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그래도 나는 저 세 사람을 핵심 인터뷰이로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다만 세 사람이 모두 지구 여러 군데에 흩어져 있으니 그게 문제였다.
미우 누나는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치명적인 골육종 수술을 한 뒤 요양을 위해 콜로라도에 갔다가 아예 볼더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덴버에서 음악 교사생활을 하고 있었다. 원래는 재활 마칠 때까지 놀면 뭐 하냐 하는 생각에 시작한 교사 생활이었는데, 무슨 계기가 있었는지 아예 프로 연주자를 은퇴하고 음악 교육자로 길을 굳혔다.
아녜스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일하고 있었으니 로스 엔젤레스 근방에 살고 있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한창 잘 나가는 연주자인 지네트였다. 집은 파리에 있지만 사흘에 한 번씩 머무는 도시를 바꿔가며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연주하는 중이었다.
순간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너무 뻔한 생각이라 그동안 이걸 대체 왜 몰랐지 싶어 이마로 벽을 두드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랬다. 나는 눈뜬 장님이었다. 제일 중요한 인터뷰이는 멀리 있지 않았다.
그 사람은 누구냐 하면, 정우와 매우 각별한 사이로, 초, 중, 고, 대학교를 같이 다녔고, 심지어 대학원도 같이 다닌, 그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다. 정우 뿐 아니라 누나 미우와도 각별한 사이였던 사람이다.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권오석이다.
솔직히 정우에게 권오석 외에 친구가 있기는 했을까? 적어도 한국 국적 가진 남성 중에?
아니 거꾸로 권오석에게 정우 외에 친구가 있기는 했을까?
두 사람 공통 친구인 성진이 있었지만, 진은 고등학교 때 친구이며, 대학 졸업 이후에는 교류가 줄었다.
대학 졸업 후에도 서로 집을 방문하고,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나중에 두 가족이 카니발 한 대에 뭉쳐 타고 여행도 다니며 형제처럼 지낸 권오석과는 비교할 수 없다.
답이 나왔다. 공연히 쓸데없는데 찾아 다니며 막장 드라마적 상상이나 하지 말고 권오석 이 녀석부터 꼼꼼하게 인터뷰 하자. 권오석이 권오석을 인터뷰 하는 거다.
한 권오석 질문자, 다른 권오석은 답변자.
나한테는 그렇게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소설 구상할 때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해 나의 반쪽을 잘라 서로 다른 역할들을 맡기고 질의응답을 하곤 했으니까.
조용한 장소를 찾아 호흡을 가다듬고 어깨를 몇 번 돌려 본 뒤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판사라도 된 양 근엄한 목소리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권오석 박사. 나오시죠.”
그리고 역할을 바꾸어 법정에 끌려 나온 것처럼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마치 진실되지 않게 보일까 두렵기라도 한 양 흔들리는 눈동자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다시 판사가 되어 물음을 던졌고, 다시 증인이 되어 열과 성을 다해 대답했다. 어느 정도 대화가 오고 가면 이번에는 서기가 되어 그것을 받아 적고 정리했다.
아무리 익숙하다고는 해도 이렇게 혼자 세 사람, 네 사람 역할을 하는 게 제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아마 이 작업을 1년만 더 했으면 나는 정말 정신분열증, 아, 요즘 말로 양극성 인격장애에 걸리고 말았을 것이다. 슈테판 츠봐이크의 소설 ‘체스’ 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당시 썼던 신문 속기록(?)의 일부를 소개한다.
“디누와 언제부터 알고 지냈습니까?”
“아, 저는 디누라는 이름이 낯설고 입에 붙지 않습니다.”
“인정합니다. 그럼 권정우를 처음 만난 것은 언제입니까?”
“국민학교 4학년 때입니다.”.
“그때 처음 알았습니까?”
“아닙니다. 권정우라는 이름은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요?”
