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마음
2
다음 인터뷰 상대는 최유선의 부모, 즉 정우의 장인과 장모였다.
정우의 장인인 최상진 박사는 소탈하고 위트 있는 호인으로 알려져 있어 별 어려움 없을거라 생각했지만 장모인 김정미 교수가 걱정이었다.
김교수는 뉴라이트 단체 간부를 지냈을 정도로 극우 성향이 강했고, 정우가 좌익 운동 경력 때문에 교수가 되지 못했다는 아무도 믿지 않을 음모론을 끈질기게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우를 좌익운동으로 끌고 들어간 원흉으로 나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 최악이었다.
사실 김교수 뿐 아니라 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들 생각하고 있었다.예술가의 순수함, 순진함에 대한 환상 때문에 디누가 스스로 좌익 운동에 뛰어들었다고 믿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학생회장 후보로도 나가고 경찰에 수배도 당해 본 내가 정우를 꼬셨다고 생각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실은 정반대였다. 내가 정우를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정우가 나를 운동권으로 끌어들였다. 그럼 정우를 끌어들인 것은 누구였을까? 당시 윤리교육과에 다니던 고등학교 동창 성진(성이 성 이름이 진)이었다.
또 정우는 교수가 못된 것이 아니었다. 굳이 할 필요도 없었고, 누가 시켜준다고 해도 거절했을 것이다. 게다가 1997년 이후에는 좌익 운동권 경력이라는 것은 대학 교수 되는데 오히려 가산점 역할을 했으면 했지 방해가 되지도 않았다.
나는 정우가 교수는 커녕 대학에 출강하는 것도 못 봤다. 사실 나도 궁금했다. 피아니스트로 더 이상 활동 하지 않는데 그렇다고 강단에도 서지 않으니 대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정우의 대답은 이랬다.
“교수? 스무 살 넘은 애들 가르치는 일? 흥미 없어.”
“어째서?”
“스무 살 넘었으면 될 놈은 다 되었고, 안 될 놈은 어차피 안 돼. 수학이랑 물리학에서는 서른 전에 뭐 없으면 끝이라며? 음악은 그게 스물이야. 그러니 어린이나 청소년들 가르치는 게 보람 있지. 대학 교수? 노우, 노우.”
“그럼, 어쩌게? 중학생이라도 가르칠 생각이야?”
“어, 어떻게 알았어?”
“설마 중학교 음악 선생 하려고?”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미안, 나 중학교 선생님 얕잡아 보지 않아. 문제는 내가 교사 자격증이 없다는 거야. 그러니 천상 학원을 차려야지. 그냥 학원이라고 하면 하찮아 보이니까 상설 마스터 클래스 형식으로 여는 거야. 17세 미만을 대상으로 말이야. 한 번 선발하면 한 3-4년간 꾸준히 관리하면서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그런 상설 마스터 클래스 말이야. 그러자니 장소가 필요해서 예술 고등학교 중에 공동으로 운영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보는 중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정우는 정말 D예고에서 공간을 빌려 ‘디누 마스터 클래스’를 개설했고, 거기서 아홉 살부터 열 여섯 살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어린이와 청소년을 가르쳤다. D예고 학생에게 마스터 클래스 우선권을 준다는 옵션을 걸긴 했지만.
그때 나는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정우의 스승인 거장 베네디토 몬테카리니 선생이 별세한 해가 1991년, 한 동안 피아노를 멀리 하던 정우가 마스터클래스를 연 해가 1992년이라는 것이었다. 이게 단지 오비이락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몬테카리니는 본인 스스로 20세기를 대표할만한 피아노의 거장이었지만, 1980년대를 주름잡은 피아니스트들을 여럿 길러낸 뛰어난 교육자이기도 했다. 그 많은 뛰어난 제자들 중 몬테카리니가 가장 아끼고 자랑스러워 했던 제자가 정우였음은 음악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정우는 1991년, 몬테카리니가 세상을 떠날 때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패륜을 저지른 셈이었다. 그런데 서양의 윤리관도 우리와 별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실제 속사정을 모르는 몬테카리니의 제자이자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인 굴리엘모 팔루치가 굉장히 격한 어조로 “배은망덕한 디누.” 라며 비난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 정우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만 어쨌든 정우가 그로 인해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음은 분명했다. 이후 또 다른 스승인 볼프강 지히발을 지극히 공경하고 예우하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그랬다. 정우는 절대 어른에게 예의바른 녀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히발은 공경하면 되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몬테카리니는 어쩔도리가 없다. 그러니 정우는 자신이 스승으로부터 받은 것을 어린 후배들에게 베풂으로써 그 빚을 청산하고자, 아니 은혜를 갚고자 했을 것이다. 여러모로 디누 마스터 클래스는 몬테카리니가 운영했던 마스터클래스를 쏙 빼 닮았다.
