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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장편소설 디누 1부 21화 미우 누나 4

by 권재원

“자, 다 왔어.”

미우의 침착하면서도 약간 명랑한 목소리가 나를 상념에서 깨워냈다.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

“뭐? 여기?”

감탄사 같은 말이 터져 나왔다.

눈앞에는 서 있는 것은 양철과 함석으로 지어 놓은 커다란 가건물. 그 앞에는 마당이 있었고, 마당에는 소박한 모양의 성모상이 수줍게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주교 역삼동 교회’ 라는 나무 현판이 이 가건물이 뭐 하는 곳인지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미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혼돈 상태에 빠졌다. 그런 내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 혼란스러운 말을 던져 놓은 미우는 조용히 양철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도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성수를 이마에 뿌리며 성호를 긋는 것도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 두 분이 가장자리에 걸려있는 동판화 앞에서 뭐라 뭐라 기도를 하며 걷고 있었고, 앞쪽에는 하얀 미사포 쓴 여성 두 명이 소리 없이 기도하고 있었다. 정면에는 십자가에 매달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예수상과 제단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었다. 친구 따라 주일학교 갈 때 느꼈던 교회의 어수선하고 쇼맨십 가득한 분위기와는 너무 달랐다.

미우가 가운데쯤 있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나도 그 옆에 앉는 수밖에 없었다. 앉고 나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곁눈질로 미우를 훔쳐보았다. 미우는 앞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지만 멍하니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눈동자가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무엇인가 아주 심각한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미우가 말한 애인이 누군지 알아챘다. 그는 내가 감히 질투할 수 없는 존재였다.

미우는 그렇게 10분이 넘도록 애인과 눈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대화를 마치자마자 팔꿈치를 포개고 엎드렸다. 미우의 등이 조금씩 불규칙하게 떨렸다. 흐느끼는 것 같았다. 여자가 울고 있다면 남자가 어떻게 해야 할까? 뭔가 해야할 것 같았지만, 도움이 되고 싶지만 감히 접근할 수 없는 투명한 벽을 느끼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 흐느낌은 내가 속한 세계의 것이 아니라는 직감이 왔다.

그렇게 한참 지나서야 미우가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미우는 눈 가장자리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지만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봤던 중 가장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 십자고상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까 누나가 아까 말하던 애인이 바로 저 분?”

미우가 말 대신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누나는 내가 저 분과 친하게 지내는 걸 원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쁨을 느꼈다. 이 세상에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기쁨, 내가 미우, 그리고 나와 미우를 포함한 어떤 거대한 세계와 하나라는 기쁨, 그리고 그 거대한 세계, 거대한 정신이 따스하게 나를 품어주고 있다는 기쁨. 그 기쁨이 예수 때문인지 미우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밝게 웃은 탓인지는 판단하지 않겠다.

그 즉시 교리 학교에 등록했다. 직장인과 달리 방학이 있는 학생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교리 수업을 듣고 석 달 만에 영세를 받을 수 있도록 집중적으로 코스가 짜여 있었다.

“안녕.” 교리 학교 등록을 다 마치자 미우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내 이름은 로즈마리야.”

아름다운 로즈마리.

미우의 세례명. 정우의 쌍둥이 딸 이름이 로사와 마리인 이유다.

교리 학교에 다니면서 주일마다 미사도 참석했다. 비록 영성체는 참석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무엇보다 말보다 음악이 많아서 좋았고, 그 말조차 음악적이라 좋았다.

“아니, 엄마가 가자고 할 때는 모른 척하더니 참 별일이네?”

천주교 모태신앙인 어머니가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지만 내심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진짜 좋아했던 것은 미사가 아니라 성당 그 자체였다. 나는 아무런 행사가 없는 고요한 성당에 들어가 조용히 앉아있거나 책을 읽었다. 심지어 문제집을 꺼내 놓고 풀기도 했는데, 아무도 뭐라 그러는 사람이 없었고, 어떤 할머니는 오히려 “주님 품에서 공부하니까 잘 되지?” 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몇 주가 지났다. 정우와 도서관에 가서 책도 보고 공부도 하기로 한 방학 계획은 정우가 걸핏하면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거의 지켜지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미우의 바이올린에 맞춰 피아노 연습을 하거나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니까.

