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뭘 보고 연주하는 걸까? 내가 연주하는 곡은 피아노 소나타라 악보에 바이올린 파트 따위가 있을리 없었다. 그렇다면 미우가 피아노 악보를 보면서 가상의 바이올린 파트를 만들어가며 연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단지 화성만 맞춰주는 그런 연주가 아니었다. 마치 바이올린 파트가 원래부터 있었던 곡처럼, 피아노 소나타가 아니라 원래 바이올린-피아노 2중주인것처럼 충분히 풍성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그 연주는 마치 내 피아노 소리 위에 바이올린이 슬쩍 얹어지는 것 같았는데, 때로는 까르르 웃고, 때로는 살포시 감상에 빠지고, 때로는 우렁차게 외쳤다. 그러면서도 그 한 구석에는 살짝 우울한 느낌이 슬쩍 끼어들어 있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나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게 아니라 미우의 바이올린을 즐기기 시작했다. 미우의 바이올린을 즐기다 보니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알아서 춤추고 노래했다.
그러다 문득 수없이 연습해도 계속 미스 터치했던 부분을 부드럽게 연주하고 넘어 갔음을 깨달았다. 미우의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간다는 기분으로 연주하다 나도 모르게 그 부분을 깔끔하게 넘길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고 K.333번 소나타의 1악장을 깔끔하게 마무리하였다.
“와, 이건 정말, 와 진짜, 이건.”
나는 연주를 마치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뭔가 탄성 아니 괴성이라도 내지르고 싶었지만 잔뜩 굳어버린 입으로 정말, 이건, 진짜 이 세 단어만 미련하게 반복했다. 그렇게 한참 입을 쥐어짜고 나서야 겨우 사람 소리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2중주가 이렇게 즐거운지 몰랐어요.”
“피아노 소나타에 코드 맞춰가며 바이올린 파트 하나 입혀 봤어. 디누 꼬맹이 때 이런 식으로 가르쳤어. 그런데 이거 못해본 지 오래됐네. 4학년 때부터는 디누가 지 고집이 생겨 이런 연습하자 그러면 절대 안 했거든. 그런데 오늘 모처럼 초보자도 있고 하니까 하고 싶어서. 어머, 초보자라고 해서 화난 거 아니지?”
정우의 비밀 하나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정우의 선생님은 다름아닌 누나였던 것이다. 흔히 피아노를 처음 배울 때 피아노 선생님이 학생 왼쪽에 앉아서 악보에 없는 저음부를 같이 쳐 가면서 학생을 지도하는데, 미우는 그 역할을 바이올린을 같이 연주해 줌으로써 대신했던 것이다.
“기분 안 나쁘지?”
다시 다그치는 미우의 목소리에 정우의 비밀을 음미하던 나는 정신을 차렸다.
“초보자 맞죠 뭐. 덕분에 바이올린이랑 같이 피아노 치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알게 되었는 걸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낡은 바이올린으로 그렇게 예쁜 소리를 내세요?”
“어머, 너 듣는 것만 좋아하고 악기는 모르는구나! 이건 그냥 낡은 게 아니거든요? 이게 얼마나 오래 됐게?”
“한 10년?”
“10년? 어머, 하하하.”
미우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예? 그럼 그 보다 더?”
“얘가 말이지, 하이든 보다 나이가 많아.”
“하이든 보다?”
“1725년생이니까 하이든보다 일곱 살 연상.”
“네? 천 치, 칠백 이십 오년이요? 그렇게 오래된 악기라면 박물관에 있어야죠.”
떠올릴 때 마다 부끄러운, 아니 쪽팔리는 상황이었다.
오래된 바이올린은 박물관에? 맙소사. 하지만 그때 미우는 웃지도 웃음을 참지도 않으면서도, 정말 친절하고 진지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상하게 찰현 악기들은 요즘 기술로도 100년 혹은 그 이상된 악기 소리를 못 따라가. 그게 하필 그 시절에 자랐던 나무들의 특징이라는 설도 있고 그런데, 그 이유는 아무도 몰라. 솔직히 나도 요즘 악기가 옛날 거보다 잘 나왔으면 좋겠어. 그럼 돈도 별로 안 들고.”