몬테카리니의 마스터 클래스는 때때로 열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 거의 학교에 가까운 상설 클래스로 운영되었다. 그러면서 수업료를 학생 형편에 맞춰 유연하게 적용했다. 아주 많이 받기도 했고, 조금 받기도 했고, 아예 안 받기도 했다. 정해진 기간도 없었다. 다 되었다고 판단하면 한 두 달 만에 하산이고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고 판단되면 1년을 넘기기도 했다. 내가 알기로는 정우는 돈 한 푼 안 내고 딱 한 달 만에 클래스를 마쳤다.
디누 마스터 클래스 역시 그랬다. 정우는 재능이 뛰어난데 가정이 넉넉하지 않은 학생에게는 수업료를 아주 적게 받거나, 전혀 받지 않거나, 심지어는 격려금 명목으로 용돈을 쥐어 주면서까지 가르쳤다. 김소영의 경우가 그랬다.
반대로 부잣집 아이들에게는 1시간 레슨에 10만원(이 돈이 감이 안 온다면 당시 교사 2년차였던 내 한 달 월급이 80만 원이었음을 참고하기 바란다)이라는 청구서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날려 보냈다. 하지만 아무리 비싼 수업료를 내겠다고 해도 재능이 보이지 않으면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디누는 이런 식으로 7년 동안 외국인 8명을 포함하여 60명이 넘는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들 중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피아니스트만 열 손가락을 넘고, 교수가 된 제자들도 열 손가락을 넘는다. 이런 정우에게 교수라는 타이틀이 굳이 필요했을까? 이미 웬만한 음악대학 학장과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게다가 정우는 펜 끝이 매서웠다. 한국 뿐 아니라 여러 나라 신문이나 잡지에 음악은 물론 각종 시사에 대한 글도 썼는데, 특히 신진 연주자들은 정우의 펜 끝에 그 운명이 오락가락 할 정도였다. 차라리 혹평이라도 받는 것이 낫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이 최악이었다. 이런 정우에게 대학 교수란 괜히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이리 와라, 저리 가라, 회의해라 등등 번거롭기만 한 그런 자리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김교수는 이런 식의 사실관계와 논리로 설득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만나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호인으로 알려진 최상진 박사부터 만나 워밍업을 좀 할 생각이었다. 대입 학력고사에서 쉬운 문제부터 먼저 풀고 어려운 문제는 종치기 직전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전략이 이렇게 되풀이 되었다.
최상진 박사는 꽤 유명한 내과 의사로 알려져 있었다. 그 분의 실력이야 내가 치료를 받아본 것도 아니고, 의학 논문을 읽고 알아볼 능력도 없으니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운영하고 있는 의원의 규모만큼은 꽤 컸다. 3개 층에 걸쳐 다섯 명의 의사가 근무하고(모두 호칭이 원장이었다) 진료실 다섯 개, 초음파 검사실, CT검사실, 내시경 시술실, 임상병리실까지 두고 있었고, 20병상을 갖춘 입원 시설도 있었다. 여기서 규모가 조금만 더 커졌으면 의원이 아니라 병원이 되었을 것이다.
인터뷰를 위해 방문했을 때 대기실 전광판에는 다섯 원장 앞으로 각각 예약 환자 스케쥴이 꽉 차 있었다. 하지만 막상 대표 원장의 스케쥴 표는 오히려 텅 비어 있었다. 환자를 아예 받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오너의 힘인가 하는 순간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가 나의 좁은 소견을 뒤집어 주었다. 다섯 원장실에서 수시로 의사 결정을 구하는 전화가 걸려오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최박사는 “지금 손님이 있어서, 잠깐 있다 답 드릴 게요” 라는 말을 다섯 번 반복했다. 도저히 오랫동안 붙들고 이야기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시간이 넉넉했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할 이야기가 없기도 했다.
