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장편소설 디누 1부 11화
어린이 디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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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요. 증인! 지금 우리는 디누의 삶을 조사하자고 여기 와 있는 것이지 증인 가족사를 쓰자고 온 게 아닙니다. 도대체 디누는 언제 나옵니까?”
재판관이 성을 내며 말을 끊었다. 이런 답답한 사람 같으니라고. 누가 한국인 아니랄까봐 성질 급하긴. 나도 짜증을 냈다.
“밑도 끝도 없이 정우가 나올 수는 없죠. 내가 그 이름을 어떻게 먼저 알고 있었는지, 어떤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는지 이런 배경 설명 없이 그냥 불쑥 정우를 만났다, 친구가 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원하십니까? 아니 그 보다도 저는 인터뷰이지 피고나 증인이 아닙니다. 댁은 작가지 재판관이 아니고. 대체 왜 내가 이렇게 취조를 당해야 하는 거죠?”
“그건 나한테 따지지 말고 증인의 초자아에게 따지도록 하세요. 나는 증인의 초자아가 만든 형상이니 말입니다. 증인의 초자아가 재판관을 원하는 만큼 나는 재판관이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재판관이 아니라 예수님, 부처님 형상을 만드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만. 자, 그러니 말 돌리지 마시고, 디누가 언제 나오는지, 그거만 말씀하세요.”
“서두르지 마십시오. 그렇게 겁박만 하시면 기억이 더 희미해집니다.”
“그럼 증인 하고 싶은 대로 이야기 하세요. 단 오늘 안에 끝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제 어머니 나오는 부분까지 했습니다. 이제 정우 어머니가 나올 차례입니다.”
나는 다시 기억을 이어 나갔다.
내 어머니가 서울 출신의 이른바 신여성, 전문직 여성이었던 것과 달리 정우 어머니는 안동 지역 대지주의 딸로 공부보다는 대학 졸업장이라는 장식품을 얻기 위해 그 지역 대학교 가정관리과를 다녔던 전형적인 양갓집 규수였다. 양가 합의에 따라 재학 중 영길과 혼인하여, 스물 둘에 첫 딸 미우를 낳았다. 요약하면 신부 수업 잘 받은 지방 유지 딸이었다. 하지만 서울 엘리트인 내 어머니 눈에 정우 어머니는 다만 시골뜨기에 불과했다.
나는 어머니가 왜 그렇게 정우 어머니를 의식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여자들이 서로를 의식하고 대결할 경우, 그 피해는 본인들이 아니라 고스란히 자녀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자녀는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엄친아’ 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엄마들의 경쟁 덕분에 나는 말 배우기가 무섭게 정우와의 대결을 강요 받았다. 정우가 신동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들려올 때 마다 나의 놀이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고, 강요되는 학습의 강도는 지수함수적으로 높아졌다.
어린이 집이 없던 시절이라 어머니는 나를 약국에 데리고 가서 약국 귀퉁이에서 그림책을 보며 놀거나 공부하도록 하고, 퇴근길에 집에 데려왔다. 집에서 약국까지, 약국에서 집까지 가는 내내 어머니는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신기하게도 시작은 다 달라도 끝은 같았다.
“정우를 이겨라!”
이런 식으로 나는 국민학교 들어가기도 전에 얼굴도 모르는 정우를 상대로 적개심을 불태우고 필승의 결의를 다졌다. 때때로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면서 행여 느슨해 질지도 모르는 나의 전의를 되살렸다.
“공부 열심히 안 하면 학교 가서 정우한테 반장 뺏긴다. 정우가 반장 되면 넌 정우 심부름이나 하면서 학교 다녀야 해. 신발 갖다 주고, 가방 들어다 주고.”
공부만 열심히 한다고 끝날 경쟁이 아니었다. 정우가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자 나도 피아노 학원에 끌려갔다. 물론 어머니는 나를 음악가로 키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정우가 하는 걸 내가 못한다는 것 역시 용납할 수 없었다.