“음, 그러니까.”(잠시 침묵)
나는 ‘권정우’ ‘디누’라는 두 개의 검색어로 수십 년 전 기억 창고를 필사적으로 뒤졌다. 온갖 기억의 조각들이 오래된 책장에서 무너져 내리는 책과 먼지처럼 튀어나왔다. 이 먼지 처럼 많은 정보가 마구 뒤섞이자 그 동안 정우에 대해 정확한 정보라고 믿고 있었던 것들마저 헷갈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내가 정우를 처음 만난 때 같은 가장 기초적인 정보마저 혼란스러워졌다. 국민학교 4학년 때 같기도 하고 1학년 때 같기도 했다.
1학년은 대체 뭐고 4학년은 또 뭘까? 3년이라는 시간은 오차 치고는 너무 컸다. 더구나 국민학생(초등학생)의 3년이다. 7살 짜리 1학년에게 3년은 살아온 삶의 거의 절반으로 어른으로 치면 수십년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일단 1학년은 맞다. 나는 정우와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같은 학교에 다녔다. 그 때 오며 가며 스쳐 보았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그걸 만났다고 하긴 어렵다.
4학년 역시 맞는 말이다. 내가 정우를 처음 본 것은 1학년 때였지만 서로를 의식하며 얼굴을 마주 본 것은 그리고 친구가 된 것은 4학년 때 같은 반이 된 이후의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얼른 이 사실을 이실직고했다.
“정정합니다. 처음 만난 것은 국민학교 1학년 때였지만, 4학년때 처음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때 같은 반이 되었거든요.”
“인정합니다. 그럼, 이후 권정우와 또 같은 반인 해가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중학교 2학년, 고등학교 1학년, 2학년, 이렇게 같은 반이었습니다. 대학교 때는 각각 사범대학, 음악대학으로 갈라졌지만 대학원은 같은 사범대학을 다녔습니다.녀석이 음악교육으로 학위를 받았거든요.”
“그것 참 대단한 인연이군요. 법정에서 이런 말 쓰기가 좀 뭐하지만, 그 뭐냐.”
“불알 친구.”
“어허, 법정에선 언어 사용에 유의하세요.”
“네. 죄송합니다.”
“다른 적당한 말은 없습니까?”
“죽마고우라 하겠습니다.”
“인정합니다. 그것으로 채택하겠습니다. 그럼 권정우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언제였습니까?”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국민학교 들어가기 한참 전. 말을 배우자 마자 정우 이름 부터 들었다고 하면 좀 과장일까요?”
“흥미롭군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까?”
“가족사 때문입니다. 제 아버지와 정우 아버지의 특별한 관계.”
“아, 성이 같은 것을 보니 친척이었나 보죠?”
“아닙니다. 굳이 따지면 10촌 이상의 아주 먼 친척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수백만명의 권씨를 다 친척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럼 무슨 관계죠?”
“그건….”
나는 두 아버지 사이에 얽힌 긴 이야기를 떠올려 보았다.
정우 아버지인 권영길, 내 아버지 권영철은 모두 경상북도 예천 출신이다. 물론 이렇게 말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어디 박힌 동네인지 모를 것이다. 그런 지명 자체를 처음 들어본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안동 근처에 있다고 해야 대충 짐작이라도 할 것이다. 물론 안동도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더 명확하게 말하면 북쪽으로 단양과 영주, 남쪽으로 안동, 서쪽으로 문경(점촌)을 두고 그 사이에 있는 지역이다.
예천은 그런 동네다. 영주, 안동, 문경도 그리 번창하는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명색이 도시라고 저곳들이 점점 커가는 동안, 예천은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인구를 계속 헌납한 그야말로 깡촌인 것이다.
권영길과 권영철은 바로 그 자그마한 깡촌에서 자랐다. 그들은 동향 출신일 뿐 아니라 고등학교 동창이며, 대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더구나 모두 안동 권씨 복야공파 34대 손으로 같은 항렬자인 영을 썼기 때문에 이름 석 자 중 두 글자가 같아 더욱 가깝게 보였다.
