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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교사 Feb 13. 2022

위안부 서사가 쪽팔린 이유

<유럽의 교육>은 교육학 책이 아니라 프랑스의 대 문호 로맹 가리의 소설이다. 이 소설은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 치하의 폴란드를 배경으로 어릴 때 부터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며 성장하는 소년의 성장을 다룬다. 제목을 보고 교육학 책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 제목은 학교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성의 본질을 볼 수 있다는, 그래서 오히려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역설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문장 하나하나, 대사 하나하나가 너무 아름답고 훌륭해서 수십번 읽고 또 읽은 작품이다.


이 소설에는 ‘나데이다’라는 가상의 폴란드 영웅이 나온다. 나오기는 하지만 등장하지는 않는다. 나데이다는 독일군에게는 공포의 대상, 폴란드인에게는 희망의 상징이 된 레지스탕스 지도자의 별명이다. 하지만 누구도 직접 만나지도 보지도 못한 소문 속의 인물이다. 독일군은 다만 헛소문이 만든 가공의 인물이라고 깎아 내리고, 폴란드인들은 실존 인물이라고 믿으며 과연 누가 나데이다일지 궁금해하며 희망을 키운다. 주인공 야네크는 자기 아버지가 바로 나데이다라고 믿으며 고달픈 레지스탕스 생활을 견딘다.


 나데이다를 소탕하기 위해, 혹은 나데이다라는 상징을 소탕하기 위해, 아니면 나데이다든 뭐든 폴란드 레지스탕스를 한꺼번에 끌어내어 소탕하기 위해 독일군이 비열한 작전을 세웠다. 마을의 폴란드 여성들을 우르르 연행하여 어느 성에 감금한 것이다. 전쟁 중에 군인들이 민간인 여성들을 연행해 갔다면 그 결과는 뻔하다. 하지만 진짜 목적은 레지스탕스들을 숲에서 끌어내는 것이다. 분노한 레지스탕스들이 함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모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연인, 누이, 아내를 치욕스러운 상황에서 구하기 위해 숲에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레지스탕스들은 숲에서 튀어나와 성을 향해 무모한 돌격을 감행한다. 물론 그 중에서는 무모하다고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독신이 아닌, 아내나 연인을 남겨두고 온 레지스탕스들은 어김없이 그들이 감금당해 있는 성을 향해  돌격하다 목숨을 잃는다. 야네크의 어머니도 성에 감금되어 있었고, 야네크의 아버지도 성을 향해 돌격하다 목숨을 잃었다.


이 대목을 읽을 때 마다 일제 강점기때 종군 위안부를 떠올린다. 이상한 일이다. 종군 위안부, 아니 성노예 서사에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분명 우리나라의 공식 입장은 일본군이 위안부를 강제로 연행 했다는 것이다. 2차 성징마저 거의 드러나지 않은 위안부 소녀상은 천진하고 순결한 민간인 소녀가 강제로 끌려가 성노예 짓을 강요 당했다는 믿음을 강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아비가 있고, 오라비가 있고, 정인이 있고, 정혼자가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일본군이 한반도에서 수천명, 수만명이나 되는 젊은 여성을 강제로 끌고가는 동안 수만명이나 되는 아비, 오라비, 정인, 정혼자 중에 낫들고 도끼들고 경찰지서나 군청을 습격한 이야기는 왜 이렇게 찾기 어려운가? 우물가에 물길러 갔다 끌려가는 순이를 구출하여 도망가다 일본군 총에 맞아 얼싸안고 죽어가는 갑돌이 같은 종류의 이야기가 픽션으로라도 여러 종류 나와서 돌았어야 하지 않나? 심지어 반일 감정이 고조된 시기에 나온 영화에서도 끌려가는 여성들을 관음증의 대상으로 삼기 바쁠 뿐, 조선 남성들이 여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봉기 했다는 설정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정말 궁금하다. 여자들을 구하기 위해 무모하지만 용감하게 돌격한 폴란드 남성들 이야기처럼, 끌려가는 여자들을 구하기 위해 뭐라도 한 남자들 이야기, 대한 남아의 이야기는 대체 어디 있는가?


게다가 해방 이후 간신히 살아 돌아온 위안부 할머니들은 일제 강점기도 아닌데 무엇이 두려워 수십년간이나 침묵해야 했을까? 혹시 끌려갈 때 구출할 생각도 못한 주제에 간신히 살아 돌아왔더니 ‘더러운 X’라 그러며 손가락질 하기 바빴던 것은 아닐까? 청나라에 끌려간 여성들이 간신히 돌아오자 그들을 따뜻하게 환대하기는 커녕 ‘화냥년’이라 부르며 멸시하고 배척했던 조선 남성의 버릇이 되살아난 것은 아닐까? 문득 한국 남자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요즘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연애, 비혼 풍토 역시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는 한국 여성들이 이런 유구한 지질함의 전통을 가진 조선남성들에 대해 그 동안 누적된 수행평가의 통지표를 발부한 것일지도 모른다.


호랑이 해라서 드는 생각이다. PC한 생각은 아니지만 나는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의 차이를 인정한다. 물론 남자에게 남자다움을 강요할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도 남자다운 남자는 멋지지 않은가? 범같은 사내 말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범같은 사내가 여성에게 매력적인 법이다. 대체 이 조선반도에는 그런 사내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게 다 페미 때문이야, 불공정, 불공정” 거리며  징징 거릴 시간에 범같은 기상을 키워볼 생각을 할 수 없을까?


앗, 그런데 나는 범과 아니다. 나는 전형적인 남자다움과 거리가 먼 연약하고 섬세한 남자사람이다. 다만 범도 아닌 주제에 "남자가~" 타령하는 졸장부들과 놀기 싫어서 남자들과 어울리지 않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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