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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교사 Apr 05. 2024

서희는 정말 말싸움으로 이겼을까?

고려거란전쟁 이야기(2)


거란은 993년 10월에 고려를 침공했다. 침공 자체는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고려는 이미 몇달 전에 거란의 침공을 예상하고 있었고 나름 대비도 하고 있었다. 문제는 막상 맞부딪쳐 보니 거란군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 거란군의 지휘관은 소항덕(고려사에 기록된 손녕은 이름이 아니라 자다. 그런데 뭐 유비나 유현덕이나 이이나 이율곡이나. 소항덕이나 소손녕이나)으로 거란의 다섯 수도중 하나인 동경(요령성)의 유수로, 요즘으로 치면 인천광역시장쯤 되는 위치의 인물이다. 당시 동경은 고려와 여진이라는 거란 최대의 난적들을 견제해야 하는 중요한 위치였고, 소씨는 거란에서 황실을 제외하면 가장 지체가 높은 집안이다. 


도대체 소씨가 어떤 집안인가? 고려 못지 않게 거란도 족보가 좀 난잡하니 좀 소개해 보겠다. 거란의 황실은 야율씨다. 그런데 거란의 황후는 대대손손 바로 이 소씨 가문에서 나왔다. 유목민족들이 부족연합을 통해 건국하는 점을 감안하면 이 두 집안의 동맹으로 거란이 요나라로 설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당시 거란의 황제 성종의 어머니인 승천황태후 소씨는 사실상 거란의 실권자나 다름없었다. 승천황태후는 황후 시절에도 병약한 남편 경종 대신 정사를 관장했고, 그 아들 성종이 어린 나이에 등극하자 섭정으로 계속 권력을 이어나갔다. 이 승천황태후의 오른팔 왼팔이 친정 조카들인 소배압과 소항덕 형제다. 이들은 승천황태후의 남자형제(오빠인지 남동생인지 모르겠다)의 아들이다. 따라서 소배압, 소항덕 형제와 거란의 성종황제는 고종사촌간이다. 


이 형제는 우리나라에서는 서희에게 말빨에 밀려 물러난 소손녕, 강감찬에게 발린 소배압 이렇게 영 형편없는 인물처럼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문무겸비한 당대의 영웅들이다. 다만 형만한 아우 없다고 소배압이 소손녕보다 훨씬 뛰어나다. 이들 형제는 거란이 연운16주를 확보하고 송나라를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워 거란 군부의 최고 실세가 된 인물들이다. 


승천황태후는 이들을 각각 둘째딸, 세째딸에게 장가들려 사위로 삼았다. 즉 사촌간에 결혼이며, 그것도 겹사돈이니 오늘날 정서로는 흠좀무다. 뭐 고려는 이 보다 더 난잡했으니 남말할 처지는 아니고. 


여튼  요 성종에게 이 소씨 형제는 사촌이면서 매부이고, 이 형제들끼리는 형제이면서 동서이고 아무튼 그렇다. 어쨌든 고려에 쳐들어온 이 소씨 형제가 거란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존재였는지 확인하기 위해 족보를 털었다. 그냥 그런 장군이 아니라 그야말로 나라의 기둥급 인사들이 공격해 온 것이다. 거란으로서는 고려를 상당히 대접해준 셈이다.(이런 대접 전혀 고맙지 않다).


993년 압록강을 건넌 소손녕은 5만명 정도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고(기병 위주의 거란군을 감안하면 엄청난 병력이다. 탱크 1만대와 보병 10만명이 붙으면 누가 이길까?)  이걸 80만이라고 뻥을 치며 고려에게 항복하여 송과 관계를 끊고 거란 편이 되라고 요구했다.


고려는 이를 거부하고 성종이(공교롭게 고려도 성종이다) 직접 군대를 이끌고 평안남도 안주 일대에 주둔하고 선봉장 윤서안을 보내 평안북도 일대에서 거란군을 요격했다. 하지만 요격은 커녕 오히려 참패하고 윤서안이 사로잡히는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당황한 성종은 서둘러 개경으로 탈출했다. 이제 소손녕(이제 항덕이라고 안하고 익숙하게 손녕이라 부르자)은 청천강을 건너 평양으로 내려올 참이다. 평양이 떨어지면 개경까지는 자연장벽이 없기 때문에 그냥 하이웨이다. 


당황한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해야 한다는 주장과 평안도  땅을 떼어주고 화친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며 혼란에 빠졌다. 이때 #서희 가 강력하게 항전을 주장했다. 결국 성종도 서희의 말을 따라 항전을 결심했다. 


서희는 무엇을 믿고 항전을 주장했을까? 병자호란 당시 서인들처럼 그냥 막무가내 항전? 아니다. 서희는 문무겸비한 당대의 영웅으로 소손녕의 전략적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소손녕이 청천강을 도하한 자리가 서희의 눈썰미에 걸린 것이다. 


