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중학교 첫 겨울방학의 마지막을 행복하게 마무리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개학식, 그리고 기말고사가 시작되었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느낌으로 시험을 해치웠다.
제일 뒷자리 학생이 마지막 시험 과목의 답안지를 가져 갈 때에도 다른 아이들처럼 환희에 차서 환성을 부르거나 하지 않고 그저 덤덤했다. 천천히 집에 가서 시험 마지막 날의 여유를 즐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복도 창문으로 정우 얼굴이 보였다. 오물오물 거리는 입 모양으로 봐서는 “나와.”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손짓까지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입을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정우의 펄럭이는 손짓의 독촉을 받으며 복도로 나갔다. 방학 전 까지는 그렇게 바늘과 실처럼 붙어 다녔던 둘이었지만, 막상 개학하고 보니 어딘지 서먹하고 어색했다.
“음. 어, 오랜만이다.”
정우도 어색함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 동안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일이 좀 있었어.”
“음. 뭐, 괜찮아. 중요한 대회 앞두고 있잖아?”
“그렇긴 하지만, 참 이거 주려고 왔어.”
정우가 반짝이는 포장지와 리본으로 예쁘게 포장된 정사각형의 납작한 물체를 내밀었다. 한눈에도 레코드 판이었다.
“뜯어봐도 돼?”
“응. 그럼 더 좋고.”
나는 포장된 끝 부분을 살짝 뜯어서 조심스럽게 내용물을 조금씩 끌어내었다.
“와, 이건! 너 대단한다. 정말 대단하다. 축하해.”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레코드 판 자켓에는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는 미우, 정우 남매 사진이 있었고, 사진 위에는 노란색 바탕 위에 직사각형이 몇 개 겹쳐져 있는 도이체 그라모폰 레이블이 마치 고대 그리스의 신탁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신탁에 새겨진 글씨는 ‘Beethoven Sonaten fur Violine und Klavier Nr.5. Fruhling / Nr.9. Kreuzer, Miu & Dinu)’였다.
나도 이제는 독일어나 이탈리아 어를 얼추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단박에 그게 이들 남매가 독일에서 낸 베토벤 소나타 ‘봄’과 ‘크로이처’ 음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4학년 때 이 둘이 연주하는 크로이쳐 소나타를 들었던 것이기에 이 음반이 더욱 반가웠다.
“작년에 벨기에 갔다 오면서 도이체 그라모폰이랑 계약했거든. Miu & Dinu 이름으로 음반 두 장을 내기로 했어. 누나는 따로 협주곡이랑 독주 바이올린 곡 음반도 내기로 했고.”
정우가 내 궁금증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듯이 음반이 나오게 된 과정을 일러주었다.
“그랬구나. 축하해. 그리고 정말 고마워.”
물론 나는 진심으로 고마웠다. 하지만 내심 이걸 왜 미우가 아니라 정우가 주는 걸까 하는 의구심도 생겼다. 미우가 주었더라면 더 기분이 좋았을텐데.
“누나가 갖다 주겠다고 했는데, 내가 같은 학교 다니니까 주겠다고 했어.”
정우 녀석, 사람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가?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보고 대답하는 것 같은 정우의 목소리를 듣고 은근히 기분이 나빠졌다.
“왜 그랬는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정우가 내가 쏘아붙인 가시를 감지했는지 잠시 혀를 앞니로 깨물었다. 정우는 집중하거나 긴장하면 항상 혀를 빼어 물었다. 잠시 그렇게 혀를 물고 있던 정우가 별 수 없다는 듯이 혀를 넣고 입을 열었다.
“사실은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 네가 누나랑 친하니까. 누나한테 말을 좀 해줬으면.”
“네 누난데 왜 내가 말을 해?”
“그게, 아, 그러니까.”
정우가 답답하다는 듯이 눈을 찡그렸다. 내가 알고 있는 정우의 가장 보기 흉한 얼굴이 바로 그 찡그린 얼굴이었다. 평소에는 총명하고 선량해 보이는 아름다운 그의 얼굴이 그 순간만큼은 냉정하고 교활하고 또 심지어는 짜증스럽게 보였다.
“아니 괜찮으니 그냥 말해.”
정우의 그 흉한 얼굴을 보지 않으려면 나부터 독기를 거두어야 했다.
“이렇게만 전해줘. 난 누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아. 이번에는 쮜리히 콩쿠르와 베른 콩쿠르 일정이 겹쳐서 어쩔 수 없겠지만, 난 누나랑 같이 무대에 올라갈 때 가장 행복해. 누나가 뭐라고 해도 소용없어. 이렇게.”
“야, 내가 네 녹음기야? 그런 정도 이야기라면 그냥 네가 해.”
“이미 수도 없이 했어.”