“그럼, 엄청 비싸겠네요? 그렇게 오래 되었으니 완전 골동품이네.”
돈 이야기가 나오기가 무섭게, 나는 조선 백자 항아리가 몇 백만 원에 팔렸다는 신문 기사를 떠올렸다. 그렇다면 저 바이올린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셈이니 그 정도 나가지 않을까?
“만 달러 들었어.”
엄청난 대답이 돌아왔다.
“만 달러? 우리 돈으로는?”
“한 칠백 만원 되려나?”
“치, 칠백 만원이라고요?”
칠백 만원이라니? 나는 지금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1500만원 주고 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낡고 작은 악기 하나가 강남구의 31평짜리 아파트 값 절반인 것이다. 정우네가 아무리 부자라지만, 이 정도를 감당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 정도 갔고 놀라?” 미우의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정경화씨는 이보다 두 배나 더 나가는 악기 쓰는 걸?”
나는 “그건 정경화씨 정도 되니까 그런 거죠. 어디 학생이 그렇게 말해요?” 이런 말이 튀어 나가려는 것을 억지로 막았다.
미우는 정경화를 대등한 동료처럼 부르고 있었다. 정경화도 그렇게 비싼 악기를 쓰는데, 나는 왜 안 돼? 이런 뉘앙스였다.
문득 미우도 나의 의아함을 눈치 챘는지 바이올린을 조심스럽게 케이스에 올려놓고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얘 데려온 사연이 있어. 들어볼래?”
“네.”
“나, 작년, 브뤼셀 콩쿠르 때 2위했어.”
“알아요. 신문에 크게 났거든요.”
“그런데 그게 1위없는 2위였어. 그러니까 참가자 중에서는 1위인데 상은 2위. 그래도 펄펄 뛰고 좋아해야 했는데, 너무 우울했어. 꼭 1등을 해야 한다 뭐 그런 거 때문은 아니고, 결선 때 내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을 연주했는데, 너 그 곡 알지?”
“네. 잘 알고, 또 아주 좋아해요.”
“그럼 3악장을 떠올려 봐. 3악장에서는 활을 살짝 댄 상태에서 가볍게 터치하면서 빠르게 스타카토를 치고 나가면 섬세하고 멋진 연주가 돼. 중요한 건 가볍게 터치하면서도 빠르고 유연하게 치고 나가는 거야. 그런데 내 악기는 그렇게 하면 소리가 먹혔어. 먹힌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도저히 오케스트라를 뚫고 객석까지 소리가 뻗어갈 것 같지 않은 느낌. 자신감 없어지는 느낌. 그래서 섬세하게 표현해야 할 부분인 거 알지만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면서 소리가 좀 거칠어졌어. 그게 얼마나 속상한 지 아니? 실력이 아니라 악기가 감당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어 실수하는 거? 내가 결선에서 제일 잘한 건 분명했지만 1위는 하기 어렵겠다고 직감했어. 너무 억울하잖아?”
“더 좋은 악기가 필요하겠네요.”
“맞아. 맞아. 그래서 시상식이 끝나자마자 새 악기 사 달라고 아빠를 졸랐어. 이탈리아 올드 구할 수 있다면 최고지만, 잘 나오지도 않고, 너무 비싸서 그런 건 꿈도 안 꾸었고, 비욤이라도 있으면 얼른 집어야겠다고 생각했어.”
“비욤? 악기 회사 이름인가요?”
“아, 프랑스 사람 이름이기도 하고, 그 사람이 만든 공방 이름이기도 하고. 이탈리아 올드 카피 전문가면서 또 자기 오리지널 악기도 있고. 카피라고 해도 원본 못지않은 훌륭한 악기를 만들었어. 물론 값은 훨씬 싸고. 그것도 구하기 쉽진 않아. 그런데 입상자 파티에 악기상 한 분이 경매 부치기 전에 그뤼미오 선생님한테 악기들 품평 받아보겠다며 온 거야. 그러자 선생님이 나더러 연주해 보라고 하셨어. 이게 꿈이냐 생시냐 했어. 이탈리아 올드를 직접 연주해? 그것도 그뤼미오 선생님 앞에서? 그래서 정말 정신없이 연주했지. 그랬더니 그 악기상이 경매 안 내놓고 나한테 딱 입찰가로 내 주겠다는 거야. 만 달러에. 그러면서 부담 갖지 말래. 그냥 스폰서 대준다 생각하겠다며.”