물론 이름 두 글자가 겹치는 권씨들은 무수히 많다. 항렬자를 무척 중요하게 여기는 안동 권씨들의 이름은 거기서 거기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버지 세대 같으면 수많은 권영 아무개들이, 내 세대 같으면 수많은 권오 아무개들이 있다. 권오국, 권오준, 권오정, 권오림, 권오현, 권오규…. 그런데 정우 아버지가 항렬자를 고집하지 않고 이름을 지은 덕분에 정우는 나와 전혀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이 보세요. 증인. 관계 없는 이야기는 자제하세요.”
“죄송합니다.”
2
권영철과 권영길(앞으로 아버지라는 칭호들은 필요에 따라 생략한다. 철은 내 아버지고 길은 정우 아버지다.)은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났다. 이름으로는 가까운 친척처럼 들리겠지만, 두 사람은 이름 두 글자만 같았을 뿐 촌수를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멀었고, 성격이나 자라 온 환경은 자석의 양 극처럼 달랐다.
권영철은 양반 가문 출신이라는 자부심은 가득했으나 실상은 가난한 소작농 집안의 아들이었다. 그걸로 모자라 다섯 살 때 어머니까지 여의었다.
그의 아버지, 즉 나의 할아버지는 양반 체면을 따지느라 지독하게 일을 안 했고, 완장 찰 기회만 탐욕스럽게 따라다녔다. 일제 강점기 때는 친일파,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 앞잡이 노릇을 했다. 공교롭게도 늘 지는 편에 섰다. 그러니 동네 사람들의 외면과 멸시를 한 몸에 받았고, 그 외면과 멸시는 권영철에게 대물림 되었다.
국군이 돌아왔다. 빨간 완장 차고 다니며 어지간히 거드름을 피웠던 권영철 아버지의 신세가 매우 곤란해졌다. 그걸로 모자라 권영철 8촌 이내 친인척들 중 절반 이상이 월북해 버렸다. 그 집안이 어떤 대접을 받았을 지 원숭이 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지능만 있어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처형 면한게 그나마 다해이었다.
그 와중에 권영철은 일 안하는 부친을 대신하여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열 살 때부터 지게로 나뭇짐을 해서 돈을 벌었고, 제사 있는 집에 가서 일을 하고 밥을 얻어먹었다. 양반이라 자처했지만 실은 마을 머슴에 가까웠다.
농사 지어가며 학교를 다니는 처지에 장학금 받지 못하면 학교를 그만 두어야 할 형편이라 결사적으로 공부 했다. 그래서 비록 공부를 잘 했지만, 그 정도 가방 끈에 걸맞는 교양은 갖추지 못했다. 교과서도 겨우겨우 장만하는 형편에 문학이니 철학이니 인문학이니 이런 것들은 사치품이었다.
그렇게 권영철은 장학금을 벌어가며 아슬아슬하게 국민학교, 중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도 그렇게 한 문제도 안 틀리고 다 외워서 쓴 덕분에 수석 입학하여 입학금을 벌었다.
반면 권영길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권영길의 부모, 즉 디누의 조부모는 당시 경상북도에서 보기 드문 천주교 신자들이었고 일찍이 서양 문물에 눈을 뜬, 소위 개화된 사람들이었다. 외국 선교사나 사제들도 수시로 집에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권영길은 어릴 때부터 다양한 서양 문물과 교양을 몸에 익혔다.
해방 이전에 태어난 세대들 중 영어와 독일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이 몇이나 있었겠는가? 권영길이 바로 그런 몇 안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권영길은 두뇌마저 탁월했다. 중학교 때 도지사로부터 ‘경북 제일 수재’ 라는 상패까지 받았다. 한 마디로 어려움이라곤 거의 경험하지 못한 전형적인 금수저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고등학교를 차석으로 입학한 것이다. 누가 수석이었을까? 바로 권영철이다.
경북 제일 수재를 이겼다는 그 자랑스러운 전적은 이후 권영철의 장기기억 장치에 영구 보존되었다. 덕분에 나는 어쩌다 정우보다 못한 성적표를 받아오면 아버지로부터 반드시 이런 말을 들어야 했다. 천 번도 넘게 들은 것 같아 지금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다 외울 지경이다.