나는 미우가 준 비탈리 ‘샤콘느’의 그다지 어렵지 않은 피아노 편곡 부분을 무척 열심히 연습했기 때문에, 함께 그 곡을 연주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냥 귀로만 미우의 연주를 듣는 것 보다 피아노로 맞춰가면서 듣는 것은 두 배, 아니 세 배 더 행복한 경험이었다. 더 어려운 곡으로 제대로 2중주를 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 정도였다. 특히 슈베르트의 2중주 판타지를 같이 연주하고 싶었다. 물론 내 수준에 그건 말도 안 되는 망상이었지만.

하지만 겨울방학이 끝물로 접어들면서 미우마저 집에 없는 날이 늘어났다. 미우와 정우는 6월에 바이에른 실내악 콩쿠르 2중주 부문에, 8월에는 각각 베른 콩쿠르와 쮜리히 콩쿠르에 참가하고 그 사이에 예정되어 있는 10회 정도의 연주회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파트에서 계속 연습 했다가는 민원이 폭주할 것이라 따로 스튜디오를 빌려서 연습하고 있었다.

“거기 어딘지 가르쳐 줄까?”

“아뇨. 괜찮아요.”

나는 정우 어머니가 베푼 호의를 거절했다. 그들의 연습을 방해하지 말자는 대승적 생각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나한테 일언반구도 없이 연습실로 사라진 그들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그런데 빈 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괜찮았다. 어차피 나는 혼자 노는 데 익숙한 숙련된 왕따였기 때문이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서 실컷 읽은 다음,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성당에 가면 하루가 훌륭하게 마무리되었다.

역삼동 성당은 비록 가건물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오밀조밀하게 갖출 것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 미사 드리는 성전 외에 모임방, 강의실 등이 있었는데, 오후 한 시경에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내 차지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마음 놓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다 보면 세 시에 교리 학교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성당을 도서관 삼아 생활하던 2월의 어느 날이었다. 겨울방학이 끝나가고 있었다.

학년말 고사의 절반은 방학식 전날과 방학식 당일에 보고, 나머지 과목은 개학식 날과 그 다음날에 치르는 야만적 학사일정 덕분에 방학이 끝나간다는 말은 곧, 시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말과 동의어였다. 더구나 방학 전에 친 시험은 음악, 미술, 체육, 기술, 도덕이었고, 개학하면 칠 시험은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이었다. 사디스트들이 짠 시간표라고 밖에 할 말이 없었다.

다가오는 개학 겸 기말고사 때문에 우울하고 초조해진 나는 빙판길을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걷다 엉덩방아를 찧고 허벅지 옆쪽으로 퍼렇게 멍이 들고 말았다. 아픈 다리를 애써 달래며 성당의 긴 의자에 몸을 얹자 놀란 몸과 마음이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그 평화를 즐겼다.

그때 내 옆에 누군가 앉았다. 느낌만으로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누나?”

미우가 조용히 밖으로 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당연히 따라 나섰다. 본당 밖은 누가 얼굴 피부를 잡아당기는 것처럼 추웠다. 우리는 서둘러 마당을 가로질러 만남의 장소로 뛰어 들어갔다.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 두 분이 구석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 뿐 조용했다.

“연습 때문에 바빴어.”

미우가 그들 남매 특유의 거두절미 화법으로 말을 시작했다.

“괜찮아. 그럴 거라 생각했어.”

“보고 싶었어. 여기 있을 것 같았어. 그런데 와 보니 정말 있네.”

그리고 미우는 다시 입을 닫았다. 보고 싶었기 때문에 보기만 해도 된다는 뜻일까? 뭐라고 말을 이어 보고 싶었지만 수줍음 많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 디누 때문에 마음 상했어.”

미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우가 왜요?”

며칠 못 봐서 그새 서먹해졌는지 내 입에서 존댓말이 튀어 나갔다.

“괜찮아. 내 일이니까. 디누는 원래 그런 아이야. 이기적이거든. 걔는 음악하고 자기밖에 생각하지 않아.”

미우가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음악하고 자기만 생각한다고? 정우가 누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래. 당연히 좋아하겠지. 음악을 가르쳐 주었으니까. 정우를 디누로 만들어 주었으니까.”