“네가 수도 없이 해도 안 되는 거라면, 내가 전달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누나는 분명히 네 생각을 물어볼 거야.”
“왜 하필 나야?”
“넌 누나랑, 음. 하여간 누나가 물어보면 내 편을 들어줘. 내 생각이 옳다고 해 줘.”
“아니, 이렇게만 얘기해 놓고 뭘 어쩌라고? 뭘 지지해? 누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왜 말을 그 따위로 해? 알듯 말듯, 들릴듯 말듯. 대체 무슨 일이야?”
미우의 알쏭달쏭한 이야기, 그리고 이번에는 정우의 알쏭달쏭한 이야기. 나는 이들 남매의 화법 때문에 거의 폭발 직전이 되었다. 거두절미 화법, 중간 생략 화법, 독심술 화법. 그게 천재들의 화법인지 뭔지는 몰라도,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시작과 끝이 있고, 과정이 있고, 그 과정에 일관성이 있는 이야기를 해야 알아듣는 법이다. 나는 평범한 사람들의 분노를 대변하여 신동 디누를 노려보았다.
“알았어. 처음부터 말해 줄게.”
이제야 정우가 말귀를 알아들었다.
“누나가 더 이상 나하고 연주하지 않겠다고 했어.”
“뭐? 왜?”
이런! 나는 완전히 거꾸로 알고 있었다. 미우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정우가 미우를 떠나려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은근히 정우를 미워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정작 정우는 정 반대의 이야기를 했다.
“내가 파트너로 적합하지 않대.”
“뭔 소리야? 이 판들은 다 뭐고?”
“이건 이미 계약되어 있던 거라 기한 안에 내야 했던 거고. 미우&디누의 처음이자 마지막 음반이야. 누나는 내가 독주 타입이라 앙상블 맞추기가 너무 어렵대. 그런데 난 앙상블이 쉽건 어렵건 그딴 건 관심 없어. 누나랑 연주하는 게 좋아. 누나 바이올린을 즐기면서 피아노로 거들어주는 순간이 너무 좋아. 누나는 왜 그걸 빼앗아 가려는 거야? 왜 그 기쁨을 동생인 내가 아닌 다른 놈팽이와 나누려는 거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어.”
“다른 놈팽이?”
“몰라. 내가 나가면 누가 오겠지 뭐. 어차피 다 놈팽이일 거야. 누나는 예쁘고 또 이미 성공했으니까.”
“넌? 넌 이제 어쩔 건데?”
“네가 누나를 설득해 줘. 듀엣을 깨지 말아달라고. 아, 이 말도 해줘. 요즘 내가 너무 앞서 나갔던 거 인정해. 내 해석대로 연주해야 한다고 우긴 거, 인정해. 그냥 누나 맞춰 갈게. 얼마든지 맞춰갈 수 있어.”
“그래도 누나가 안 된다고 하면?”
“그럼 나도 계획이 있어.”
“어떤 계획?”
“미안, 지금은 말 못해. 하여튼 난 독주에는 관심 없어. 혼자서 이 도시 저 도시를 다니며 연주하고 싶지도 않아. 파트너와 함께 연주 여행하는 행복감은 절대 포기 못해.”
“그럼 이상하잖아? 독주에 관심 없으면 취리히 콩쿠르에는 왜 나가려고 하는데, 그리고 루체른 콩쿠르에는 왜 나갔는데? 누나나 너나 왜 그렇게 국제 콩쿠르에 많이 나가? 설마 상금이 탐나서 그러는 거야?”
“어이쿠.” 정우가 거짓 으로 놀라는 기색을 지어 보였다. “설마 상금 탐나냐고 물어볼 줄이야. 상금, 탐 나지 임마.”
“아 돈 벌려고?”
“농담이고. “
“그럼 왜? 아니, 곤란하면 말 하지 마. 괜찮아. 정말이야.”
“아니, 말할게. 꼭 말해야 해. 우리가 어떤 나라에 사는지 너도 알아야 하니까. 한 마디로 우리나라엔 누나나 나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선생이 없어.”
“그건 인정.”
“그런데 우리나라는 해외여행도 못 가고, 유학도 마음대로 못 가. 정부의 승낙을 받아야 하는데, 정부는 입상 실적을 따져. 그러니 정부 눈에 들 때까지 계속 국제 콩쿠르에 나가는 수밖에 없어. 자꾸 입상 해서 이름을 알리면 공연 계약이 들어오고, 그럼 공연을 위해 여권을 받아 외국에 또 나갈 수 있고, 그럼 오며 가며 거장들을 만나서 어깨 너머라도 배울 수 있게 되고. 하나 덧붙인다면.”
정우가 갑자기 킥킥거리며 웃었다.
“국제 콩쿠르에서 2위 이내 입상하면 군대가 면제야. 그런데 난 아직 2위 이내 입상 실적이 없잖아?”