만약 소손녕이 평양을 치고 개경을 노렸다면 안주쪽으로 진격했어야 했다. 오늘날 경의선 철도도 그렇게 지나간다. 그런데 소손녕은 더 서쪽으로 돌아 거의 서해안을 따라 안융진을 공략했다. 평양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두고 멀리 해안도로로 간 것이다. 이것을 보고 서희는 소손녕의 병력이 고려와 전면전을 할 수준이 안되고, 다만 위력시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더구나 안융진에서 고려 장군 대도수(거란에게 멸망한 발해 왕족인 대씨다. 얼마나 기를 쓰고 싸웠을까?)가 소손녕의 진격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결국 소손녕은 다시 청천강 북쪽으로 군대를 물린 뒤 계속 "항복하라!"하고 소리만 질렀다. 






당시 고려는 소손녕의 군대와 정면대결로 격파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소손녕 역시 난공불락 평양성을 함락하고 개경까지 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안융진에서 패하여 고려 영토에서 버티고 있을 교두보 확보도 실패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적절히 체면을 세워주면 알아서 물러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딜의 가능성이 열려있는 셈이다. 


이런 정세와 전황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서희가 담판으로 소손녕을 물리칠수 있다고 간 것이지, 그냥 배짱을 부린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서희는 소손녕에게 명분을 안겨주고 대신 실리를 얻었다.


어디까지나 바쁜건 소손녕 쪽이다. 5만이라도 적은 군대가 아닌데, 이걸 몰고 고려땅까지 들어가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물러난다면 아무리 황제의 매부이자 사촌이라도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그러니 빈말일지라도 고려의 약속을 받아내야 하고, 서희는 그 약속을 해 주었다. 이런 약속들이다.


1) 고려왕이 조만간 날을 잡아(정하지는 않았다. 외교에서 구체적으로 날짜를 정하지 않는 경우 이건 대부분 거짓말이지만 대체로 알고도 넘어간다) 거란에 입조할 것이다. 

2) 송나라와는 단교하겠다.


그런데 오히려 당시 상황은 고려가 유리한 입장이었기에 이 명분을 공짜로 내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 댓가로 강동6주를 받아냈다. 고려왕이 거란에 입조하려면 여진을 제압해야 하고, 여진을 제압하려면 강동6주에 군대를 주둔해야 한다는 것이 핑계였다. 


소손녕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쓸수 있는 인심이었다. 강동6주는 원래 발해영토였고,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켰지만 실효적으로 지배하지 못하고 여진족들을 들끓는 구역이었다. 그러니 사실상 통치하지도 못하는  땅을 명분상으로만 내어주고 대신 외교적인 약속을 받아냈으니 상당히 남는 장사인 것이다. 말로는 내어준다고 했지만 고려가 당장 그 땅을 먹을수도 없다. 그러려면 여진족과 싸워야 하니까. 그리고 어차피 고려가 여진족을 제압하게 하는 것이 거란의 전략적 목표이기도 했다. 


이렇게 양쪽이 모두 이득이라고 생각했기에 딜이 성립되었다.


고려는 빈말의 약속을 내주고 땅을 얻었으니 이득이다.

거란은 어차피 지배하던 땅도 아닌 곳을 내주고 약속을 얻었으니 이득이다.  


외교란 이렇게 서로 자기가 이득을 봤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고, 서희는 이 맥을 정확히 짚었다. 실제로 소손녕은 거란에 돌아가 고려가 송과 단교하고 여진과 대결하도록 만들었다고 보고하여 큰 상을 받았다. 


그런데 거란이 속았음을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희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그랬다고는 하지만 거의 10년 걸렸다) 이 지역의 여진적을 제압하고 강동6주를 요새화 하는데 성공했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이 지역은 거란이 고려를 침공하기 위해 반드시 지나가야하는 곳이다. 누가 봐도 이 강동6주의 요새 배치는 여진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강동6주 요새화를 마친 뒤 고려는 여진과도 적절히 화친하고 송과도 몰래몰래 무역을 하며 관계를 유지하는 박쥐짓을 하고 있었다.


속았음을 직감한 요 성종은 문자 그대로 빡이 돌았다. 그리하여 고려의 가장 큰 재앙이 된 거란의 2차 침공이 예고되었다. 


참고로 소손녕은 998년에  저세상으로 갔다. 병사나 전사가 아니라 아주 쪽팔린 죽음이다. 궁녀와 바람 피우다 들켰고, 그 사실을 안 아내(즉 황제의 누이)가 울화병으로 죽고 만 것이다. 빡친 태후는 이를 용서하지 않고 소손녕을 처형해버렸다. 딸을 죽게 만들었는데 조카라고 용서 되는게 아니다. 더구나 공주의 남편은 공주가 죽더라도 재혼조차 못하는 것이 법도인데  감히 외도를 했으니...


그러나 그 형 소배압은 여전히 건재했다. 이제 거란의 진짜 최고수가 출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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