“내가 음악에는 영 젬병이라. 뽕짝도 제대로 못 따라 부르는데, 클래식은 이거 완전 딴 세상 일이라 잘 몰라요. ”
최박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몰랐다. 적어도 열 번은 넘었을 것이다. 아니 클래식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듣지도 않으면서 클래식 음악가와 결혼하고, 딸들을 음악 시키고, 사위도 음악가로 얻은 건 뭔데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을 정도였다.
이심전심이었을까? 최박사가 거기 딱 맞는 답을 했다.
“내가 애들 엄마랑 결혼한 것도, 음악, 이건 아무 상관없고, 그냥 양쪽 집안이 서로 잘 알고, 또 이 사람이 워낙 예뻤거든요. 아,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애들 교육이야, 뭐 엄마 따라가는 거고. 나야 뭐 두 아이 중 하나쯤은 의사가 나왔으면 했고, 사위도 의사로 보고 싶긴 했지만, 어쩌겠어요? 요즘 세상에 남편감이야 자기들이 고르는 거지 아빠가 찍어주는 건 아니잖아요?”
이때다 싶어서 조금 공격적인 질문을 던져보았다.
“그럼 사위가 맘에 안들었겠네요?”
하지만 최박사의 대답은 너무도 소탈하고 담백해서 건질 것이 거의 없었다.
“마음에 들고 안들고가 어디 있어요? 사람 좋고, 나름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으니 그거면 된 거지. 속 깊은 얘기 나눌 기회가 별로 없었거든. 무슨 남자가 골프도 안 쳐, 술도 안 마셔. 그러니 이거 뭐 내가 같이 할 수 있는 게 있어야지? 그렇다고 내가 음악회 가고, 오페라 가고, 그러는 사람도 아니고. 하지만 난 내 딸들을 믿었어요. 디누, 그 친구는 내 딸 둘이 모두 사랑했던 남자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집사람이 결혼 안 된다고 난리 난리 치는 걸 내가 말렸어요. 난 유선이를 믿는다. 유선이가 좋다고 했다면 좋은 남자다. 이러면서 말이지.”
두 딸이 모두 사랑했던 남자?
이렇게 말하면 무슨 막장 드라마 삼각관계 같은 걸 떠올리기 쉽지만 그런 건 전혀 아니다.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3년의 시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정우가 먼저 사귄 상대는 최유선의 언니인 최나경이었고, 최유선과 사귄 것은 최나경이 불행한 선택을 하고 난 3년 뒤의 일이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나는 최박사와의 인터뷰에서 특별한 것을 건지지 못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나는 소탈해 보이는 최박사의 인상에 속아 넘어간 것이었다. 최박사는 정우에 대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엄청난 비밀을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아무려면 그 큰 병원을 세우고 운영하는 짬이 거저 생겼을까? 나 같이 순진한 교사 따위 손바닥에 올려 놓고 감쪽같이 속였던 것이다.
속았건 아니건 간에 결과적으로 나는 최박사로부터 별로 건진 게 없는 상태에서 뒤로 미뤄 두었던 김교수와의 공포스러운 인터뷰에 나서야만 했다. 아예 만나주지도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내심 그러기를 은근히 기대하기도 했다. 그만큼 만나기 껄끄러운 상대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교수가 순순히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3
김교수가 정년을 3년 정도 남겨두고 명예퇴직 한 까닭에 나는 서울 대학교 음악대학 대신 김교수 자택에서 가까운 뱅뱅 사거리 근처 커피빈에서 약속을 잡았다.
“아, 권오석 박사님?”