“그냥 그거 뿐이야? 유학이랑 군대?”
“맞아.”
“그럼 계속 누나 반주만 하고 싶은 거고?”
“맞아.”
“그럼 누나 연주를 따라야 할 텐데? 네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아, 반주, 반주 그러지만 정확히 말하면 바이올린 피아노 이중주야. 각자의 대등한 주장이 있는 거고, 그걸 서로 맞춰 가는 거야.”
“그래도 굳이 따라야 한다면? 너야 누나야?”
“그건 좀. 말하기가. 음.”
정우가 말을 더듬었다. 청산유수처럼 말을 쏟아내며, 언제나 내 앞에서 거의 강의하다시피 말하던 정우가 처음으로 말문을 제대로 열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 이런 거 아니야?”
나는 모처럼 잡은 승세를 계속 이어가며 정우를 몰아붙였다.
“혼자는 너무 힘드니까 독주자가 싫다. 그래서 2중주를 하지만, 누나 따라하기 보단 네 주장을 내세우고 싶다.”
“으음.”
“너무하잖아? 누나는 그럼 뭐야? 그냥 네가 혼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게 해 주고, 네가 멋대로 해석한 거 애써 앙상블 맞춰 주려고 있는 거야? 누나는 이미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랑받는 예술가인데, 넌 그런 누나 더러 널 위해 옆에 있어달라고 요구하는 거야? 네가 누나 바이올린 소리 듣는 것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외롭게 연주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정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정우답지 않은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정우가 내 시선을 피하며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그만하자.”
“먼저 와서 말 한 건 너다.”
“그래. 부탁하려 했지. 그리고 대답은 충분히 들었어. 어쨌든 이 판들, 이건 내 첫 음반이니까 잘 들어줘. 그럼 나중에 보자.”
정우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훽 돌아서서 사정없이 멀어져 갔다. 그 등의 실루엣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매정해 보이기도 했고, 처량해 보이기도 했다.
미우를 만나 이야기해야 했다. 남매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사이에 끼우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야기가 안될 정도로 뭔가 엉켜 있는 모양이었다. 천재들은 감정 쓰는 일에 약하다. 그런 건 나 같은 범재들이 도와주어야 한다. 천재는 그 분야를 벗어나면 손이 많이 가는 어린아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미우 학교는 늦게 끝나기 때문에 아예 경복궁 근처까지 나가서 막 학교를 마치고 나오는 미우를 만났다. 그리고 정우가 해 달라던 말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다 말했다.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디누는 선택해야 해. 나를 따라다닐지, 스스로 나설지. 물론 답은 정해져 있어. 디누는 디누라야 해. 미우&디누가 아니라. 디누는 혼자 있을 때 가장 아름다워. 다른 악기 없이 홀로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반주도 아니고 실내악도 아니고, 심지어 협주곡도 아닌, 독주곡일 때, 텅 빈 무대 위에 오직 피아노 하나만 자리 잡았을 때, 그 앞에 앉은 디누는 와, 뭐라고 할까, 전차를 타고 창공을 가로지르는 아폴론 같아. 난 디누가 그렇게 날아오르는 것 보고 싶어.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반드시 전차에 태울 테야.”
“정우가 그걸 원해?”
“디누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 태양을 떠오르게 하는 것이 아폴론의 의무니까. 세상 모든 생명들을 위해. 디누는 내 동생이지만, 인류의 것이기도 해.”
“정우가 왜 그래야 하는데?”
“하느님은 스스로 즐기라고 재능을 주시지 않았으니까. 재능은 멍에야. 감사드리지만 또 원망도 하게 만드는. 벗고자 해도 벗을 수 없고, 떨치려 해도 떨칠 수 없는. 디누는 아직 이기적이야. 자기만 생각해. 자기가 좋아서 음악을 한다고 생각해. 사실은 그 반대야. 디누도 곧 그걸 깨닫겠지.”
나는 미우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가 좋아서 자기 좋은 음악을 하는 것이 왜 비난 받을 일이지? 그게 어째서 이기적이지? 게다가 그 반대라니? 그럼 정우가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정우를 선택한 것이라고? 정우가 자신을 위해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자신을 위해 정우를 부린다는 뜻인가? 왜 하필 그게 정우지?
“그럼 누나는?”
“이미 결심했어.”
뭘 결심했다는 거지? 도대체 속마음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전서구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미우가 한 말을 고스란히 정우 앞에서 재생했다.
“알았어.”
정우는 뜻밖에도 고개만 까딱 한 번 움직일 뿐이었다.
“이대로 괜찮아?”
“나도 나대로의 생각이 있고 계획이 있어. 누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
정우가 볼을 살짝 오므려 보조개를 깊게 파며 말했다.