“네? 칠백 만원 씩이나 받으면서 그걸 대준다고 말해요? 그게 말이 되요?”
“말이 되고 말고. 이거 도메니코 몬타냐나야.”
하지만 나는 도메니코 몬타냐나라는 이름을 듣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어차피 스트라디바리, 과르네리 말고는 이름 들어본 올드 바이올린이 없었으니 그냥 그런가보다 할 뿐이었다.
그러자 미우가 답답하다는듯이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거, 크리스티, 소더비 이런 데 아니면 구경도 못해. 만 달러는 정가가 아니라 다만 입찰가야. 실제 경매에 붙였으면 어디까지 갈지 아무도 몰라. 5만 달러는 훨씬 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그 아저씨는 나한테 칠백만원을 받은 게 아니라 오히려 최소 이천만원 이상 기부한 거라고.”
“하지만 그것도 적은 돈은 아니잖아요? 그걸 어떻게 마련했어요?”
“브뤼셀 콩쿠르에서 방금 받은 상금 3천 달러에 디누가 루체른 콩쿠르에서 받은 상금이랑 연주하면서 받은 개런티 모은2천달러, 그리고 그 동안 내가 연주하면서 받은 개런티 모은 3천 달러. 나머지 2천달러는 그 동안 쓰던 악기를 팔았어. 덕분에 얘를 들고 왔지. 너무 예쁘지 않니?”
미우는 그때 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흥분되는 모양이었다. 일단 필 받으면 잔뜩 상기되어 엄청나게 긴 독백을 순식간에 늘어놓는 것은 정우나 미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올린 가격 뿐 아니라 이 남매가 벌었다는 돈도 나에게는 너무 충격이었다. 정우가 웬만한 직장인 연봉만큼 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런 큰 돈을 누나 악기를 위해 선뜻 넘겼다는 것 모두 놀라웠다.
“무슨 생각 해?”
내가 금융인 아들 답게 머리 속으로 한참 계산을 굴리자 미우가 내 어깨를 손가락 끝으로 퉁겼다.
“아, 아뇨. 그냥 돈 계산 좀.”
“몰라. 그딴 건. 이탈리아 올드는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게 아니야. 돈이 있어도 인연이 없으면 못 만나. 그러니 눈 앞에 나타나면 돈 걱정은 나중에 하고 빚을 지더라도 일단 잡아야 해. 그래도 절대 손해는 안 봐. 나중에 되팔면 무조건 많이 올라 있을테니까. 아, 물론 난 절대 안 팔아.”
미우가 케이스에 고이 뉘어 놓았던 바이올린, 도메니코 몬타냐나 1725를 다시 집어 들었다.
“기왕 얘기한 김에 그때 기분도 나고 하니까, 특별 공연을 해 줄게.”
그리고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활을 아주 살짝 거의 대는지 마는지 싶을 정도로 현을 스치면서 연주를 시작했다. 활이 현을 쓸고 지나가는 스윽 하는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리면서 마치 바이올린이 숨쉬는 것처럼 느껴졌다.
베토벤 로만체 2번.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이올린 곡 중 하나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이 곡을 주로 미우의 음반으로 듣는다. 셰링의 연주도, 지네트의 연주도 훌륭하지만, 아직도 내 마음을 흔드는 것은 미우의 연주다. 하지만 음반으로는 그날 내가 방안에서 직접 들었던 미우 연주의 반의 반도 담아내지 못한다.
그 연주는 노래하듯이(칸타빌레)가 아니라 그냥 노래였다. 흐느낌과 한숨, 그리고 눈물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바이올린이 숨을 쉬고 있었다. 한 소절이 끝날 때마다 정말로 바이올린의 숨소리가 들렸다.
바이올린이 숨을 쉰다? 무생물인 바이올린이 호흡을 할 리가 없다. 나는 숨소리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연주하는 미우를 그리고 바이올린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업 보우와 다운 보우가 교체될 때 미세하게 활이 흔들리는 소리가 공명되는 것이 숨소리의 비밀이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미세한 활의 흔들림이 악기를 통해 들리다니. 이 작은 차이 때문에 그 큰 돈을 쓰는구나 싶었다.
