들어보니, 학교 영어가 얼마나 고마운지 이제야 알겠더라고! 사람은 정말 힘들어봐야 하나 봐."
"그렇지? 만약에 영어학원 안 다녀보고, 학교 영어방과 후 하라고 했음 학교 영어방과 후도 안 한다고 했을 걸? 고생 한번 해보니, 학교 영어방과 후가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 이제야 알겠지?"
"응. 엄마!"
대한이와의 짧은 대화에서 난 많은 걸 깨달았다.
사람은 자고로 힘들어봐야 안다는 것을.
스스로 경험하고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지금도 학교 영어방과 후 과정을 즐겁게 잘 다니는 대한이를 보며 난 생각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대형영어학원에서의 경험은 충분히 가치 있었다고.
반드시 해야 되는 게 있다면, 일단 더 힘든 경험을 해보는 것이 좋다고.
그래야 지금 현재가 얼마나 감사한 지 알게 될 테니까.
나의 경우엔 어렸을 때 뭐 하나 배우고 싶어도 집에 돈이 없어서 배우지 못했다. 친구들이 하교 후 피아노 학원에서 피아노를 배우면 그 모습이 부러워 친구 학원까지 따라가 피아노 치는 친구 구경을 다할 정도로 그 나이 때 친구들이 배우는 것은 나도 똑같이 배우고 싶었다. 이것저것 배우고 싶은 건 많은데 그러지 못했으니, 그게 한이 되어 내 아이들만큼은 다른 아이들이 배우는 건 다 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대한이 또래 아이들이 하는 태권도, 피아노, 수영, 줄넘기 등등 대한이도 다른 아이들처럼 자연스럽게 다 했으면 했다. 하지만 대한이는 친구들이 한다고 해서 따라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본인이 하고 싶어야 하고, 또 그 마음을 먹기까지도 오래 걸리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대한이의 기질과 성향을 잘 몰랐을 때는 그런 대한이가 답답했지만, 대한이의 기질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니, 모든 게 다 이해가 되고 마음도 편해졌다.
다양한 경험과 도전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대한이한테 도움 되는 것이 있으면 한 번씩 권유할 때도 있지만, 대한이가 극구 싫다고 하면 나도 더 이상은 말을 꺼내지 않는다. 대한이의 성향과 기질을 잘 알고, 또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에 충분히 이해한다. "이거 해볼래?"하고 물으면 무조건 "Yes!!" 하는 나와는 다르게, 대한이는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할 땐 기다림이 필요하지만, 자신이 도전하고 싶은 무언가가 명확해지고, 확신이 생기면 망설임 없이 추진하는 대한이의 성격과 성향을 잘 알기에, 난 부모로서 믿고 기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