약속 시간 보다 10분 먼저 나가 자리를 잡으려 하는데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김교수가 나를 먼저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처음에는 퇴직하고 나니 시간이 남나 싶었다. 하지만, 최유선의 저돌적인 추진력이 어디서 왔을까 생각해 보니, 원래 성격이 그랬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김교수가 나를 알아보는 것도 신기했다. 정우 결혼식 때 인사한 이후 딱히 만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첫 인상은 엄청난 미인이라는 것이었다. 큰 키, 늘씬한 몸매, 그리고 선이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흔히 말하는 서구형 미인이었다. 50이 넘은 나이에 그런 느낌을 줄 정도였으니 20대 때는 대단했겠다 싶었고, 중학교 시절 남학생들을 줄줄 달고 다녔던 최나경이 과연 그 엄마에 그 딸이었구나 싶었다. 다만 최나경은 엄마의 큰 키를 물려받지 못했고, 큰 키를 물려받은 최유선은 애석하게도 엄마가 아니라 아빠 얼굴을 닮았다.
10년 전에 한 번 봤을 뿐이지만 나는 김교수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이제는 50도 아니고, 환갑이 지난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10년전과 비교하면 몸매며, 피부며, 이목구비가 거의 바뀌지 않았다. 차림새도 앉아있는 자세도 표정도 맵시있고 우아했다. 타고난 미모도 미모지만 엄청나게 관리를 잘 했겠구나 달리 말하면 돈 깨나 들었겠구나 하는 삐딱한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김교수는 그 우아한 자태, 존경받을만한 사회적 지위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지네트, 그 앙큼한 것.”
김교수는 이렇게 말문, 아니 포문을 열었다. 나는 나와 성진이 정우를 좌익 운동권으로 끌어들인 것이 아니었으며, 정우 스스로 판단하고 결의한 것이었음을 설명할 준비를 하고 그 자리에 임했었다. 하지만 완전히 헛수고가 된 셈이었다.
이 예상치 못한 포문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나는 한 시간이 넘도록 지네트의 험담을 들어야 했다. 그 험담의 수위는 차마 기억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였고, 전직 대학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를 의심스럽게 할 수준이었다.
“저, 죄송한데, 왜 그렇게 지네트를 미워하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한참만에 나는 겨우 이렇게 끼어들어 김교수의 말을 끊었다. 그제서야 김교수도 자신이 체신없이 말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자세를 바로잡고 우아하게 들리는 양념을 잔뜩 친 말투로 말했다.
“지네트가 한국에서 국민학교 다닌 거는 아시죠? 강소정이란 이름으로?”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 지네트가 우리 나경이, 유선이하고 아주 친하게 지냈어요.”
“아, 그랬군요.”
무심코 대답했지만 나는 마음 속에서 쾌재의 꽹가리 소리가 울리는 것을 감추느라 표정을 관리해야 했다. 이런 것이 인터뷰의 묘미다. 몰랐던 일들이 뜻밖의 장소에서 튀어나오는 것.
“지네트 엄마가 나 대학 친구에요. 나는 바이올린, 그 친구는 피아노지만 내 전공이 실내악이라 앙상블 활동으로 자주 만나 친해졌죠. 그리고 같이 파리로 유학 갔고. 거기서 그 친구가D산업 유럽 지사장으로 온 강회장 -음 그때는 회장 아들이지만- 을 만났고, 음, 그렇게 지네트가 태어났어요.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강회장의 아버지가 두 사람 결혼을 완강하게 반대했고, 형제들과 회사 승계 다툼 중이던 강회장은 아버지에게 적극적으로 대들지 못했죠. 그렇게 그 친구는 파리에 계속 남아 지네트를 키웠고. 강회장은 계속 양육비를 대주면서 결혼할 기회를 노렸죠. 하지만 지네트가 여섯 살 되던 해에 그 친구가 그만 세상을 떠나버렸고, 강회장이 유일한 양육자가 되어 한국으로 데려간 거죠.”
“저런. 엄마 잃은 아이가 고향을 떠나 낯선 나라로, 아빠라고는 하지만 낯선 남자를 따라 갔다고요?”
“한국은 낯설어도 아빠가 낯설진 않았어요. 강회장이 그렇게 무책임한 남자는 아니었으니까. 일년에 한 두 달 씩 어떻게 해서든간에 명분을 만들어서 파리에 와서 지냈죠. 당연히 그 친구, 지네트와 함께. 그래도 여섯 살 아이가 엄마 없이 낯선 나라에 가서 사는 것이 쉽진 않았겠죠. 그래서 그 아이가 병약한 체질이 되었는지 몰라요. 걸핏하면 골골 앓는 지네트를 볼 때 마다 그 친구 생각이 나서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이모의 마음인가요?”