피아노는 공부보다 훨씬 더 큰 스트레스를 주었다. 진도, 점수, 등수에 집착하던 어머니는 피아노에도 이 기준을 적용했다. ‘체르니 50번’ 배우는 아이는 ‘체르니 40번’ 배우는 아이보다 우월했고, 같은 ‘체르니 50번’ 배우는 아이라면 하나라도 더 높은 번호를 연습하고 있는 아이가 우월했다. 그래서 피아노 학원만 다녀오면 “오늘은 몇 번 쳤어?” 를 체크하면서 진도가 정우보다 빠른 지 늦은 지 확인했다.
당연한 결과지만, 나의 피아노 진도는 도저히 정우를 따라갈 수 없었다.
“내일 체르니 다음 번호 못 나가면 혼날 줄 알아.”
어머니의 엄명 때문에 손가락 노가다 연습을 할 때 마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정우를 원망했다. 정우만 이 세상에 없었으면 이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정우만 없었으면 어머니가 공부하라는 잔소리, 피아노 치라는 잔소리도 덜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권정우. 이 이름은 나의 유년기에 덧붙여진 저주나 다름없었다.
마침내 국민학교에 들어가자 저주는 실질적인 재앙이 되었다. 하필이면 나는 정우와 같은 국민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어머니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정우와 비교했다. 받아쓰기를 몇 개 맞췄는지, 구구단을 몇 단 까지 외웠는지 체르니를 몇 번 까지 쳤는지 등.
국민학교 2학년 때 마침내 시험이라는 것을 쳤다. 드디어 실전 대결이 벌어진 것이다.
난생 처음 쳐 보는 시험이라 뭐가 뭔지 몰랐지만 어느 날 아침 담임 선생님이 등교하는 나를 별안간 꼭 껴안았다.
“전교 1등을 했구나. 정말 기특하다.”
그리고 나는 애국 조회 시간에 전교생 앞에 나가서 우등 상장을 받는 경험을 했다. 그때 처음으로 정우의 얼굴을 봤다. 공동 수상자였던 것이다.
상장을 들고 우쭐한 기분으로 집에 갔지만 어머니의 반응은 싸늘하다 못해 오히려 야단을 쳤다.
“아니, 한 문제만 더 맞춰 올백을 해버렸으면 정우보다 잘했을것 아냐? 대체 왜 틀려, 틀리긴?”
이후 어머니는 매 시험마다 몇 개 틀렸는지 체크해서 정우 어머니와 서로 견줘 보았는데, 두 어머니 모두 자기 아들 점수를 실제보다 높여 말했기 때문에 누구 아들이 더 잘했는지 끝내 알지 못했다.
어쨌든 정우 어머니한테 어머니가 알려준 내 점수는 2학년 첫 시험 때 하나 틀린 것 외에는 늘 올백이었다. 정우 어머니가 알려준 점수 역시 모두 올백이었을 것이다.
국민학교 3학년 무렵 강남 개발 열풍이 불었다. 중곡동에 살던 우리 집도 군자동에 살던 정우네 집도 모두 잠실로 이사 갔다. 당시 새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고 있던 곳은 여의도, 반포, 잠실 세 군데라 성동구(당시에는 광진구도 성동구였다)에서 제일 가까운 잠실로 건너 간 것이다.
천만 다행으로 학교가 갈렸다. 나는 잠일 국민학교, 정우는 신천 국민학교로.
달콤한 평화의 시기가 왔다. 하지만 평화란 전쟁 중 잠시 쉬는 시기라는 냉소적 정의처럼, 평화의 시기는 딱 한 학기 만에 끝나고 말았다.
잠일국민학교의 과포화 상태가 화근이었다. 4학년1학기가 끝나갈 무렵, “지금부터 호명하는 학생은 가방을 싸서 운동장으로 나오세요. 아무개 아무개….” 이런 방송이 나왔다. “4학년3반 권오석”이라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가방을 싸서 운동장에 나갔더니 100명 정도 되는 아이들이 운동장에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나와 있었다.
처음 보는 선생님이 오더니 호루라기를 불었다.
“자, 어린이 여러분 두 줄로 서세요.”
얼떨결에 나를 포함한 100여명의 아이들이 엉기성기 두줄로 섰다.
