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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장편소설 디누 1부 20화 미우누나 3

by 권재원

3

그 해 겨울방학 내내 주말과 공휴일을 제외하면 거의 날마다 정우집에 들렀다. 들르는 목적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정우네 들러서 미우를 함께 만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미우네 들러서 정우를 만나는 것이 되었다.

정우 아버지가 속초 지점장으로 부임해 갔기 때문에 출근하는 아버지를 마주치지 않아 좋았다. 7시 50분경 정우네 집에 가서 남매 앞에서 한 시간 동안 피아노를 연습하고, 정우와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는 일정이 반복되었다.

미우 바이올린에 맞춰가며 연주한 덕분에 내 피아노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날이 갈수록 미우와의 연주는 레슨에서 2중주에 가까워져 갔다.

그렇게 2주 정도가 지났다. 여느 아침과 마찬가지로 나는 피아노를 치기 위해 정우 방으로 갔다. 그런데 정우는 벌써 어딘가 나가고 없었고, 미우가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청계천에 다녀온 다음부터 미우는 늦잠 자는 경우도 없었고, 허름한 실내복 차림으로 있는 경우도 없었다. 항상 내가 오기 전에 먼저 나와 단정하게 정우 방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도 발레리나처럼 바짝 당겨 빗어 모았고 단정한 체크무늬 스커트에 검은 색 아니면 회색의 불투명한 스타킹까지 신고 있었다.

“오늘은 늦었네? 나, 좀 기다렸어.”

“미안.”

청계천에 다녀온 다음에 일어난 또 다른 변화는 내가 말을 놓은 것이다. 누가 먼저 그러자고 한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참, 누나 이건 이런데….” 하면서 말꼬리를 흐리다가 결국 자연스럽게 말을 놓게 되었다.

“정우는?”

“다른 일 있어서 나갔어. 언제 올진 나도 모르고.”

“괜찮아.”

일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마음 한 귀퉁이에서는 오히려 더 잘되었다는 생각도 슬쩍 튀어나왔다. 미우와 단 둘만 있는 시간을 또 가지고 싶다는 바램이 있었는데, 마침 정우가 자리를 비워주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그런데 막상 소원이 이루어지고 나니 막막했다. 청계천에 갔다오기 전에는 오히려 편했는데, 이제는 이렇게 둘이 마주 보고 앉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미우도 그렇게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은 좀 다른 걸 해 보려고.”

한참 주저하던 미우가 노란색 표지의 악보를 슬그머니 내밀었다.

“그런데 조금, 아니 많이 미안한 부탁이라.”

나는 재빨리 악보 표지에 가늘게 인쇄된 알파벳을 읽었다.

‘Johannes Brahms Konzert fur Violine und Orchester in D op. 77.’

나도 이제 음반들을 꽤나 만져 보았기 때문에 그 정도 독일어는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작품 77’이라고 바로 읽을 수 있었다. 다만 그 악보는 총보가 아니라 오케스트라 파트를 피아노로 편곡해 놓은 것이었다.

“여기 오케스트라 부분을 좀 연주해 주지 않을래? 화음 한꺼번에 많이 누르는 게 부담되면 몇 개 정도 생략해도 괜찮아. 그냥 멜로디 라인이랑 기본 베이스만 있으면 돼.”

“하지만 이걸 어떻게 당장?”

연주 자체는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걸 처음 보고 바로 연주한다는 것은, 더구나 미우와 맞춰가며 연주한다는 것은 나한테는 너무 무리한 요구였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고개를 좌우로 돌릴 때 마다 목에서 빠지직 하는 기포 터지는 소리가 타닥타닥 마치 뼈가 튕기는 것처럼 들릴 정도였다.

“당장은 어려워. 정우라면 몰라도.”

“그래. 아무래도 좀 어렵겠지?”

미우가 다시 악보를 가져가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 괜한 소리 했네. 바보 같은 짓이야.”

나는 기분이 상했다.

그 말이 마치 “맞아 넌 바보였지?” 처럼 들렸던 것이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되물어 보았다.

“누나, 그런데 이런 건 내가 아니라 정우랑 같이 연습해야 하는 거 아니야?”

미우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다시 한 동안의 침묵.

나는 고개를 슬쩍 숙인 채 속으로 숫자를 셌다. 숫자가 50고개를 넘어갈 때 미우가 몸을 일으켰다. 스커트와 스타킹 사이에서 빠지직 하는 정전기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들리는 미우의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

“디누는 내 협주곡 연습까지 같이 할 시간 없어. 디누에게는 디누의 길이 있으니까.”

무슨 뜻으로 한 말일까? 이제 둘이 같이 연주 안하기로 한 걸까?

이때 미우가 바이올린 튜닝하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연주하려는 모양이었다.