“그런 셈이죠. 그래서 내가 우리 아이들 데리고 자주자주 그 집에 놀러갔고, 지네트도 우리 집에 자주 오고, 또 가족 여행 갈 때 같이 데리고 가고, 그렇게 살았어요. 나경이, 유선이랑 지네트는 말하자면.”
“사촌이네요?”
“그렇죠. 딱 그런 느낌으로 같이 자랐어요.”
“실례지만 지네트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는...”
“그건 말씀 드릴 수 없어요. 내 친구, 파리 유학, 피아노 전공, 요절. 이 정도로도 벌써 너무 많이 흘렸네요.”
맞는 말이었다. 이미 그 정도 정보 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사실 지네트의 어머니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디누의 일대기에서 부수적인 문제에 불과하기도 했다.
“지네트한테 처음 바이올린 가르쳐 준 사람이 누군데? 바로 나야. 그런데 어떻게 은혜를 이따위로 갚을 수가 있어?”
김교수가 터뜨린 분노의 이 한 마디 역시 엄청난 정보를 알려주었다. 지네트가 어머니의 영향으로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한국에 와서도 한동안 피아노를 배웠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다 국민학교 3학년 무렵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 첫 선생님이 바로 김교수였던 것이다.
이야기가 탁탁 맞아 떨어졌다. 젊어 세상을 떠난 친구가 남긴 딸이 아닌가? 엄마를 잃고 아빠라는 사람을 따라 고향을 떠나 이역 만리에 와서 외롭게 살고 있는데 얼마나 딱했을까? 그래서 조카처럼 보살펴 주었던 것이다.
워커홀릭으로 악명높은 강회장이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했을 것 같지 않았고, 그래서 지네트는 엄마 친구이자 첫 선생님인 김교수, 그리고 아플 때 마다 돌봐 주는 최박사, 자기 또래의 나경, 유선 자매와 일종의 유사가족을 이루어 정서적으로 의존했을 것이다.
그러자 오히려 더 궁금해졌다. 어떤 면에서 지네트는 김교수에게 딸이나 다름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긴 모녀사이에 사소한 다툼으로 원수가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험한 말을 쏟아낼 것 까지는 없었다.
그런데 김교수는 계속 험한 말을 이어가며 스스로 나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원래 디누가 우리 큰 딸, 나경이 남자친구였다는 건 알죠?”
“네. 저도 같이 만나곤 했으니까요.”
“우리, 나경이. 너무 예뻤던 나경이를. 지네트, 저것 때문에.”
그리고 다시 험한 말이 이어졌다. 그 말을 다 옮겨 적는 것은 나나 독자에게나 모두 힘겨운 일이 될 것이기 때문에 간단히 요약하겠다.
한 마디로 정우가 “지네트의 꼬임에 넘어갔기” 때문에 최나경이 실연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그런 선택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화를 내면서 말하는 것인지 말을 하면서 화를 내는 것인지 모르게 3분 단위로 목소리를 반음씩 올렸고, 그와 비슷한 비율로 얼굴 빛도 붉게 물들였다.
“나경이 일은 저도 너무 슬프고 안타깝습니다만, 그게 꼭 지네트 때문이라고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고3을 앞둔 늦은 가을, 최나경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강남구, 서초구 일대 수 많은 남학생들 -그 중에는 나도 있었다- 의 마음 속 연인이었던 최나경. 그러나 고등학교2학년 때 디누의 연인으로 알려지면서 다들 손가락이나 빨게 만들었던 최나경. 그 최나경이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공식적으로는 심장마비라고 했지만, 자살을 대죄로 보는 카톨릭 신앙 때문에 그렇게 발표했을 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라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물론 다들 쉬쉬하며 드러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김교수가 지네트 험담을 하다 무심결에 자백하고 말았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아는 최나경은 연애에 실패했다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그런 타입이 아니었다. 중학교때 이미 매달 남자 친구를 갈아치울 정도로 자유분방했다. 소문난 퀸카라 남자 친구 따위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만들 수 있었던 그런 아이였다. 최나경이 실연을 당해 낙담한다? 심지어 비관해서 자살까지? 어림 없는 소리다.