더 놀라운 것은 미우가 그 소리를 의도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미우는 활과 현의 마찰 뿐 아니라 악기의 사소한 움직임, 신체의 아주 작은 움직임, 심지어 숨소리와 눈 깜짝이는 소리까지 바이올린의 공명통에 담아내고 있었다.
이런 것들은 악보에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미우 스스로 생각해 내고 만들어 낸 소리였다. 그 갸냘프면서도 깊게 가라앉은 소리가 내 폐부를 통해 파고들면서 머리 속에서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연주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아, 그 비브라토!
미우의 비브라토는 낭만적인 스타일의 출렁이는 떨림도 아닌, 그렇다고 바로크 스타일의 둔중한 것도 아닌, 살짝 떨리는 듯하면서도 절제된 그런 것이었다. 얼른 보면 손가락이 거의 움직이지 않았지만, 가까이에서 뚫어지게 쳐다보면 아주 미세하게 열리고 닫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미세한 비브라토를 구사할 수 있는 연주자는 내가 아는 한 아직까지도 아무도 없다. 심지어 지네트조차 미우가 보여주었던 그 섬세한 비브라토를 보여주지 못했다.
미우도 미우지만 악기도 놀라왔다. 악보에 전혀 나오지 않는 미세하고 미묘한 표현들을 거뜬하게 소리로 드러낼 수 있는 악기가 있다니!
그것은 단지 악기가 아니었다. 미우의 마음을 읽고 스스로 소리를 내는 생명체였다. 나 같아도 할 수만 있다면 전 재산을 아니 앞으로 벌어들일 재산까지도 미리 끌어서 샀을 것이다.
마침내 미우가 연주를 마쳤다. 연주를 마치고 나니 갑자기 미우가 어려보였다. 아무리 누나라 해도 겨우 열 여섯 살 소녀에 불과했다. 내 머릿속에서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를 지워버릴 정도의 장본인이 겨우 열 여섯 살 소녀. 이렇게 어린 나이에 대가와 같은, 아니 대가를 능가하는 연주를 한다면 뭐라고 불러야 할까? 딱 한 단어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천재.
연주를 마친 미우가 내 얼굴을 정면으로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눈을 맞추지 못하고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러자 미우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눈을 찡긋 해 보였다. 그렇게 윙크하며 살짝 기울인 미우의 얼굴이 너무 고혹적이라 나는 그만 사춘기 소년의 신체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미우가 내 사타구니에서 일어난 생리반응을 알아챌 리 없었지만,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면서 숨을 구멍을 찾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입 밖이 아니라 마치 내 몸 속에다 대고 말하는 것 같은 자그마한 소리로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보다 더 나았어요.” 라고 말했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보다? 정말? 그럼 다른 사람들은 어때? 야사 하이페츠는? 헨릭 셰링은? 아르튀르 그뤼미오는? 에휴디 메뉴힌은?”
미우가 의자를 끌어당기면서 다그쳐 물었다. 그녀의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더 깊이 처박고 말했다.
“다른 분들은 하이페츠 말고는 이름도 처음 들어봐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도?” 미우가 나를 빨아먹을 듯이 바라보다가 이내 눈꺼풀의 경직을 풀었다. “뭐 할 수 없지.”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바이올린 손질을 시작했다. 먼저 활의 조임을 조심스럽게 풀고, 브러시로 악기 몸체 구석구석을 조심스럽게 털고, 융으로 보이는 부드러운 천으로 활 줄과 악기 몸체를 거의 스치듯이 천천히 닦았다. 그 동작은 진지하다 못해 경건하기까지 했다. 그 때문에 나는 거의 삼십분 동안 감히 말 한마디 꺼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렇게 온 정성을 다 기울여 바이올린을 정돈한 미우는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악기를 받쳐서 겉 보기에도 육중해 보이는 케이스에 넣은 뒤 케이스를 들고 방에서 나가버렸다. 방에 혼자 남은 나는 이런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피아노를 다시 칠까? 책을 보고 있을까? 아니면 누나를 따라 같이 밖으로 나갔어야 했나?