“영길이 그 놈은 머리가 아주 좋았다. 얼마나 좋았냐 하면, 저게 사람이가? 이런 말이 절로 나올 정도라. 그래도 암만 머리가 좋아도 영길이는 날 못 이겼다. 왜 그런지 아나? 암만 머리가 좋아도 노력하는 사람은 못 당하는 기라. 영길이가 한 시간 공부하모 두 시간, 두 시간 공부하모 밤을 새운기라. 걸어 다니면서도 영어 단어 외었다. 얼매나 밤을 마이 샜는지 나중에는 동네 닭들 중 언 놈이 어느 집 헨지 소리만 듣고 다 알았다.”
1000번을 들었지만 1000번 모두 소름 끼쳤다.
절박함의 레벨이 달랐다. 영철에게는 장학금을 받느냐 학교에서 내몰리느냐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 순간 한 순간이 절박한 무시무시한 고학생 라이벌에게 풍성한 교양으로 다듬어진 부유한 수재는 도리어 공부 더 잘 하라고 참고서를 사 주는 아량까지 베풀었다.
결국 고등학교 입학에서 졸업까지 권영철 1등, 권영길 2등이라는 순서는 한번도 바뀌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는데, 1등 강박을 가지고 있는 영철은 당연하다는 듯이 법과 대학으로, 영길은 당시 경제 개발계획 분위기에 흥미를 느꼈는지 상과대학으로 진학했다.
두 사람의 대학 생활 역시 완전 딴판이었다.
영철은 학비를 벌기 위해 가회동에 있는 큰 부잣집, 황씨 집안에서 굴욕적인 가정교사 생활을 해야 했다. 말이 가정 교사지 숙제 대신해주는 심부름꾼이나 다름 없었다. 일본 근현대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서생‘이 딱 이 꼴이다.
영철은 그렇게 번 돈에서 학비 뿐 아니라 고시 공부에 필요한 법학 책 까지 사야 했다. 당연히 궁할 수 밖에 없었다. 세 끼 다 챙겨 먹는 건 사치였고, 겨우 두 끼 먹는데, 그나마 한 끼는 싸구려 소면으로 배를 채웠으니 왕성한 청년기에 어디 식도에 기별이나 갔을까?
아버지 대학 시절 사진이 기억난다. 지금은 마로니에 공원이 된서울대학교 교정에서 피골이 상접한 50 킬로나 될까 말까 한 막대기 같은 청년이 하나 서 있는 사진. 아무리 유추해 봐도 현재 아버지 모습과는 도저히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럼 영길은? 전혀 딴 판으로 살았다. 혜화동과 동숭동 골목을 누비며 대학의 낭만과 마로니에 향기를 제대로 만끽했다. 각종 철학회니 문학회니 하는 모임에서 활발하게 사람들을 만났고, 심지어 문학 동인지까지 발간했다. 당시로선 정말 희귀한 물건이었던 클래식 레코드 판도 수집했고, 지금도 대학로에 남아있는 학림인가 하는 다방에서 클래식 동호회 모임을 하기도 했다.
4.19 혁명때도 두 친구의 행동은 전혀 달랐다. 영길은 대열의 선두에 서서 경무대를 향해 행진 했다. 영철은 시위에서 빠졌다. 힘들게 들어온 서울대학에서 퇴학이라도 당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주변의 따가운 눈총에 마지못해 따라 나섰고, 그나마 대열의 후미에 숨어 따라가는 시늉만 하면서 빠져나갈 기회만 엿보았다.
그러다 경찰이 발포했는데 얄궂게도 경찰이 쏜 총알은 앞장 선 영길이 아니라 빠져나갈 구멍만 찾던 영철의 허벅지를 파고들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말이 실현된 것이다.
죽는다는 게 과장이 아니었다. 영철은 그때 정말 과다출혈로 죽을 뻔 했다. 그랬다면 나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이 글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철을 살린 사람은 마침 근처에 있던 이화여대 약학과 학생이었다. 집이 그 근방이라 시위를 피해 급히 집에 들어가다 휘청거리는 영철을 발견했다. 그 여학생은 급히 영철을 자기네 약국으로 데리고 들어가 셔터를 내렸고 서당개 18년으로 익힌 응급처치를 했다. 덕분에 영철은 목숨을 건졌는데, 바로 이 때 역사가 이루어졌다. 그 여학생이 바로 나의 어머니다.