정우는 또 어땠나? 연예인이나 다름 없는 인기를 누렸다. 최나경 역시 정우가 어떤 녀석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한 마디로 끼 깨나 부리던 애들끼리 만나서 사귄 것이다. 실연? 비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사실 나는 정우가 최나경과 사귀면서 동시에 지네트와 양다리를 걸쳤을 것이라는 김교수의 생각에는 동의했다.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최나경이 비관?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아니, 엄마가 되어 가지고 자기 딸을 이렇게나 모르십니까?” 이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해야 했다.
김교수도 그건 좀 어거지라고 느꼈는지 바로 다음 단계로 험담의 주제를 넘겼다.
“아니, 그건 뭐 그렇다 쳐. 하지만 그 다음엔 또 어떻고? 지네트 저건, 디누가 유선이랑 교제하고 있을 때도 근처를 어슬렁거렸고, 결혼한 다음에도 그랬고, 쌍둥이 낳은 다음에도 계속 주변을 맴 돌았어. 아니, 왜, 남의 신랑 근처를 그렇게 어슬렁대며 끼를 부려? 언니 잡은 걸로 모자라서 동생까지 잡으려고? 권 박사도 한 번 생각 해봐요. 안 그래요?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잖아?”
“그건 좀…”
나는 지네트의 팬이었기 때문에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제가 아는 얘기랑 다르네요.”
“다르다니? 뭐가?”
“아무래도 정우 신혼시절에는 제가 교수님보다 그 집에 자주 갔기 때문에 사정을 좀 압니다. 정우는 지네트랑 특별하게 따로 어떤 관계를 맺을만한 일이 없었습니다. 만나지도 않았고, 연주도 같이 안 했어요. 팬들은 둘이 같이 연주해 달라고 엽서며, 편지며 엄청 성화였지만 다시 성사되지 못했죠. 또 저는 유선이가 지네트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거 한 번도 못 봤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나경이라면 몰라도 유선이는 샘이 아주 많은 아이랍니다. 절대 참고 넘어가지 않았을 거예요.”
“아, 그건 저도 압니다. 유선이 샘 많죠. 하지만 유선이가 질투? 하여간 뭐 그런 비슷한 것 때문에 스트레스 받은 상대는 따로 있었어요. 그건 지네트가 아니라 아녜스였어요.”
“아녜스라고? 말도 안 돼.”
“틀림없습니다. 정우는 결혼 이후에도 아녜스를 만났습니다.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울 정도로 자주. 미국 투어 가면 반드시 둘이 따로 만났고, 아녜스도 걸핏하면 한국 건너와서 만났습니다.
유선이 성격 아시죠? 지금 교수님이 지네트 험담하는 것처럼 아녜스 험담을 한참 늘어놓으며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그런데 유선이가 그 전화를 누구한테 했는지 아세요? 바로 지네트였다고요. 지네트도 입장이 곤란했을 겁니다. 지네트는 아녜스와도 친구였으니까. 그런데 자꾸 지네트만 뭐라 그러시면….”
순간 김교수가 내 말을 끊고 들어왔다.
“아, 그건 얘기가 달라요. 아녜스는 그때 이미 결혼했고, 애기 엄마고. 그러니까 아녜스가 디누 만나는 건 친구끼리 만나는 거라 봐 줄 수 있어요. 나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라고. 둘이 또 디지털 음원 사업도 동업하고 그랬잖아요?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지.”
김교수야 자신의 판단이 무사 공평하다고 주장하겠지만, 아무리 들어봐도 내 귀에는 아녜스에겐 너무 관대하고 지네트에겐 너무 적대적으로 들렸다. 내가 꼭 지네트의 팬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상식을 가진 보통 사람으로서 생각해도 그랬다.
나는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논리적으로 추론을 시도했다.
단서 하나.
지네트나 아녜스나 모두 정우가 결혼 전에 친밀한 관계였던 여성들이다. 지네트는 서로 커플이었음을 인정한 적 없고 드러난 증거도 없으며 다만 그렇게 추정될 뿐이지만 아녜스는 진지한 관계임을 과시하고 다녔던 사이였다. 사람들 보는 앞에서 부둥켜안고 키스하는 남녀가 아무 관계도 아닐 수는 없으니까.