고민이 너무 깊어지기 전에 미우가 다시 나타났다. 잠옷 차림도, 간편한 실내복 차림도 아니었다. 하얀 털이 앙증맞게 목덜미를 감싸 안은 감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코트 자락 아래로 체크무늬 모직 스커트 끝 자락이 살짝 드러나 있었다.
“우리 나가자.”
아무 예고 없이 어디 가자고 들이미는 것은 누이나 동생이나 마찬가지였다.
“네? 어딜?”
“청계천.”
“청계천? 거긴 왜요?”
“레코드 판 사러.”
“레코드 판이요?”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누구?”
“너.”
“나? 왜?”
“셰링도 그뤼미오도 메뉴힌도 못 들어봤다니, 너무하잖아? 내가 사 줄게. 그리고 나면 허리우드 극장 가서 ‘사막의 라이온’이 보자. 내가 젤 좋아하는 션 코너리가 나오는 영화거든.”
“하지만 정우 기다리기로 했는데, 도서관 같이 가야…”
“관둬, 관둬.” 미우가 내 말을 끊었다. “무슨 따분하게 방학 첫날부터 도서관이야? 뭐 정우도 허리우드 극장으로 오라고 쪽지 써 놓지 뭐. 그럼 괜찮은 거지?”
“어어어.... 네.”
정우와 마찬가지로 미우 역시 나를 멋대로 끌고 다닐 모양이었다. 그냥 어어, 하다 집 밖으로 끌려 나왔다.
그때는 지하철이 2호선까지 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교대-신설 구간만 운행했기 때문에 서초동에서 시내로 가려면 버스를 타야 했다. 덕분에 나는 미우와 40분이나 나란히 앉아있을 수 있었다.
그 40분 동안 미우는 잠시도 입을 쉬지 않고 어마어마한 양의 이야기 폭탄을 쏟아 부었다. 바이올린 이야기, 정우 흉보기, 그리고 브뤼셀 콩쿠르에서 있었던 이야기, 그리고 그 밖에 무슨 내용인지 전혀 기억 나지 않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 뭔가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기억에 남지 않았다. 이게 바로 소녀들의 수다라는 거구나 싶었다. ‘그 미우’도 결국 소녀였다.
싫지 않았다. 그 40분간의 버스 여행이 마치 시공간을 접어 놓은 것처럼 짧게 느껴졌다. 정말 잠깐 사이에 버스가 도심으로 접어들었다. 미우는 미도파 백화점 앞에서 나를 버스 밖으로 끌어내리더니, 을지로를 지나 청계로 –그때는 청계천이 도로로 덮여 있었고, 그 위로 고가 차도도 지나가고 있었다-를 건너 거대한 공룡이 음험하게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세운상가로 향했다.
도저히 클래식 음반이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낡고 지저분한 레코드 점들이 닥지닥지 붙어 있었다. 아직도 그 가게들의 이름이 기억난다. ‘국도 레코드’, ‘뉴서울 레코드’, ‘원음 레코드’…. 그 레코드 점들 중 지금까지 남아있는 가게가 하나뿐이라는 것이 애석하다. LP가 CD로 넘어갈때 까지는 건재했지만 MP3 시대가 되면서 그야말로 가루가 되어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그 시대는 레코드 판, LP, 요즘 말로 바이널의 시대였다. 음악을 들으려면 직접 가서 레코드 판을 사야 했다. 돈 없으면 카세트 테이프를 돈 있으면 레코드 판을.
특히 클래식 판은 몇 장 발매되지 않았기 때문에 동네 레코드 점에는 없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물류가 풍부한 청계천, 종로 일대를 마치 보물 사냥하듯 뒤지고 다녀야 했다. 인터넷 판매는 커녕 전화 통신판매도 없었다. 오직 부지런한 발품만이 좋은 음악을 보장해주는 정직한 시대였다.
미우도 나를 끌고 마치 사냥터를 옮겨 다니는 맹수처럼 이 가게 저 가게를 다니면서 레코드 판들을 뒤졌다. 이 가게 저 가게를 다니면서 레코드 판 무더기를 뒤지느라 손가락 끝이 먼지로 까맣게 물들고, 거기에 가게 주인까지 가세해서 한 바탕 더 뒤진 다음에야 마치 트로이 유물처럼 레코드 판 하나가 미우의 품에 안겼다. 미우는 그런 식으로 대 여섯 군데 가게를 돌아다니며 먼지 펑펑 마셔가며 산 레코드 판들을 덥석 나한테 들이밀었다.