“반주는 되었고, 그럼 여느 때처럼 내 귀가 되어 줄래? 브람스 협주곡 많이 들어봤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 중 하나야.”

“잘됐네.”

미우가 조용히 활을 들어 올리더니 연주를 시작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무척 아름다웠다. 도메니코 몬타냐나가 원래 조금 어두운 느낌의 소리를 내는 악기라 그랬을까, 미우의 마음 상태가 그랬을까, 바이올린이 흐느끼는 듯, 떨리는 듯 했다.

그런데 나는 그 간의 미우 연주에서 느끼지 못했던 불안의 소리를 들었다. 연주 자체가 무너질까 봐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느꼈던 것은 불안 그 자체였다.

미우는 불안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 불안을 이해하지도설명할수도 없었다. 나는 어렸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 불안이 무엇인지 안다. 앞으로 발을 디뎌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앞에 펼쳐지게 될 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느껴지는 두려움과 호기심과 설렘이 온통 뒤섞인, 그러면서 돌아갈 수 없이 뒤에 두고 온 곳에 대한 애석함을 버리지 못하는 그 복잡한 느낌인 것이다.

그 연주가 아름답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했지만 어린 내 귀에도 열 여섯이라는 나이에 맞는 연주는 아니었다. 아직 스무 해도 살지 않았는데 지나온 길에 대한 애석함이라니?

하지만 나는 음악 보다는 연주하는 미우 얼굴에서 조금씩 더 자리를 넓혀가고 있는 그림자가 마음에 걸렸다. 곡 자체가 그래서 그런 건지, 미우의 그늘진 얼굴이 내내 마음에 걸려서 그런 건지, 혹은 협주곡을 독주 바이올린 혼자 연주하고 있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점점 듣는 것이 불편해졌다.

미우 역시 연주하는 것이 불편했는지 1악장 카덴짜 도중에 활을 내리고 말았다.

“마음에 안 들지?”

“아니, 너무 아름다워.”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봐.”

그 순간 나는 와락 달려들어 미우에게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튀어 오르는 것을 억누르며 말했다.

“너무 아름다운 연주지만 더 넉넉하고 따스 했으면 좋겠어. 어둡다는 느낌이 들었고. 미안. 그냥 내 느낌이야 너무 신경 쓰지 마요.”

너나들이를 했지만 내 입에서는 때로 존댓말이 혼용으로 튀어나오곤 했다.

“오석아. 너 그거 아니? 넌, 뭔가 말하기 어려운 거 있을 때 꼭 존댓말 나와.”

미우가 얼굴에서 그림자를 지우면서 살짝 보조개를 만들었다.

“그, 그랬어?”

“그랬다니까? 그래서 귀여워. 거짓말 못하는 아이.”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물끄러미 미우의 목덜미에 시선을 맞추었다. 멍청할 정도로 넋을 놓고 아무 말없이 그러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른 거 해야겠다.”

미우가 침묵을 깨며 다시 바이올린을 들어 어깨에 얹었다.

조용한 그러나 결코 평화롭지는 않은 D마이너의 더블 스토핑이 거칠게 울리더니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어디로 갈지, 어디에서 멈출지 알 수 없는 계단과도 같은 주제가 펼쳐 나왔다. 내가 너무 잘 알고 있는 곡, 바흐의 무반주 파르티타 2번의 샤콘느였다.

경이로웠다. 분명 혼자 연주하고 있었지만, 마치 개성이 다른 두 연주자가 연주하는 것 같았다. 주선율 연주는 깃털처럼 가벼웠고, 베이스는 땅 속에서 울려오는 것처럼 무거웠다. 주선율은 저 멀리 지평선 너머 붉은 노을 위로 날개 짓조차 하지 않고 날아가는 것 같았지만, 그때마다 묵직한 베이스가 발목을 잡으며 모든 것을 다시 지상으로 끌어내렸다.

그럼에도 하늘에 대한 갈망은 아르페지오로 펼쳐졌고, 마침내 베이스도 점점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이들은 만나기 시작했는데, 더블 스토핑으로 가벼운 아르페지오를 연주하는 대목에 이르자 나는 맨 정신으로 듣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마침내 곡은 처음 시작할 때의 동기로 돌아오면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그 많은 과정을 거쳐서 다시 도달한 그 동기는 처음과 악보상으로는 똑 같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소리였고,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미우가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파르티타 음반은 지금도 남아있고, 내 컴퓨터와 아이폰에도 저장되어 있다. 하지만 그날 나 홀로 들었던 그런 연주는 미우는 물론 그 어떤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로도 두 번 다시 듣지 못했다.

눈물샘이 폭주했다. 미우 앞에서 그렇게 얼굴이 흠뻑 젖어버린것이 부끄러워서 얼른 팔뚝으로 눈가를 훔쳤지만 다큐멘터리로 봤던 아이슬란드의 간헐천처럼 내 눈은 불규칙적으로 더운 눈물을 뿜어 내었다.