단서 둘.
결혼 이후 정우는 지네트와 교류가 확 줄었다. 같이 연주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디누&지네트가 환상의 듀오니 뭐니 하면서 말하기 좋아하지만 막상 둘이 함께 연주한 공연이나 음반은 생각보다 훨씬 적다. 오래 전부터 지네트와 함께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는 디누가 아니라 클로드 티보(Claude Thibault)다.
오히려 결혼 이후 지네트를 자주 만난 사람은 정우가 아니라 유선이었다. 로사, 마리 쌍둥이도 지네트를 이모라 부르며 잘 따랐다.
단서 셋.
정우가 결혼 이후에도 자주 만난 상대는 아녜스였다. 둘 다 각자 다른 배우자를 만났고 자녀까지 있었지만, 내 눈에 얼핏 보기에도 두 사람은 지나치게 가까워 보였다.
아녜스 때문에 정우가 격렬한 부부 싸움을 하는 것을 눈 앞에서 보기도 했다.
21세기를 눈 앞에 두었던 1999년 여름의 일이었다. 그때 우리 부부와 딸 예니, 그리고 정우네 부부와 로사, 마리 쌍둥이 이렇게 일곱명이 경주에 있는 리조트에서 휴가를 함께 보내고 있었다.
특별한 경우는 아니었다. 원래 정우네와 부부 동반으로 외식도 하고 휴가도 같이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정우가 카니발 한 대를 굴리고 있었기 때문에 딱 좋았다.
평화로운 밤이었다. 거의 혼수상태에 빠진 아이들이 퍼져있는 유모차를 테이블 옆에 두고 어른들끼리 맥주를 나누어 마시며 보문 호수 물결을 따라 반짝이는 가로등 그림자에 마음을 실어 보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이야기가 정우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프로 무지카 서울’의 미국 투어로 흘러갔다.
“아무래도 LA 공연 장소는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이 좋겠어.”
유선이 가볍게 한 마디 던졌다. 그런데 정우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싫어? 왜?”
“분위기가 관공서 같고, 공간도 너무 커. 꼭 세종문화회관 같은 느낌이야. 우리 악단 컨셉하고도 안 맞아.”
“그럼 달리 생각한 곳이라도 있어?”
“앰배서더 오디토리움.”
그 순간 유선이 낯빛을 확 바꾸더니 들고 있던 맥주잔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 놓았다. 나는 깜짝 놀라 들고 있던 고르곤졸라 피자 조각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앰배서더 오디토리움이라고? 그 낡고 좁은 데서?”
“낡고 좁다니? 거기 얼마나 유서 깊은 곳인지 알잖아? 서부의 카네기 홀 아니냐? 그건 낡은게 아니라 격조 있는 거야.”
“LA 교민들 얼마나 많은지 알잖아? 그리고 그 분들이 당신 공연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도? 그런데 시내 한 복판에 있는 큰 공연장 냅두고 굳이 낡고 좁은 변두리 극장을 잡겠다고?”
내가 듣기에는 두 사람 말이 다 일리가 있었다.
챈들러 파빌리온은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큰 클래식 공연장으로 객석이 무려 3천석이나 되었다. 하지만 정우가 지휘하는 서울 프로 뮤지카 서울은 50명이 안되는 체임버 오케스트라였기 때문에 저 큰 공연장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반면 앰배서더 오디토리엄은 객석이 1200석 정도로 체임버 오케스트라 공연에 딱 맞는 규모였다. 하지만 1996년 이후 경영난으로 관리가 부실해지면서 유선이 말한 대로 낡은 공연장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물론 대관료는 훨씬 저렴했을 것이다.
서로 장단점이 분명한 선택지들이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합리적인 타협의 여지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우의 반응은 놀라웠다.
“앰배서더 오디토리움이 아니면 공연 생각 없어. LA 를 그냥 건너 뛰었으면 건너 뛰었지.”
그러자 유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 발끈하며 일어나서 의자가 그만 뒤로 넘어질 뻔 하다 간신히 평형을 되찾았다.
“그러셔? LA는 무슨 LA. 그냥 미국 투어 다째버려.”
“이미 날짜 잡히고 매진된 공연도 있는데 그걸 다 환불하자고?”