이렇게 전혀 다른 대학생활을 보내던 동창생들은 공교롭게 직장에서도 다시 만났다. 영철은 재학중 사법고시에 합격하지 못했다. 사실 고학생이 고시공부 한다는 게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도 했다.
더구나 졸업과 동시에 고시 공부를 포기해야 했다. 졸업하자 마자 돈을 벌어다 줄 거라 기대하는 다섯 식구의 원망스런 눈초리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단 취직해서 돈을 좀 모아 놓고, 그 다음에 고시 공부를 하자고 나름 머리를 굴렸다. 그래서 돈을 많이 만지는 직장이니 돈을 좀 벌지 않을까 하는 아주 단순한 생각에서 K은행에 입사했다.
반면 상과대학을 졸업한 영길은 무역상사와 은행을 두고 저울질을 하다 은행을 선택했다. 당시에는 무역상사보다 은행이 보수는 적어도 훨씬 안정적인 준공무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큰 야심이 없었던 영길은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며 문화예술을 즐기는 ㅅ삶을 원했다. 그래서 영길이 선택한 직장이 또 하필이면 K은행이었다. 입사시험에서도 영철 1등, 영길 2등이 반복되었다.
이들은 은행에서도 초스피드 승진 레이스를 펼쳤다. 영철 혼자만의 생각이었을 수도 있다. 영길은 승진에 큰 욕심을 내지 않았다. 월급만 따박따박 나오면 살림이야 이미 물려받은 집안 재산만으로 넉넉했기 때문이다. 반면, 영철은 늘 초조해 하면서 반 발짝이라도 앞서려고 전전긍긍했다. 돈 때문 만은 아니었다. 돈은 약사 아내가 벌어들이는 돈과 지참금으로 들고 온 돈만으로도 넉넉했다. 다만 영길에게 질 수 없다는 생각, 모든 것을 타고 난 영길에게 이겨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런데 공부 경쟁과 달리 승진 경쟁에서는 영길이 늘 반 발자국 앞섰다. 영길이 먼저 속초 지점장으로 발령이 났고, 영철은 1년 뒤에 강릉 지점장으로 발령이 났다. 영철은 비록 1년 늦게 지점장이 되었으나, 속초 보다는 강릉의 급이 높다는 것에 만족했다. 여전히 순위는 바뀌지 않았다.
이렇게 지점장까지 올라가는 과정에서 영철은 사법고시의 꿈을 완전히 접었다. 영철은 지긋지긋한 가난 콤플렉스를 씻었고, 덕분에 영길을 고까운 시선이 아니라 친구로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역시 곳간이 일단 차고 나야 인의예지가 나오는 법이다.
그러나 영철의 아내, 그러니까 내 어머니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영철에게 영길은 애증이 교차하는, 그리고 나이를 먹어갈수록 증 보다는 애 쪽으로 기울어지는 고향 친구이자 동창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영길과 그의 처, 즉 정우 부모에게 그런 유대감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었다.
1960년대에 딸을 이화 대학교 약학과에 보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마 요즘 젊은이들은 감을 잡지 못할 것이다. 한 마디로 당시 한국 사회의 상류층이자 최신식 집안이라는 뜻이다. 여러 약국을 운영하던 외할아버지는 어머니가 대학을 졸업하자 당연하다는 듯 약국 하나를 나누어 주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만약 서울법대 출신이 아니었으면 감히 그 집 문지방도 넘어가 보지 못했을 그런 출신이었다. 외할아버지의 유일한 아쉬움은 자식 중 아무도 서울대학에 못 간 것이었다. 그래서 서울대 졸업생을 하나 구입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4.19가 계기가 되었다. 덕분에 권영철은 팔자를 고쳤고 내가 태어났고, 이렇게 이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