그때 뺨에서 갑자기 서늘한 느낌이 전해졌다. 미우가 손으로 내 뺨을 쓰다듬은 것이다. 그토록 격한 연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우의 손바닥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 차가운 손바닥이 조용히 내 뺨을 쓰다듬고는 어깨를 가볍게 만져주자 마술처럼 간헐천이 진정되었다.

“자아, 기분도 그런데, 누나랑 같이 어디 나갈까?”

“정우 오면?”

“알게 뭐람. 자, 옷 입어.”

미우가 내 어깨를 탁 두드리더니 손을 떼었다.

주섬주섬 외투를 걸쳐 입고 장갑과 목도리를 챙겼다. 미우는 바이올린을 케이스에 조심스럽게 집어넣고 “잠깐 기다려.” 라는 한 마디와 함께 자기 방으로 사라졌다가 두꺼운 패딩과 모자를 쓰고 돌아왔다.

“난 추위 타거든.”

“어디 가?”

미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미묘한 웃음기가 볼 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이것이 이들 남매의 버릇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 웃음기가 한번 스쳐 지나가면 그들은 더 이상 자기 생각을 털어놓지 않았다. 나는 더 물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미우가 가자는 대로 집 밖으로 나섰다.

나서자마자 미우는 내 팔에 손을 끼워 넣었다.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차가운 겨울바람 덕분에 붉게 변한 얼굴에 대한 핑계가 되었다.

마침 ‘크레아트’라는 이름의 인테리어 가게 앞을 지나가자 매장에 세워둔 큰 거울을 통해 팔짱을 끼고 가는 우리 모습이 보였다.

난 그 모습을 보고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미우는 고등학교 2학년 소녀에 불과했지만 워낙 외국 무대를 자주 다니며 공연 했기 때문에, 머리 스타일이나 옷 입는 스타일,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에서도 여학생이 아니라 완연한 젊은 숙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반면 나는 원래부터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는 데다가 지독하게 검소한 어머니 덕분에 국민학교 때부터 입었던 외투를 계속 걸치고 있어 중학생인지 국민학생인지 헷갈리는 모습이었다. 미우와 내가 나란히 걸어가고 있는 모습은 마치 갓 부임한 선생님과 학생 같아 보였다.

“어머!”

미우가 살얼음에 살짝 미끄러지면서 내 팔을 꽉 잡았다. 나는 오른팔에 갑자기 집중되는 무게와 압력 때문에 균형을 잃고 휘청거릴 뻔 했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 힘껏 버텼다. 내가 용을 쓴 덕분에 미우는 지면과 접촉하지 않고 균형을 되찾았다.

“미안, 놀랬지?”

“아니.”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기 위해 이를 악 물어야 했다.

“미안하다니? 고맙지.”

“고맙다니? 뭐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미우도 굳이 더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이미 미우에게 마음을 들켜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어린아이가 아니라 남자임을 증명하지 않았나? 그런데 겨우 그 정도 가지고 미우 앞에서 남자 노릇을 했다고 생각하는 내가 우습기도 했다.

정우였다면 어땠을까? 정우는 나보다 재빠르고 근육도 단단하고 힘도 세니까 하마터면 미우와 함께 미끄러질 뻔한 나와 달리 바위처럼 단단하게 버티지 않을까? 왜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지 스스로도 한심 했지만 신기하게도 그게 싫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어디 가?”

“글쎄. 암 생각 없이 나왔는데. 참, 그래. 누나 애인 만나러 가자. 언젠가 꼭 너한테 소개 시켜주려고 했는데, 지금 가자.”

미우가 나의 한심한 생각에 종지부를 찍어 주었다.

애인.

이 단어를 듣는 순간 나는 어머니의 무시무시한 꾸지람에도, 아버지의 모멸적인 말에도 느끼지 않았던 아픔을 느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커다란 공허감과 분노가 뒤섞여서 내 속을 마구 활퀴고 지나갔다.

미우에게 느끼는 이 감정이 뭔진 몰라도, 미우를 보면 마냥 좋았다. 볼 때 마다 점점 더 예뻐 보였다. 두 번 보면 두 배, 세 번 보면 세 배 예뻤다. 연주를 들으면 행복했다. 바이올린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 신성함마저 느껴졌다. 미우가 가까이 다가오면 떨렸다. 미우와 함께 지내는 정우가 부럽고 때로는 밉기까지 했다.

이 모든 것들의 의미가 무엇일까? 사랑? 적어도 내가 수많은 소설을 읽으며 간접 체험했던 사랑과는 달랐다. 하지만 무슨 소용이람? 그 예쁜 입술에서 나온 단 한 마디 단어가 그런 모든 생각들을 부질없이 만들었다.

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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