“집 팔아서 물어내지 뭐.”
나와 아내는 그만 먹던 피자를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고 이들 눈치만 봐야 했다.
“대체 왜 그러는데? 넌 꼭 그렇게 극단적으로 나오더라?”
정우가 언성을 높였다. 유선도 한 치의 양보 없이 언성을 높였다.
“왜 그러냐고? 앰배서더 오디토리움 지척에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이라는 거 내가 모를까 봐?”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인데?”
“거기 누가 있는지 아는데 관계 없을 수 없지.”
그 다음에 이어진 말은 옮길 수가 없다. 마침내 둘은 험악한 말을 주고 받기 시작했고, 우리 부부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으니까.
그들은 아녜스라는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 있는 그 누군가가 아녜스라는 것은 그들도 우리 부부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휴가를 망치고 말았다. 아내에게 너무 미안했다.
나야 여름 방학 중이었으니 며칠 잡치더라도 다른 날 잡아 회복할 수 있었지만, 아내는 모처럼 약국 비우고 짜낸 휴가였다.
다음날 아침, 정우와 유선은 언제 그랬냐는듯이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우리한테 사과했고, 덕분에 그날 점심을 스스로 신라 궁중요리라고 주장하는 값비싼 정식집에서 거창하게 얻어먹었다.
어쨌든 그 날 이후 아녜스라는 이름은 내 기억에는 불화의 여신처럼 남아있었다. 하지만 김정미 교수에게는 그 이름이 지네트였다.
나는 김교수가 지네트 욕하는 거친 목소리를 30분 더 귀로 흘린 뒤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바로 자리를 정리했다. 내가 평소 추앙하는 지네트에 대한 험담을 듣는 것은 큰 고역이었지만, 그나마 내가 그 상소리의 직접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김교수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떻게 알았는지 최유선한테 전화가 왔다.
“엄마 만났어요?”
“응.”
“별로 들을 말없었을텐데?”
“아니, 꼭 그렇지만은 않아. 다만, 나경이.”
“뭐, 언니 죽은 거?”
“아, 그래. 이럴 땐 너 직설화법이 도움이 되네.”
“언니 죽은 거 지네트 탓이라고 막 그랬지?”
“맞아. 딱 그랬어.”
나는 이때다 싶어 김 교수가 지네트에 대해서 한 이런 저런 험한 말들을 고해 바쳤다.
“엄마는 그런 말 할 자격 없어.”
자초지종을 다 들은 최유선의 입에서 단 칼에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그런 말 할 자격이 없다니?”
“지네트는 언니 죽음에 책임 없어. 물론 디누도 그렇고. 가장 책임을 많이 져야 하는 사람은 엄마고, 그 다음은 동생인 나. 오히려 우린 디누 덕분에 언니를 1년이라도 더 볼 수 있었어. 나중에야 알았지만.”
최유선의 거침없는 화법이야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자기 어머니를 근친 살해범 수준으로 몰아세울 정도라고 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문득 물어보고 싶은 말이 떠올랐지만 차마 꺼내기가 어려워 입을 열지 못하고 주저주저 하다 보니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자 눈치 빠른 최유선이 바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전화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고. 어쨌든 선배가 이 일을 맡아 주니까 마음이 놓이네. 나중에 한국 가서 얘기하죠. 아님 선배가 영국 오던가.”
“그, 그래. 또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볼게.”
“그렇게 해요. 아,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이하람 간사한테 말해. 돈이든 시간이든 물품이든.”
“오케이.”
“참, 그리고 어르신들 말고, 더 중요한 인터뷰이들 이야기를 들어보고.”
“아, 그래. 알았어. 고마워.”
내가 차마 꺼낼 수 없었던 질문은 바로 이거였다.
“아니, 잠깐만. 이건 꼭 들어야겠는데? 네 엄마가 네 언니를 어떻게 죽였는데?”
하지만 전화로 이렇게 덜컥 물어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국제 전화로는.
아무래도 그 이야기는 최유선이 한국에 들어오거나 내가 혹시 유럽에 가면 만나서 좀 자세히 나누어야 할 이야기로 미뤄두는 것이 상책이었다. 완곡하게 돌려서 물어볼지 직설적으로 물어볼지 고민해야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