그러자 그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리드미컬하게 불면서 제자리 걸음을 시키더니 앞으로 가기 시작했다.
“자, 이제 신천 국민 학교로 선생님 따라 걸어갑니다, 하나 둘 하나 둘.”
100여명의 아이들이 줄래줄래 선생님 뒤를 따라 걸었다. 찻 길을 하나 건너, 새로 지은 잠실 주공5단지 단지를 지나 걷다 보니 벽돌로 지은 학교 하나가 나타났다. 신천 국민 학교였다.
내 눈에 그 학교는 거대한 그림자로 보였다. 바로 정우가 다니는 학교였으니 말이다. 이렇게 평화가 끝났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자, 전학생을 소개하겠습니다. 잠일 국민학교에서 온 권오석입니다. 공부를 아주 잘하는 학생이라고 들었어요. 환영해 주세요.”
새 담임 선생님이 이렇게 나를 소개할 때 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곧 이어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나왔다.
“처음 와서 어색할테니까 반장 옆 자리에 앉아서 도움을 받는게 좋겠지? 권정우.”
“네.”
“네가 반장이니까 도와주렴.”
맙소사. 새 학급에 정우가 있었다. 더구나 반장이었다. 사정을 알 턱이 없는 새 담임선생님은 전학생의 적응을 위해 나를 반장인 정우 옆 자리에 앉혀 버렸다.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 어머니가 겁 주던 말이 다시 귀 속에서 앵앵거렸다.
“정우가 반장 되면 넌 정우 부하 되는 거다. 물 가져와 그러면 물 갖다 주고, 신 가져와 그러면 신 갖다 줘야 한다.”
이게 실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덜컹 같은 반이 되어 버렸으니 냉혹한 진검 승부가 펼쳐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두 엄마의 아들 점수 뻥 튀기는 이제 어림 없는 일이 되었다.
불행히도 나는 전학 가서 치룬 첫 시험에서 1등을 하지 못했다. 정우는 약이라도 올리려는 듯 1등을 했을 뿐 아니라, 성적 우수자 대표 수상까지 하고 말았다.
기막힌 소식은 빨리도 전해졌다. 아마 정우 어머니가 득달같이 약국에 전화 걸어 자 약을 올렸을 것이다. 집에 가 보니 이미 어머니가 허연 몽둥이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정우가 하필이면 반장인 것도 겨우겨우 참았는데 1등마저 빼앗겼으니 어머니 입장에서는 재앙도 이런 재앙이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날로 정우 타도 계획을 세워 실천했다. 그 출발점은 집에 있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었다. 정우 어머니가 집에서 교육에 전념할 수 있는데 자신은 일 나가느라 집에 없는 시간이 많다는 것이 핸디캡이라 여겼던 것이다.
어머니는 약사를 고용하고 오후에 퇴근했다. 덕분에 나는 학교 갔다 와서 어머니가 퇴근하기 전까지 잠깐 누릴 수 있었던 자유시간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온 집안이 계엄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정우의 존재가 꼭 나쁜 영향만 준 건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나에게 훌륭한 도시락 반찬을 선사하기도 했다.
고맙게도 어머니는 정우 도시락에 대해 종종 물어 보았고, 나는 실제 정우의 도시락과 상관없이 내가 먹고 싶은 반찬을 말했다. 어머니는 정우 어머니에게 질 수 없다는 각오로 무조건 그 반찬을 마련해서 도시락에 담아 주었다.
사실 정우 도시락은 경북 시골 출신인 그의 어머니 솜씨 그대로 투박하고 검소했다. 하지만 나는 당시 내가 알던 온갖 산해진미의 이름을 동원해서 정우 도시락을 창조했다.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뭔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정우가 오늘 그거 싸 왔어요.”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되었다.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정우 어머니에게 지지 않기 위해 내가 읊어대는 온갖 요리를 다 만드느라 고생을 했다. 약사 답게 어머니는 어떤 요리 이름을 대도 일단 레시피만 구하면 재료를 조합해서 척척 만들어 냈다. 왜 식품과 의약을 같은 관청에서 관할하는지 이유를 알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