미우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말했다. 그 모습은 특별히 무엇을 부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머리에 매달려 있는 뭔가를 떨쳐버리려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럼 아무 문제없잖아?”

“맞아. 아무 문제없어. 하지만 이제 서로 다른 길을 가야 하거든. 그게 문제야. 나는 나의 길로, 디누는 디누의 길로. 하지만 이제 보내면 디누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 영영 떠나고 말겠지?”

나는 미우가 던지는 이 단어들 사이의 논리적 연결고리를 찾으려고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더 많은 말이 머리 속에서 흘러 다녔겠지만, 그 중 극히 일부만 끄집어 낸 것 같았다.

하지만 미우가 몹시 언짢다는 것, 심지어 화가 나 있기도 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왜 화가 났을까? 정우 때문일까, 아니면 자기 자신 때문일까?

“오석아.”

갑자기 미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네, 네. 아니 응?”

“너, 나 좋아하지?”

깜짝 놀랬다. 이렇게 훅 들어오다니. 나는 그만 자라처럼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얼굴에 뜨거운 기운이 확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거울이 없어 보지 못했지만 필경 내 얼굴은 오래 묵은 포도주처럼 푹 익었을 것이다.

“네, 아니 으, 응.”

모기 날아가는 소리보다 조금 더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부족한 소리는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보충했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내 뜻을 보여주자 포도주처럼 익어가던 내 얼굴이 다시 평상시의 온도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누나하고 약속 하나 해 줄래?”

당연하지. 미우를 위해 무슨 일이든 못하겠는가? 가슴이 펄펄 끓어올랐다. 그러나 그 열혈남아는 단지 머리속에서만 말하고 움직였을 뿐, 나는 다만 고개를 조금 끄덕이는 것 이상의 표현을 하지 못했다.

“날 떠나지 마. 내가 널 밀어 내거나 미워하더라도 절대 날 떠나지 마.”

아니 무슨 이따위 부탁이 다 있지? 자기는 나를 밀어 낼 수도 있지만, 나는 절대 자기를 떠나지 말라니? 그럴 거면 처음부터 밀어 내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닐까? 그리고 일단 밀어 냈다면 떠나는 것을 막지 말아야 옳은 것이 아닐까? 심지어 미워하더라도 떠나지 말라니?

하지만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이었다. 설사 미우가 나를 미워하더라도 그 곁을 지킬 것이다. 그 동안 정우가 부러웠다. 그런데 이제 누나는 내 것이다. 절대로 놓지 않을 것이다.

“자, 그럼 본당 가자.”

미우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아까는 주춤거리며 가로질렀던 성당 마당을 이번에는 손을 꼭 잡고 반대로 가로질렀다.

본당에 들어가자 미우가 바이올린 케이스를 열고 악보를 꺼냈다.

“비탈리 샤콘느 피아노 파트 기억하지?”

“응. 그리 어렵지 않은 걸.”

나는 미우가 건네주는 악보를 슬쩍 훑어보고 가볍게 대답했다.

“좋아. 그럼 저 오르간 앞에 앉아.”

“뭐? 하지만. 그래도 돼?”

“괜찮아. 신부님도 알고 계셔. 우리 남매의 특권이랄까? 미사 없을 때는 얼마든지 쓰라고 하셨어. 기회가 좋잖아? 이 곡은 피아노 반주보다 오르간 반주로 들으면 훨씬 멋진 곡이야. 그냥 피아노라고 생각하고 쳐 봐. 다만 레가토 표시된 부분 연주할 때는 손가락 떼지 말고 같이 계속 눌러 주면 돼.”

“응.”

나는 조용히 성가대 자리에 있는 오르간에 앉았다. 파워 스위치를 찾아 한참을 헤맨 끝에야 나는 오르간이 선창하는 샤콘느의 주제 네 마디의 소리를 낼 수 있었다.

미우가 요구한 대로 손가락을 떼지 않고 소리를 지속시켰다. 그 소리의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미우의 바이올린이 그 유명한 비탈리의 샤콘느 주제를 연주하며 들어왔다. 하지만 그 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평소에 미우가 연주하던 이 곡은 애절하면서도 긴장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 연주는 오르간 반주라 그런지 평화로우면서도 거룩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성당을 성스러운 소리로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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