“음악을 위해 내가 있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해서 음악이 있어. 난 즐거움이 없는 아폴론의 리라보다는 행복한 판의 피리를 택하겠어.”
아폴론에 판? 느닷없는 메타포에 살짝 당황하고 있는데 갑자기 정우 얼굴이 내 눈 바로 앞까지 바짝 다가왔다. 그 모습은 마치 과장된 연기를 하는 초보 배우 같았다.
“나도 홀로 서야 하는 거 알아. 하지만 지금은 누나랑 연주하는 게 더 재미있고 좋아. 더 좋으니까 계속 하는 거야. 만약 누나와 연주하는 게 재미없어지면, 그땐 누나가 붙잡아도 2중주 안 해.”
“독주보다 2중주가 더 좋아서 하고 있다고? 웃기지 마. 미안하지만, 넌 그동안 누나와 2중주를 하지 않았어.”
내 입에서 나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담한 말이 튀어나갔다.
“엥 뭔 소리야?”
정우도 몹시 놀란 기색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2중주는 국민학교 4학년 때, 베토벤 소나타 9번 연주했던 그 때 뿐이야. 올 겨울에 네가 한 연주는 적어도 내 귀에는 2중주가 아니야. 그건 바이올린의 반주가 들어간 네 독주였어.”
“어디 계속 말해봐.” 갑자기 정우가 진지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말했다. “난 네 귀를 믿어.”
“그런데 어디 누나가 반주할 타입이야? 누나는 당연히 독주를 했어. 그런데 넌 그 독주를 끌어내리고 네 독주의 반주로 끌어 앉히려 했어. 이건 대화가 아니고 앙상블이 아니라 다툼이야. 미안하지만 난 서로 주도권 다툼하는 피곤한 연주는 듣고 싶지 않아. 듣기 힘들어.”
이 말을 하면서 나는 EBS에서 무슨 특집 방송이라고 틀어주었던 리골레토 공연을 떠올렸다. 만토바 공작과 질다가 사랑의 2중창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 목소리가 더 멋지게 들리게 하려고 악다구니를 써 대던 정말 재앙에 가까웠던 공연.
공작 역으로 나온 테너는 그래도 앙상블을 맞춰갈 용의가 있어 보였는데, 질다 역으로 나온 소프라노 –아마 조안 서덜랜드였을 것이다- 는 추호도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말도 안 돼. 난 누나 연주 듣는 게 좋아서 2중주를 했던 건데?”
“거짓말. 네가 널 속였어. 넌 누나 바이올린을 듣지 않았어. 누나가 네 피아노를 들었지. 적어도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려.”
그러자 정우가 갑자기 불쌍해 보일 정도로 움츠러 들었다.
“네가 그 정도로 말하면 그건 진짜일 거야. 아, 그러니까 난 짤린거네.”
“뭐?”
“난 누나와 2중주를 하지 못했어. 나 혼자 연주했고, 누나의 연주를 받쳐주는 게 아니라 제압하려 했어. 그래서 누나의 반주자로서는 자격이 없었던 거야. 그래서 난 Miu & Dinu Duet에서 쫓겨난 거야. 이제 다 이해돼.”
“누나 말은 그런 뜻이 아닌데?”
“당신은 축구에 더 소질이 있으니 야구팀을 그만 두시오, 당신은 높이뛰기에 더 소질이 있으니 계주팀을 그만 두시오. 결국 이런 이야기잖아? 너는 독주자로 더 적합하니 2중주는 그만 두시오. 결국은 쫓겨난 거잖아?”
“왜 자꾸 그런 식으로 말을 들어?”
“두고 봐.”
“뭘?”
“최고의 앙상블을 만들어 보이겠어. 누나가 나를 밀어내면 나는 누나 대신 다른 바이올리니스트와 듀엣을 만들겠어. 솔리스트? 물론 난 솔리스트로 활동할 거야. 하지만 먼저 누나 없는 듀엣을 성공시킨 다음에 말이야. 디누는 앙상블을 잘 다룬다는 걸 증명한 다음에 말이야.”
순간 나는 이 별난 남매의 자존심 싸움에 내가 잘못 끼어든 것이 아닐까 하는 후회에 휩싸였다. 완전히 등 터지기 직전의 새우 꼴인 셈이다.
정우가 주머니를 뒤적뒤적 하다가 수첩을 꺼내 들었다. 그건 말이 좋아 수첩이지 두께로 보나 크기로 보나 공책에 훨씬 더 가까운 종이 뭉터기였다.
정우는 그 뭉터기 속에서 잘 잘라서 스크랩해 둔 기사와 사진을 보여주었다. 나비 모양의 리본으로 머리를 장식한 예쁘장한 소녀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클래식 음악계의 아이돌 스타, 바이올린의 신동이라 불리던 아녜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