“자, 선물.”
“정말?”
“난 농담 같은 거 안 해.”
미우는 레코드 판들을 나한테 들이민 뒤 내가 받던가 말던가 관심 없다는 듯 손을 놓아 버렸다. 나는 땅 바닥으로 쏟아져 내리려는 판들을 거의 휘청거리는 자세로 받아 안았다.
나는 그때 미우가 힘들게 찾아서 준 레코드 판들을 아직까지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비록 LP를 재생할 턴테이블도 없어서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판들이지만, 게다가 이미 CD로도 스트리밍으로도 다 나와 있는 판들이라 굳이 그 LP를 재생해야 할 이유도 없지만.
그날 내가 미우에게 선물 받은 레코드 판들의 목록을 정리해 보면 대략 이렇다.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2LP). 헨릭 셰링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 9번 ‘크로이처’. 헨릭 셰링, 아르투르 루빈슈타인(P)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로망스. 헨릭 셰링,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지휘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1번-5번, 신포니아 콘체르탄테(3LP). 아르뛰르 그뤼미오, 콜린 데이비스 지휘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K301, 304, 376, 378. 아르뛰르 그뤼미오, 클라라 하스킬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K.454, K.526. 아르뛰르 그뤼미오, 클라라 하스킬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헨릭 셰링,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지휘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헨릭 셰링,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지휘
그 당시 클래식 레코드 판은 사치스러운 물건이었다. 한 장에 2000원씩이나 했는데, 시내버스 요금이 100원, 짜장면이 350원이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도매상이라서 2000원이지 일반 레코드 샵에서는 2500원씩 주어야 했다. 그런데 미우는 무려 10장이나 되는 레코드 판을 나한테 사주었다. 학생이 그런 큰돈을 가지고 다니는 것도 놀라웠고, 그 돈을 친구 동생을 위해 펑펑 쓴다는 것도 놀라웠다. 단지 내가 셰링과 그뤼미오를 몰라 안타깝다는 이유만으로.
하지만 나는 이런 빚지는 느낌을 싫어했기 때문에, 기쁨에 가득 찬 표정을 짓는 대신 “고마워요.”라는 짤막하고 쉬크한 인사와 함께 “그런데 왜 나한테 이런 선물을 해요?” 라고 물어보아야 했다.
“부담 갖지 마. 공짜 아니니까.” 미우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이것들 듣는 대신, 내 연주도 들어줘. 그리고 내 연주와 이 판들의 연주를 비교해 줘. 아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아는 척하지도 말고, 내 눈치도 보지 말고, 딱 느낀 대로만.”
“아.”
나는 감격, 뿌듯함, 두려움, 놀라움이 한꺼번에 뒤섞인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정우에 이어 미우도 나를 자신들의 귀명창으로 삼은 것이다.
귀명창은 비록 소리꾼은 아니지만 노래하는 법에 대해서는 명창만큼이나 잘 아는 애호가다. 경멸적 의미도 섞여 있는 딜레땅트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때 나는 미우, 정우 남매의 귀명창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피아노는 제법 많이 배웠지만 바이올린에 대해서는 악기 구조도, 연주법의 기초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정우가 귀명창을 요청했을 때처럼 대뜸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순간 ‘그럼 이 판들은 다시 돌려줘야 하는 것일까?’ 하는 엉뚱한 고민까지 하며, 미우가 건네준 판들을 받지도 주지도 못하며 서 있었다. 그 엉거주춤한 자세는 지금 생각해도 우스꽝스럽다.
“왜, 그러고 있어?”
“바이올린 잘 모르거든요.”
“너 음악 좋아하잖아?”
“네.”
“그거면 돼. 자, 극장 가자. 디누가 많이 기다리겠다.”
미우가 내 팔뚝에 손을 감으며 말했다. 나는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화끈대기보다는 따뜻하게 느껴졌고, 조금 지나서는 포근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